[찬샘별곡 74]논두렁 예초와 ‘조장助長’한 콩농사
며칠 벼르던 논두렁 풀을 예초기로 깎았다. 오전 10시 이후엔 하고 싶어도 너무 더워 할 수 없는 일.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 동안 깎으니 절반은 해치웠다. 이제 오후 5시 이후 2시간여 하면 세 다랭이(3필지, 1마지기 200평)을 둘러싼 논두렁의 무성한 풀은 다 깎을 것이다. 풀이 마른 후 이삼일내 풀약(제초제. 바스타나 테라골드 1병에 1만원이 넘는다)만 하면 된다.
예초를 하루이틀 미룬 까닭을 말하자. 지난해부터 한 다랭이(600평)에 3월말 옥수수를 심고, 7월초 수확할 즈음에 메주콩을 심는 ‘이모작’을 시도했다. 올해도 역시 옥수수대(줄기)를 베어 고랑에 눕히고, 곧바로 콩을 심었다. 혼자서 사흘 동안, 비를 맞아가며 6000개도 넘는 구멍에 일일이 콩을 심었으니, 가히 가상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거의 싸그리 콩들이 나지 않은 것이다.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6000여 구멍 중 50여개나 난 듯하다. 오 마이 갓! 올해 콩농사는 완전히 ‘폭망(폭싹 망함)’했다. 원인을 분석해보니, 콩을 10cm정도 깊이로 심어야는데, 너무 깊이(30cm) 심은 것이다. 손으로 구멍을 뚫어 심었다면, 아무리 장마가 길고 비가 많이 왔어도 괜찮았을 것인데. 너무 깊다 보니, 콩이 싹을 튀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하의 물이 많으니 곯아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비둘기들은 어찌 그리 귀신같이 알고 콩을 파먹을꼬? 작년에는 메주콩 600kg(20kg 30부대)를 생산해 농협에 수매, 300만원을 벌었거늘. 흐흐.
마음이 급하다보니 쇠대롱(막대기)으로 거의 뛰다시피하며 25개 고랑에 구멍을 먼저 뚫은 후 콩을 심었으니, 당연히 구멍이 너무 깊을 수밖에. 나무 막대기로라도 뚫었다면 좀 나았을텐데,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무엇하리.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실적은 그야말로 ‘쥐뿔’조차 안됐으니, 논 근처에만 가면 속이 뒤집어지거니와 옥수수대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니 누군들 가고 싶겠는가. 농사꾼으로서는 물론 소득이 첫 번째일 것이나(돈은 역시 돈이다), 일단 마음에 큰 상처를 크게 마련이다. 풀만 무성한 텅빈 논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찌 평탄, 평온할 것인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손으로 일일이 심을 걸, 그놈의 쇠막대기로 구멍을 찔러댔으니, 배수도 잘 안된 고랑에 콩이 어찌 싹을 틔울 수가 있었겠는가.
논두렁 예초를 하다 거의 전멸상태인 콩밭을 바라보니 ‘가뭄에 콩나듯’이라는 속담도 해당이 되지 않음을 알았다. 문득,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송인宋人의 ‘조장助長’고사가 생각나, 원문을 뒤져봤다. 에이-, 이왕 생각난 김에 ‘한문 공부’나 하자며 원문을 싣는다.
宋人이 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러니, 茫茫然歸하여, 謂其人曰 今日에 病矣로라. 予助苗長矣로라하여늘, 其子趨而往視之하니 苗則槁矣러라.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니 而爲無益而舍之者는 不耘苗者也요, 助之長者는 揠苗者也니, 非徒無益이라 而又害之니라.
송인(송나라 사람)이 어리석다는 말은 있어 왔지만, 이 사람만큼 어리석을까? 모를 심어놓고 자라지 않는 것같자 이를 염려해(근심할 민閔) 벼싹을 조금씩 올려당겨 뽑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제 잘못을 모르고(망망茫茫) 집사람들에게(기인其人)에게 “내가 벼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줬다”며 피곤하다(피곤할 병病)고 했다. 그 아들이 달려가(달릴 추趨) 보니 벼싹이 모두 말라죽어(마를 고槁) 있었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억지로 도와주는 자가 얼마나 있으랴. 이는 유익함이 없다하여 버려두는(버릴 사舍) 자는 벼싹을 김매지(김맬 운耘) 않는 자요, 벼싹이 자라도록 억지로 돕는(조장하는) 자는 벼싹을 뽑아놓는 자이니, 이는 비단(아닐 비非 한갓 도徒) 유익함이 없을 뿐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이다.
물론 조장의 경우와는 다르나, 조금이라도 빨리 심으려고 요령을 피운 것도 비슷한 사례일 것이다(뭣도 모르면서 말이다). 흐흐. 아무튼, 언제나 송인의 고사를 배우며 마지막 구절을 소리내어 읽으며 킥킥거렸던 기억이 있다. ‘助之長者는 揠苗者也이니 非徒無益이요, 而又害之니라“ 킥킥거리던 이유는 무엇인가? 조지(남자생식기)가 큰 놈은 그 뿌리(싹)을 뽑아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유익하지도 않고 되레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까닭이다. 하하. 웃자고 한 이야기임을 헤량하시라.
아무튼, 긴 장마 끝에 찾아온 폭염 속에서도 벼꽃이 만발하고, 나락이 익어가고 있다. 이제 곧 온 들을 황금벌판으로 만들 것이다. 쌀이 되고 우리의 밥이 되는 나락이 또록또록 영글고 있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 풍경인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그림 중에 가장 으뜸가는 그림일 터. 풍요豊饒가 바로 이런 것이거늘. 어느 언론인은 『벼꽃 피는 마을이 아름답다』(황풍년 지음, 2010년 전라도닷컴 펴냄)라는 책에서 ‘우리는 장미는 없어도 살제만 벼꽃이 없으면 죽어라우’라는 촌할머니의 말을 인용하며, 벼꽃을, 벼꽃피는 마을을 예찬했었다. 나도 그렇다. 배동바지(벼의 이삭이 나오려고 대가 불룩해질 무렵)부터 지금까지, 농촌사람, 우리는 가난해도 영원한 부자인 것을. 왜냐하면 언제나 늘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을 벗삼아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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