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거름 /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셰계사, 1994 / 복간, 문학동네. 2022)
* 진이정 시인(본명 박수남) 1959년 강원도 춘천 출생, 경희대 영어교육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 등단 유고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첫시집 출간을 앞두고 1993년 11월 19일 35세 폐결핵으로 요절(서른 넷)
****************************************************************************
한 해가 벌써 절반 넘게 지났다는 사실보다도, 21세기가 4분의 1쯤 지났다는 사실에 더 놀라게 되는 요즘이다. 대개 우리는 22세기를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잠시 거리에 멈춰, 다음 세기에도 또 다음 세기에도 같은 얼굴일 자연을 멍하게 바라보면 시간의 불가역성에 한숨짓는다. 한참 전에 지나온, 어린 날로 역행하고픈 마음일 때가 있다. 아주 천천히, 문득 그날의 어린 나를 만나고 싶어진다. 어른이 되면 유년 시절 놓고 왔던 것과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 저녁이 있다.
- 김유태 (시인⋅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
******************************************************************************
아직 여섯 살이 되지 않아서, 나는 큰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밥을 안치고 청소기를 돌리고 책상에 앉아 달력을 보았다. 아직 나는 마흔 살. 대출금 상환일과 가족의 생일이 동그랗게 묶여 있는 시간을 짚어 보다 창문을 열었다. 잉어 떼처럼 우글거리는 오후의 볕 너머로 조금씩 서른 살이 지나가고 스무 살이 지나가는 것을 오래 지켜보았다. 열두 살 적보다 더 열두 살 같은 마흔네 살의 열두 살이 지나가는 것을….
정말 우리는 되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같은 물속에 더 무거운 추를 들고 뛰어들 듯이. 매일매일 더 무거운 인생이 뛰어드는 몸을 이끌고 하나의 순간을 다르게 살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까닭 없이 멍한, 쓸쓸하고 서럽고 적막하고 슬픈, 모든 이유가 그래서일 거라고…그래서 우리는 여섯 살 적보다 더 여섯 살 같은 시간을 날마다 살아 내는 거라고…오늘도 마흔네 살의 저녁은 도착하는지도 모른다.
- 신용목 (시인)
*************************************************************************************
1993년에 타계한 진이정 시인은 나에게는 문우였고 시에 대해서라면 긴 시간을 마다하지 않고 다방에 앉아서 토론을 하곤 했던 벗이었다. 진이정이 죽었을 때 나는 어학과정을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밟고 있었다. 남의 나라 언어를 배우며 어학시험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때 그가 병원에 실려갔고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절시인이라는 한자 조합어를 떠올리면 우리 세대는 빛나는 시인 기형도가 있고 나, 개인적으로는 진이정이라는 벗이 있다.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 < 거꾸런 선 꿈을 위하여 > 라는 시집에 해설을 썼던 황현산 선생님은 진이정은 마치 그의 죽음을 알았다는 듯 마지막 시편들을 썼다고 말했다. 한없는 지적인 호기심, 세상에 대한 따뜻함과 그 따뜻함을 배반하는 세상에 대해 열렬하고도, 깊은, 시를 쓴 자, 진이정.
그의 제사는 어느 절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해 나는 서울에서 그의 제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제삿날, 등성이에 머물고 있었던 해는 정확히, 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던 시인의 눈에 머물던 해거름의 지는 해. 우리는 언제나 어린애이고, 영혼은 이렇게 어떤 시간을 살아가도 낯설게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 허수경 (시인)
**************************************************************************************************
지금 다시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해준다면 영롱한 이슬이 잎사귀에 맺힌 싱그러운 아침,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커피시간이라든가, 뫼르소에게 살인을 충동질했던 그 이글거리는 태양의 한낮 또는 오렌지 빛으로 하늘이 물드는 해거름, KBS1FM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그널음악을 들을 때... 식으로 꾸며 답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솔직히 지금도 하루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정색하고 감동할 핑계거리 없이 데면데면하게 하루씩 소각하며 살아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이라고 노래했듯 매 순간을 열심히 진하게 살아야했는데 그러지 못한 탓이리라. 구상 시인도 ‘신비의 샘인 하루’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을 뜨면서부터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의 매 시간이 신비하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고 나와 시간은 늘 무관하게 겉돌기만 했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의 경구를 가슴에 담아두지 못했으며, 매 순간에 감사하지도 않았다. 시간은 신의 다른 얼굴이란 말이 있다. 인간이 체험 하는 시간은 신비 그 자체다. ‘멍한, 저녁 무렵’ 무념의 시간, 시인은 가로 늦게야 극점을 찍은 후 탈탈 털어낸 해탈의 욕망을 드러낸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은’ 순수의 맨 얼굴로 ‘어눌한 해거름’을 멍히 바라본다. 미확인 고통인 죽음을 앞둔 탓이었을까. 무구한 그 시선에는 우울, 상실감, 초연, 환각 따위도 느껴진다.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시로 감싸 안는 예술행위라니 이 무슨 ‘헤르메스’인가. 시간의 신은 우리에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찌 살아야 온당한지 낯설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매번 던지고 있다. - 권순진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