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69
4월23일[부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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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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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FoP5LIcSh8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964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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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감동적이며 가슴 벅찬 성체성사>
엠마오 사건은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감사한 은총의 사건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갖은 세상 풍파에 시달리면서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철저하게도 나 혼자로구나.’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홀로 걷는 내 인생 여정에 슬그머니 끼어드십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산책하시고,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십니다. 주님께서 내 여행길에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와 한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복음 24장 30~31절)
루카복음사가에 의하면 ‘빵을 뗌’은 성찬례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지만, 성찬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형상으로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입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으심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동시에 기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제자들 사이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구체적인 장소는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오늘도 봄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우리에게 잘 포착되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다른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참석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의 형체를 드러내십니다.
관건은 성체성사를 대하는 우리 각자의 태도입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 듯이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의무처럼 미사를 대하는 우리에게 성체성사 안에서의 부활 주님과의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돈 보스코 역시 성체성사가 영성생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영성생활의 가장 강력한 무기 두 가지는 바로 열심한 영성체와 잦은 성체조배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체성사를 향한 경외심은 엄청났습니다. “하느님의 성자가 사제의 손에 들린 채 제대 위에 나타나실 때면 인간은 전율하고, 세계는 떨며, 모든 천상은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성체성사를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믿었습니다. “성체성사 중의 기적은 하늘의 별들보다도, 또 세상에 있는 모든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습니다. 성체성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이토록 감동적이며 가슴 벅찬 성체성사입니다. 이토록 감격적인 천상전례에 참여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요? 성체성사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영예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 안에서 가장 큰 가치와 우선권을 둬야 하는 대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남루하고 초라한 일상을 품위 있게 만들어주는 영약입니다.
또한 성체성사는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건너가야 합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어제의 죄스런 나에서 오늘 거룩한 신앙인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어제의 분노와 질투의 화신에서 오늘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자비의 인간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어제의 음울한 죽음의 땅에서 오늘 밝고 찬란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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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KJxpuvVD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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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할 수 없으면 믿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미사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를 설명해 놓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라고 하는 것처럼 말씀이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에서 말씀을 설명해주시는 이유는 이미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를 준비 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이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주님을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에서 말씀을 설명해주시는 이유는 이미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를 준비 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이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주님을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믿게 하도록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예상’하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예상하지 못하여 어머니도 못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머리숱이 거의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날은 처음으로 가발을 쓰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어디서 많이 본 아줌마로 생각했습니다. 가발을 벗으셨을 때야 비로소 어머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자들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이 다시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가발이란 것이 있음을 알아야 어머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자들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이 다시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가발이란 것이 있음을 알아야 어머니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들도 부활을 믿을 수 있어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상하게 만드는 일을 성경 말씀이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순종을 통한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죽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쳐야 하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랬더니 축복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다 이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죽음과 부활을 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하인을 보냈을 때 하인은 어떤 방법으로 신붓감을 알아보려 했을까요? 그가 주님께 자신이 물을 청할 때 자신과 자기 낙타들에게도 자발적으로 물을 주는 여인이 자신이 찾는 여인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창세 24,14 참조)
이사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리스도를 만나 한 몸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은 이렇게 말씀으로 이미 착해진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한 이들은 진정 착해집니다. 죽음과 부활을 살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봐야 이해됩니다.
부산교구 김홍석 신부가 용호성당 보좌로 있을 때 병자 성사를 위해 폐암 말기 환자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환자는 성체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성체를 영하는 순간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렸습니다. 김 신부는 영대로 가래가 묻은 성체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다가 그것이 예수님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영했습니다. 성체를 영한 후 심한 고열과 함께 24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는데, 그때까지 290 이하로 떨어져 보지 못한 혈당 수치가 100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출처: ‘요나 신부의 서랍 속 이야기; 예수님께 받은 100점!’, 생활성서사 2016년 4월호]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드디어 성경을 실천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잘 맞아들여 집 안에 축복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은 이웃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게 만들어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 드리기 위해 먼저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해 봅시다. 그러면 그 선악과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생명나무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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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3년 전입니다. 코로나로 모든 성당의 문이 닫혔을 때입니다. 저는 가톨릭방송을 통해서 부활 제2주와 3주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때의 강론을 읽어보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잠시 그때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서 기도할 수 있었던 성당의 문은 닫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던 미사가 중지되었습니다. 성가를 부르고, 강론을 듣던 신자들이 그립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늦게라도 성당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신자들이 그립습니다. 항상 먼저 성당에 오셔서 묵주기도를 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주일 그토록 혼잡했던 성당 마당의 주차장은 텅 비어있습니다. 차량 안내를 맡아서 수고하셨던 형제님들도 그립습니다. 농구장에서 뛰어놀던 학생들도 그립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음식을 준비하던 자매님들도 그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던 새 사제들은 더욱 신자들이 그리울 겁니다.
