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본문 : 시 51편
- 제목 : 심판을 넘어 고난을 감당하기까지 성장하길.
◆ 기도
아버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의 시편은 참회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바른 참회의 마음을 배우게 하옵소서.
◆ 본문살핌
오늘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일으킨 이후, 선지자 나단을 통해 하나님이 죄를 드러내셨을 때 다윗이 드린 기도라 되어있다. 이 기도문의 특징은(비록 노래형식으로 전해졌지만)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이 한 절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주의 말씀은 의롭고, 주의 심판은 참되십니다'(51:4) 말한다. 자기 죄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자신은 본시 죄성이 있는 인간일 뿐임도 고백한다(51: 3,5). 그런 그가 염려하는 한 가지는 죄의 결과로 인한 징계적 상황이 아니라 자기 죄로 인하여 주님 앞에서 멀어지는 것과 주의 성령이 거두어지는 것이다(51:11). 둘 다 같은 말이다. 주의 영이 함께 계시지 않음은 곧 주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은 '용서해 주신다면 다른 범죄자들(자신처럼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은 이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51:13). 그는 하나님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통회하는 심령이지 물질적 보상이나 헌금 따위가 아니라고 말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이 멸시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고 있다(51:16-17). 마지막 두 구절은 의미심장한데, 예루살렘성을 다시 쌓아 주소서라는 대목은 하나님의 성읍이 훼파되어 무너졌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을 다시 하나님께서 쌓아주실 때,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 그들의 수소를 제단에서 받으실 것이다(51:18-19).
◆ 묵상
심판이 임하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이 징계가 나에게 합당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새롭게 세워주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이 벌인 참극이다. 간통으로만 끝나도 큰일인데 살인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기 소유로 삼았다. 불교적으로 보자면 이럴 때 과보가 찾아온다.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보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편 무신론적으로 보자면 그런 일 아니라 더한 일을 하고도 무탈하게 살다가 편히 눈감을 수도 있다. 많은 악을 저지르고도 천수를 누리고 고작 노환으로 찔끔 고생하다가 죽는 이들을 보라.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악을 운명론의 바퀴에 돌리시지도 않고, 능력껏 살아가게 방관하시지도 않는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자신의 뜻과 결심을 전달하고 하나님 보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징계 하신다. 그리고 용서하신다. 즉 용서하시기 위해 징계하신다. 자녀를 향한, 아들을 향한 징계와 같다. 신약의 기자가 "징계가 없다면 너희는 다 사생자이지 참 자식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 것이 공감된다. 남의 자식 야단치는 사람은 선생님 밖엔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이라야 훈육을 한다.
더 깊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는 징계를 피할 수 없는데, 이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온전히 행할 자가 없는 채로 인생을 살고 신앙을 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사람마다 연약한 부분이 다양하므로 사건의 종류와 크기, 시기가 다를테지만 누구나 그 징계의 시간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은 예정된 사실이란 것이다.
죄는 신앙인이건 아니건 누구나 짓지만, 신자의 죄를 다루시는 방식은 하나님의 개입이다. 다윗의 범죄에 하나님이 심판자로 적극 개입하심으로, 오히려 회생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나님은 허물고 다시 쌓으시는 기회로 삼으셨다. 그저 운명에 내어 주셨다면, 자기 능력과 악한 업력에 따라 어떠한 결과가 올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아들을 징계하심으로, 악한 자들의 세력에서 오히려 보호하신 것이 된다. 그들의 원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주 멸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어떻게 보아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심판은 그 자체로 은혜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 내 아버지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요, 아주 멸망에 빠지지 못하게 막아주심이요, 다시 일으켜 새로운 지으심을 계획하심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은 종교적 색채가 없는 세속적 범죄였다. 다윗의 허물 중에는 이스라엘은 백성의 수를 집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독특한 명을 어겼다든지, 언약궤를 잘못 모셨다거나 하는 등 하나님과 그 제의에 직접 개입된 것들도 있었다. 밧세바 사건은 그런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치정에 얽힌 추악한 범죄. 인간사에서 동서고금 막론하고 늘 일어났었던 그런 범죄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소유인 이상, 게다가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의 왕으로써 대표자 역할마저 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개입은 당연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우리도 왕이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의 신분을 '왕된 제사장'이라 묘사했다.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도 하다. 왕된 제사장. 그것이 신자의 신분일진대 그의 일상의 범죄가 하나님의 개입 아래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징계가 없을 때 오히려 두려워 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징계를 받으려고 죄 지을 필요는 없다. 사도바울이었던가? 공연히 죄를 짓고 징계를 받는 것을 피하고,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값진 삼을 살으라고 가르친 것이. 사도 베드로도 이전의 죄를 이젠 그치라고 명한다. 이전에 지은 것들로는 죄가 부족하더냐고 반문하면서.
마침내 징계를 그치고 건짐을 받은 이들은 이전의 죄로 돌아가지 말고, 새롭게 지어지는 내면의 성소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징계가 아닌 영적 싸움으로 인한 고난의 영역,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는 소망의 전쟁터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심판도 은혜, 고난도 은혜, 모든 것이 은혜로구나.
◆ 기도
아버지, 용서하신 은혜, 다시 세우시는 은혜.. 징계도 사랑임을 믿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어떤 것도 참되고 의롭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제 인생에 펼치소서. 다만 이제는 짐짓 지은 죄로 인한 징계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맛보아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위로의 자녀로 새로이 지어지길 원하나이다. 용서해 주신다면 다른 범죄자들(자신처럼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은 이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겠다던 다윗의 고백이 제 심령에서 저의 고백으로 용기있게 울리기를 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