신자들의 마음도 비슷할 겁니다. 고백성사를 볼 수 있었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던 순간이 그리울 겁니다. 미사 후에 제의를 입고 신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사제가 그리울 겁니다. 한 달에 한번 봉성체를 하였던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은 성체를 모시고 오던 사제가 그리울 겁니다. 본당 단체 모임 중에 함께 하였던 사제들이 그리울 겁니다.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며 문제를 해결하였던 시간들이 그리울 겁니다. 사제들이 준비하였던 피정, 특강이 그리울 겁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강복과 파견을 하였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다시 만나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웃는 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백신을 맞았습니다. 치료약도 생겼습니다. 아직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우리는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코로나 팬데믹은 지나갔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저는 다시 가톨릭방송 미사를 이렇게 봉헌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고, 수많은 표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광주리가 되었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신앙 활동이 멈추었던 것처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던 예수님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늦은 밤에 체포되었습니다. 가야파와 헤로데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종려나무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썼고,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표징과 기적을 보여주었던 권위와 권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느님나라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절망과 고통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자리에 없던 토마사도에게도 나타나셔서 “토마야 네 손으로 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 같았던 하느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엠마로오 가던 제자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나 나누어 주셨을 때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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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오늘 전례에서도 파스카의 의미를 신앙의 빛에 비추어 알아들으려 하는 노력하고 그 부활체험을 증거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즉 성령강림이 주님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한다. 즉 주님이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올라가 성령을 부어주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의 도달점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아듣고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예로니모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구약성경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권위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시다. 부활 날, 두 제자가 실망에 가득 차 엠마오로 가면서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동행하며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때 제자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모두 무너져 침통하다는 말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형당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나 되었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의미이다(21절). 두 제자와 다른 모든 사람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십자가의 일은 정반대의 일이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는가를 깨우쳐 주신다(25-27절). 그러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였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성경의 예언은 하느님의 옳으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들과 제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왜곡하고 편리하게 해석하여 참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멋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 주신다. 이렇게 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가 되살아난다. 이렇게 신앙의 메시지로서의 성경의 말씀은 오직 믿는 마음을 통해서만이 그 풍부한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있다.
예수께서 성경에 관해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 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경을 받아들일 때, 성경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 성경과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절).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35절) 한다. 이것으로 믿음은 인간에게 파스카 신비를 열어 보여줄 뿐 아니라, 믿음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행위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부활과 만남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활의 원인이며 또한 결실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성경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 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 성경이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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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9-2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사도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33절-35절),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현장에서 모든 일을 직접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성모 마리아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9,25), 엠마오의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클레오파스’와 요한복음에 있는 ‘클로파스’는 동일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엠마오의 두 제자는 클레오파스와 그의 아내입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간 때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천사가 전해 준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아직 신자들과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은 때였습니다.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의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하고 술렁거리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아직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 입장에서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던 상황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일을 사도들에게 전한 때는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난 뒤였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정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면,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엠마오로 가는 길을 ‘그릇된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집에 가자고 생각하고서 집으로 돌아간 일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 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원래의 인생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 사도들은 모두 달아났고, 공동체도 흩어졌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 26,31)
그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은, 흩어진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한 일, 즉 원래의 인생으로 되돌아갔거나 되돌아가려는 신앙인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도’ 나타나셨다고 증언했습니다.(1코린 15,5-6) 따라서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일은, 두 제자만 체험한 일이 아니라, 당시의 신자들이 모두 체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인데, 교회가 교회로서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과 그 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갖게 된 때부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 체험과 확신을 바탕으로 한 종교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25절-27절) 메시아의 수난, 죽음, 부활을 이해했고,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눈에 보이면 좋고 안 보여도 상관없는 신앙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예수님의 부활을,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증언하게 됩니다. 그 체험과 확신과 증언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각자 나름대로 어떤 체험을 하고, 확신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체험과 확신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좀 서툴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변함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 자체가
훌륭한 증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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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에 관한 어제 복음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두 복음은 같은 날, 곧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어느 날에 일어난 두 가지 다른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지어 함께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특별히 “나다.”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 양식과 같습니다.(탈출 3,14; 이사 43,10-11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신원을 밝히고 계십니다. 이와 함께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불신을 버리고 확신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이해하려면 그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은 어두운 저녁에 큰 바람으로 거칠게 출렁이는 호수 위에서 펼쳐집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설정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혼란과 위험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다가가 당신의 신적 정체를 드러내시며, 그들을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마주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어둠과 죽음,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과 위로는 위기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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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누가 주님을 참칭(僭稱)하는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가는 내내 그동안 예수님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중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합류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날이 저문 후 예수님과 식사를 하게 될 때에야 가리어진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한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영상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의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성경을 읽는 그들의 종교에서. 그들이 만났다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의 눈은 가리어져 있는 듯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의 눈이 가리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요?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육신의 모습으로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토마스 사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상의 흔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게 팩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종교에서 그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가 만난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해서 예수님이 다르게 부활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성사의 은총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들은 공생활을 하시던 예수님의 행적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링기에 성체성사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참칭(僭稱)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참칭(僭稱)의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스스로 황제나 왕이라고 일컬음'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과 다른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변할 수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자신을 바꾼 사람들 중에 올바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이 그러신다면 그런 신음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3년의 공생활을 통해 당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한 공적 계시이자 마지막 공적 계시라고 교리에서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우리가 아는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이 있다고 애기한들. 설령 그렇게 애기하는 사람들이 여러 기적들을 체험했다고 얘기한들 그들이 애기하는 예수님은 예수님을 참칭(僭稱)하는 이단에 불과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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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군종교구 원선희 토마스 신부님]
<말씀과 성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루카 24,13-35)>
제자들이 힘을 잃은 채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마음이 뜨거운 사람들이었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혼란과 침통을 감추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예언자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리라 믿고 따르던 분이 결국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분이 그렇게 허망하계 죽음을 맞이했으니 하느님을 믿던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허탈과 좌절을 선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다시 열정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어떻게 다시 열정적인 힘을 찾게 되었을까요?
바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빵을 나누십니다. 함께 머물러 달라는 제자들의 청을 받으셨고, 당신께서는 제자들과 혜어지시기 전,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눈이 열렸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말씀ㆍ2ㅇㄴㅂ7통하여,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다시 하느님 안에 불타오르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찬례를 통해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성체성사로써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에게 아주 긴밀하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안에서 살아갑니다. 말씀과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선포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이 짧은 말씀 안에서도 큰 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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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1999. p282)
기도에서 직접 위로와 빛 등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는 시간 낭비처럼 생각될 만큼 무미건조할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를 '오래 궐할 생활'과 '무미건조싼 것 같은 기도이지만, 줄곧 행한 생활' 과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마음이 메말라진다. 후자의 경우에는 마음이 젖어 있다. ~ 사람들은 항삼 무언가 느끼고 체험하기를 원하게 되고, 그런 것 없이 무미건조한 기도는 하지 않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면 하느님은 당신의 깊은 신비를 마음속 깊이 전달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당장에 위로가 없더라도 묵묵히 하느님 앞에 나와 있는 기도, 무미건조해도 꾸준히 이어가는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신앙생활이 좀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교회 또한 내실화되지 않겠는가? -故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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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현민 베드로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길>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의 ‘영적 여행’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인 여행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까이 가시어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뿐, ‘예수님을’ 알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누구를 안다고 했을 때, 정말 그 사람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는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타인에게도 알려진 그 사람에 관한 정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서로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인격적 만남을 가지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인격적 대화를 먼저 건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함께 앉아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같은 행동을 하시면서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 순간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곧바로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형상은 더 이상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인간적 만남’이 아닌, ‘성사 안에서 인격적 만남’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들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 즉 심리학적인 용어로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성체 성사는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성체 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통해 우리가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 만남을 체험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엠마오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 여정 안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혹시 예수님을 알아보셨다면 참으로 복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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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실패했다고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나실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고, 자신들은 그분의 왕좌로 인하여 곧 국무총리나 도지사는 되어 세상을 통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다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돌아가신 후 끈 떨어진 연을 바라보듯이 허망해 했습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져 낙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요한 24,13.14)
그중 두 명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15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부활하신 후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 때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6절) 예수님께선 제자들의 그런 반응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 마음 안으로 들어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ㄱ절) 그러자 제자들은 기가 차고 답답한 마음으로 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17ㄴ절) 그리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식으로 반문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18절)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19절)라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제서야 그간의 이야기를 말씀해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살아생전의 지침을 알아듣지 못하고 슬퍼하며 허둥대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실망스럽고 애가 탈 만도 하신데, 전혀 나무라지 않으시고, 성경을 통해 주님 자신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 성경 전체에 걸쳐 ……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25-27절) 예수님의 설명을 다시 듣던 제자들은 날이 저물고 묵을 때가 되자 에수님께 자신들과 함께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29ㄱ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29ㄴ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청을 따라 숙소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자신들에게 나눠주시는 모습을 바라본 제자들은 그제서야 자신들 앞에 앉아 있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31ㄱ절) 마치 기도중에 주님을 뵈옵는 찰나와도 같은 순간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31ㄴ절)
기억과 재현의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뵈옵고 생전의 신비스러운 가르침들을 깨우치게 된 제자들은 감격해 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되새기게 되면서 그들은 그분의 사명이 무엇이고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이윽고 제자들은 다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엠마오록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발현사건에서 신앙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첫째, 우리는 이 기사에서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주님은 동틀 무렵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바로 이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성경의 말씀과 연관시켜 설명해 주시고 빵의 나눔을 통해 깨닫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제자들을 직접 가르쳐주시고 먹여주시면서 키우시느라 애쓰십니다. 똑같이 우리는 오늘 십자가상 제사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미사 성제를 통해 이 사랑의 절정과 완성을 봅니다. 미사 역시 주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전례의 형식으로 기념하고 재현함으로써, 오늘 미사를 봉헌하는 바로 여기서 다시 주님 구원이 계속됩니다.
둘째, 제자들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은 빵의 나눔이라는 표징을 통해 자신을 알아보도록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미사 성제(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만남이 바로 미사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면서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우리 삶의 방향과 방법을 교정하고 주님의 안배하심과 보호하심과 이끄심 안에서 주님과 점점 일치되어 갑니다.
셋째,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은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적인 현상,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31ㄱ절)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대한 ‘기억이 나고’, ‘생각이 나며’, ‘느낌이 들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우리가 “미사 중에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 역시 주님과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대면만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현실,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14절)을 일어난 사건과 현상 그대로만 알고 있는 우리가,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 사건과 현상 너머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미사의 독서와 강론을 통해 알게 되었을 뿐더러, “이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25-27절) 그 깨달음을 지식이나 지적인 흥분에 그치지 않고, 받아들이며, 믿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영함으로써 확고히 심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십자가상의 제사로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주님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미사가 우리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는 사실이, ‘주님께서 십자가상 제사를 바치심으로써’ 명백히 드러났고 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성체성사(미사)를 통해 일러주시고 심어주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우리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됨으로써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받아들인 만큼밖에 숨쉬지 못하지만, 지속되는 우리의 활동과 미사 참례를 통해 교정되고 다시 심화된 우리의 활동 속에서 완전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1-12)
그러므로 미사는 우리가 주님과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신앙의 원천이며, 주님은 미사를 통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하자고 우리를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오늘 현실이라는 커다란 벽에 가로막혀 실패하고 좌절하여 엠마오로 떠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읽고 듣는 복음의 말씀을 깨우치게 해주시고, 부활하시는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새 생명의 힘으로 복음 말씀을 실현할 수 있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선교와 복음화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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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신 자신이며 일상인 빵>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3,30)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희망이었던 스승이 그만 십자가형으로 죽었습니다. 터덜터덜 낙향 중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일어난 절망스러운 사태를 되짚어보고 있었을까요?
여자들이 천사를 통해 들었다는, 바로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말은 또 뭔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때 주님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이 가리어졌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왜 눈이 가리어졌을까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근심과 걱정뿐이어서 그럴까요? 뭔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여간해서는 제대로 보기 어렵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없는 분입니다. 없는 분을 볼 수는 없었겠죠.
1. 알아보자마자 사라지신 예수님
예수님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요술 게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다는 건 일종의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에게 빵은 그냥 빵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입니다. 빵의 속성은 나누어지고 건네져 먹혀야 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장 참조)
제자들은 그동안 빵을 떼어 건네시는 주님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5000명을 먹이신 주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 하느님 아버지께 하소연하는 주님 모습입니다. 그때 나누어진 것은 단순히 빵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더 결정적입니다. 수난 전날 마지막 만찬 때 일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하십니다.(마태 26,26) 첫 번째 성찬례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지금도 이 예를 행하고 빵을 받아먹습니다. 그 순간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먹고 바오로 사도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회심이고 일깨움입니다.
2. 주님이 우리 맘속에 살아있는 분으로 모셔져 있는가?
그들의 눈이 열렸는데, 주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주님이 들려준 말씀은 처음 듣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전에 자주 들려주시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왜 그리 믿는 데에 굼뜨냐’고 주님으로부터 야단까지 맞습니다. 제자들 맘속에 각인된 뭔가가 있고, 빵을 떼는 행위로 그것들이 작동됩니다. 끊어졌던 기억이 연결됩니다. 주님이 들려준 말씀이 되살아났고 빵을 떼어 주시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주님과 함께 나눈 형제애였고 일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나그네와 하룻밤 동숙’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는 언제나 길가는 나그네요 이웃일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이 우리 맘속에 살아있는 분으로모셔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순간 ‘주님이시다’ 하고 깨닫게 됩니다. 빵은 떼어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는 실재이면서 상징입니다.
‘아하!’ 탄성의 순간, 형체를 지닌 주님은 사라지십니다. 그러나 새로워졌습니다. 용기를 내 삶으로 들어갑니다. 두 제자는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그들이 처한 여건은 여전히 어둡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실망과 좌절, 두려움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른 열한 제자와 동료들과 비슷한 체험을 서로 나눕니다. 우리도 비슷한 체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늘 두 명의 제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만약 두 제자가 낯선 이와 말을 섞지 않았다면, 그의 말에 경청하지 않았다면, 저녁나절인데도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식탁에 함께 앉아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부활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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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동행인으로 모셔야 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영성체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와 말씀과 성찬에 대해 중심을 두면 좋겠습니다.
먼저 복음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영광을 좇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큰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에 슬픔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동행하실 리가 있겠나 하는 마음이죠. 마음의 눈을 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인생 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낙담 안에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늘 함께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 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자식이 원하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지만 때로는 마음 아파하면서도 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도 때가 되면 그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의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망과 허탈감으로 고향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나그네를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굳이 ‘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이 붙잡는 모습은 우리의 기도, 간청을 돌아보게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풀이해 주는 성경 말씀에 감동하여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창세기 18,1-15)
“은총은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지만, 아무에게나 마구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이현주)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이전의 모습과 같으면서도 달라서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만이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상 안에서 예수님이 오시든지 가시든지 그냥 놓아두지 말고 못가시게 간절히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은 뿌리치고 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여정에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당장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지나고 보면, 오히려 그것이 은총일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라진 후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 하고 서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낙심시켰던 예루살렘으로 곧장 돌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날이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40리 길을 곧장 걸어갔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를 통해 주님을 모시는 기쁨이 그리도 클까요? 그 기쁨을 전할 용기가 있나요? 우리는 저마다의 필요한 요구와 희망을 안고 미사참례를 합니다. 그럼에도 잠념이나 분심이 들어서 미사를 봉헌한 것 같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자체를 봉헌하시면 됩니다. ‘저의 이 부족함을 받아주십시오. 온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도록 저의 마음을 바로잡아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날 그분의 손길을 꼭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동행인으로 맞아들여 그분과 함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우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고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정태현신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상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
그리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시편1,3) 그러니 마음을 다하여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가슴을 뜨겁게 한 말씀과 마음의 눈을 열게 한 ‘빵을 떼어 주시는’성찬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그 최상의 조합은 미사입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사실 “성찬례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미사참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은 때때로 지치고 짓눌린 우리 영혼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어 주는 양식입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목적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 은총을 가득히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만나러 오시어 우리를 먹여 살리시고 굳건히 붙들어 주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미사는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 함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으로 충만하여 세상에 나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이신 예수님의 현존은 내어주는 삶이며 우리가 함께 나누어 모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 빵을 받아 모시며, 우리의 삶을 내어주는 선물로 바꾸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섬기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미사 안에서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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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폭력은 신체적 폭력도 있지만 정신적 폭력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폭력이 더 무서울까요? 사실 뇌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인간관계에서 거절당하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둘 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먹으면 이별의 고통이나 왕따로 인한 괴로움도 훨씬 완화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적 폭력도 신체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 폭력으로 인간관계가 깨질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이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을 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큰 아픔을 주었다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지 않습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아픔과 상처를 주신 것처럼 책임을 몰면서 주님을 믿지 않으며 멀리하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과연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해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침통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고향 엠마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루카 24,18)라고 말하면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만이 예수님을 경멸하기 위해 쓰던 호칭이었지요. 그만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며 고향 엠마오로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60스타디온을 함께 걸었습니다. 스타디온은 그리스식 길이 단위로 계산하면 약 11.5km 정도입니다. 걸어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지요. 두 시간 동안이나 함께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시간을 믿음이 굳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주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라면 즉,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다면 그 폭력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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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십자가의 길을
떠나시기 바로 앞선 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처럼 되어 나누어지라고
오늘만이 아니라
당신을 길이 기억하며
늘 그렇게 나누어지라고
십자가의 길을
그분 홀로 걸어가시던 날
그분의 살과 피를
기꺼이 먹고 마셨던
벗들은 그분을 버리고 떠났지
참담한 마음이야
없을 수 있을까마는
그저 제 살 길 찾아서
그분을 집어삼킨
패배와 두려움 가득한
그곳에 그분 홀로 남겨두고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를 완성하신 다음 날
그분께서는
제 살 길 찾던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다시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살아난 당신을 알아보라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 떠나는
패배의 길에서 발길을 돌리라고
십자가와 그 너머 부활이
아픈 만큼 찬란히 이어지는 나날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고 나누시지
그분의 살과 피를 모신
그분을 사랑하는 벗들은
그분처럼 기꺼이 나누어지고 나누어지지
십자가 너머 부활하는 믿음으로
어둠을 사르는 빛나는 희망으로
벗을 살리려 죽어가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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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동행>
오늘 엠마우스 얘기를 묵상하자니 주님께서 드셨던 백 마리 양 비유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바로 비유의 잃은 양이라고 연결이 되었던 것이지요.
엠마오 두 제자는 왜 엠마오로 갔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단 곧 주님의 공동체서 이탈하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제자를 ‘제멋대로 이탈한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진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주님의 공동체에서 이탈했겠습니까?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저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제자들의 배에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풍파를 만난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신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공동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와 같이 살던 자매가 공동체를 떠난다면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떠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 공동체에도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강하게 반문합니다. 언제나 어디나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공동체에 안 계신다니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에는 죽어 계신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드려도 그분을 우리 공동체에 모셔 들이지 않기에, 매일 기도를 드려도 그분 말씀을 우리가 공동으로 듣지 않기에 죽어 계십니다.
그리고 매일 예물을 바쳐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예물을 바치기에, 매일 성체를 모실 때 주님은 모셔도 형제는 받아들이지 않기에, 매일 주님의 몸인 빵을 먹어도 그 빵을 형제와 나누어 먹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형제를 내친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의 잘못도 있지만 개인의 잘못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엄연히 살아계시는데도 주님을 보지 못한 잘못입니다. 욕심과 절망에 눈이 멀어 우리 형제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공동체에서 이탈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동행하시며 그들의 말을 경청도 하시고, 공감도 해주시며 가르쳐주십니다. 그랬더니 떠난 형제들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입니다. 감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떠나려는 형제자매에게 할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 이것을 먼저 해준 뒤에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며 설득해야 합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설득, 이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런데 다가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가가야 그다음 것들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가가려는 마음 곧 사랑과 경우에 따라 용기도 있어야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떠나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거나 보고 안타까운 마음은커녕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떠나려는 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떠날 테면 떠나라는 그런 마음이면 결코, 다가가지 않겠지요.
또 사랑의 마음이 있어도 다가감을 그가 거부할까 봐 못 다가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 사랑에는 용기도 있어야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갔으니 그다음은 무식하게 바로 설득하여 성급히 돌려세우려 들지 말고 천천히 그의 길을 같이 걸어주며 그의 말을 듣는 것부터 하고 동감해주는 것에 진심이어야 하고 설득은 나중입니다.
하이라이트는 그러나 빵을 같이 나눔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빵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멋진 식당이나 술집에 데려가서 음식이나 술을 같이 마실 수도 있고,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같이 먹고 마시면 더 감동적이어서 그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의 말씀의 전례와 빵을 나누는 성찬례가 이런 것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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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함께 개안開眼의 여정, 우정友情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어제는 신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날이었고 오전, 오후 명일동 성당 독서단 18명을 대상으로 “렉시오 디비나” 주제로 피정을 지도한 날이었습니다. 피정온 사랑스런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흡사 하느님의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개안의 은총으로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강의 시작전 드린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참 탁월한 선택을 하셨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참 아름다운 날에 참 아름다운 수도원에 참 아름다운 분,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나러 오신 여러분들은 참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의무이자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참으로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닮아가면서 참내가 되어갈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한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그날까지 새롭게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강의와 강론과 배려 덕분에 넘 행복하고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미사에서 정점을 찍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원님들이 다 너무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건강하시고 행복한 수도생활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떠나면서 보내준 단원 대표 자매의 글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어제 피정 지도했던 주제, 렉시오 디비나, 참 풍부한 내용이었습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 목표는 내 삶의 성경책 렉시오디비나에 있습니다. 내 고유의 삶의 여정을 통해 눈이 열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아 갈 때 참으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후 의기소침해 있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아연 활기를 찾는 분위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 성경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와 빵 나눔의 성체성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엠마오 도상이 제자들은 눈이 가려져 함께 하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빵을 떼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 보는 장면과 이어지는 이들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 가르침이 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라지셨다.’-
그대로 미사중 성찬전례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님의 몸인 성체를 모실 때 순간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 본 참으로 강렬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사라진 주님은 어디로 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과 하나됨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어 계신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할 것입니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한결같은 수행이 얼마나 주님과의 만남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엠마오 도상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새삼 주님의 은총속에 이뤄지는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믿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엠마오 도상 제자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미사전례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반부가 말씀전례라면 후반부는 성찬전례입니다.
매일의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에 미사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피정지도시 강조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매일미사책대로 날마다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면 좋겠습니다.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주의 깊게 렉시오 디비나 하고 매일 미사에 참석하면 좋을 것입니다. 미사에 이보다 더 좋은 준비도 없고 혹시 미사 못하더라도 매일의 영적 양식으로 삼아 매일 미사책대로 렉시오 디비나하면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개안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말씀과 전례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가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편의 다윗의 체험을 통해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베드로입니다. 바로 그 시편은 화답송에 그대로 나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시편의 주님의 고백을 자기 고백으로 삼았을 것이며 자주 되새겼을 다음 내용입니다. 그대로 내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은 내용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의 고백이 되었고, 베드로의 고백이 되었고 우리의 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우리 순례여정의 삶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제 절친이라 고백하곤 합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35년 동안 정주하면서 날마다 미사에 강론을 통해 우정을 다져온 주님이니 아마 세상에 이런 친구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빠짐없이 매일 쓰는 강론은 사랑하는 주님께 올리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계속될 우정의 여정, 개안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했던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설교에 이어 제2독서 베드로 전서에서 그의 생생한 주님 체험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그네 살이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것으로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중 하느님을 가리키는 방향의 이정표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개안의 여정,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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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24,25)
<엠마오로 여행을 떠나자!>
오늘 복음(루카24,13-3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예수님께서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섭니다.
'침통한 표정!'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의 죽음에 갇혀 있어 실망하여 예전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눌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자신들 앞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0-31)
이 말씀 앞에서 무엇이 떠오릅니까? 매일 거행되는 '성체성사(미사)', 그것도 '성찬 전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도 엠마오로 여행을 떠납시다! '엠마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엠마오는 내가 다시 부활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그러니 '가장 좋고 뜻깊고 멋진 엠마오 여행'은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겸손한 모습으로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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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sfHcw9H9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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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 29)
믿음도
때론
기대와
실망으로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간절한 기도의
따뜻한 시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끄러운 우리
믿음입니다.
실의와 절망으로
떠나는 이들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무너진 마음
낙담의 마음에
다시 용기를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말씀 밖의
일들이
말씀이 되어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만남과 떠남이
교차하는
거기에서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기도도 마음도
주인을 찾고
만나야
생기와 활기를
얻습니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정녕 예수님의
참된 부활로
가능합니다.
아낌없는
초대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운
나눔입니다.
부활의 주인인 줄
알고 살았던
지난 시간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빵을 쪼개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르던 시간이
감사와 사랑의
시간이 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갑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부활의 기쁨이
되듯 기쁜 주일
되십시오.
가까이 오시고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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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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