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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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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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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구원을 간구하셨다
예슈아께서 육체로 계실 때 즉 육체로 계시지 않았을 때가 있다는 뜻이다. 원래는 하나님으로서 영이시지만 육을 입고 인간으로 오셨다. 인간이 되신 예슈아께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토라이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여호와께 통곡하며 간구한 것이다. 예슈아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왜 구원을 통곡하며 간구해야 하는가이다.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죽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 왜 예슈아께서는 눈물과 통곡과 간구로 구원을 소망하셨는가? 사실 예슈아께서 통곡하며 구하신 것은 이 어마어마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고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기꺼이 감내하고 통과하는 것이 구원일까?
구원이란 무엇일까? 구원은 히브리어로 '야샤'이다. '구조하다, 해방하다, 구출하다, 완전하다, 자유롭게 하다, 돕다' 등의 뜻이다. 이 단어는 구원이신 예슈아의 어근이다. 사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지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장성하여 사망하게 하기 때문이다(약1:15).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함을 이해하는가? 바로 이 때문에 예슈아께서는 심한 통곡과 많은 눈물로 구원을 간구한 것이다. 바로 앞에 놓은 환란과 고난을 죄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있도록 거룩한 능력을 구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자, 거룩함을 위해 목숨을 걸 만큼 구원을 사모하는 자가 얻을 수 있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즉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우리의 머리이신 예슈아께서 보이신 장성한 믿음까지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볼 자가 없는 것이다(히12:14). 즉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죄와 싸워 이긴 것을 의미한다. 죄와 싸워 사망을 이긴 자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예슈아께 성령을 보내주신 것처럼 당신의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함께 싸워주시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2 경건함으로 여호와께 구원을 얻었다
예슈아께서 죽기 전에 자신을 구원하실 여호와께 엄청난 울음과 부르짓음으로 기도했고 응답을 받아 부활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우리는 여러가지 기도 제목이 있다.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 또는 회개를 통해 거룩함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린 어떻게 응답받은 것을 알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도제목이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엄청난 눈물이 필요한가? 심한 통곡이 필요한가? 모든 죄를 보여주시는 현상을 겪어야 하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그러한 기적들을 통해 잊고 있던 죄악을 기억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실 것이다. 이는 굉장한 은혜이다. 하지만 이 말씀에서 기도 응답을 위한 어떤 현상, 표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경건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유일하게 '경건함'이다. 기도 응답을 위해 필요한 것도 유일하게 '경건함'이다. 물론 기도 제목이 자신의 욕망을 위한 기도라면 당연히 경건함을 위해 응답될리 만무하다.
그러면 '경건함'의 의미를 살펴보자. '경건함'은 헬라어로 '율라베이아'이고 '경외하다, 염려하다'의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야레'로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 겁이나다' 등의 뜻이다. 즉 예슈아께서 기도 응답을 받으신 것은 격렬한 간구와 기도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앞서 안식의 언약이 있어도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했다(히4:1).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의 달콤함뒤에 있을 영원한 심판이다. 또한 여호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거룩함 때문이다. 죄를 심판하시는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시22:23). 이처럼 예슈아께서도 두려움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죄와 시험을 이길 수 있었고 그분의 기도는 들으신 바 된 것이다(시85: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85:9)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시22:23)
3. 경외하는 자가 죄를 이긴다
경외하다는 히브리어로 '야레'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레는 유사한 뜻인지 알아보자. 야레(ירא)와 이레(יראה)는 히브리어로 아주 유사하다. 단 한단어 헤이(ה)가 끝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히브리어로 어떤 단어를 명사로 바꾸어줄 때 흔히 끝에 헤이를 붙여서 만든다. 끝에 헤이를 붙여 만드는 명사를 여성명사라고 부른다. 물론 이 단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주 밀접한 의미를 가진 단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레'의 뜻은 '보다, 나타나다, 증명되다, 확실히, 고려하다, 경험하다, 주시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면 명령을 주신 여호와께 바로 순종으로 시내산으로 올라갔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을 주신 분이 또한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막지 않으셨다면 그는 정말 아들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받으신 것으로 하고 미리 준비하신 양을 주셔서 대신 번제로 드리게 하셨다. 즉 경외함으로 구원을 얻은 것을(시험을 능히 통과한 것을) 경험하였고 증명되었고 그 구원을 기쁘게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도 야레의 마음 즉 경외하는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여호와의 이름인 것이다. 우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때가 있다. 우리가 정말 잘 해서 보상을 받을 때 즉 순종의 복을 받을 때 그분을 볼 수 있고 반대로 우리가 불순종하여 고난당함으로 토라를 배울 때 그분의 엄중함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어떠한 삶인들 얼마나 은혜이고 사랑인가? 우린 징벌을 통해서도 법으로 교훈을 받아 하나님을 알아가면 된다. 그분을 경외하게 되면 장차 올 환란(악한 일, 재난, 해로운 일)을 피하게 될 것이다(시94:12,13). 반면 죄를 짓는 자는 교만하고 오만하고 자만하기 때문에 즉 경외함이 없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시94:4).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고난은 지금은 고통스러우나 영원히 승리하게 하므로 유익이 아니겠는가!(시119:71)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시94:4,12-1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4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신다
우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는가?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다고 심판하신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한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모두 준행했느냐 아니냐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함대로 심판하신다. 물론 작은 죄를 지으나 큰 죄를 지으나 똑같이 죄인이다. 그러나 심판의 경중은 크게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모두 지킬 수 있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마치 100점을 맞을 수 없다면 공부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일 뿐이다. 또한 영원한 생명은 스스로 영생을 가지신 분만이 주실 수 있다. 즉 스스로 계셔서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신 여호와'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구원'인 것이다. 구원의 언약을 맏아들을 시작으로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우리를 예슈아 안에서 부르신 것이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85:9)
5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
예슈아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이고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해지기 위해 순종해야 했다. 즉 구원에 이르기 위해 여호와께 복종해야 가능했다. 이를 위해 고난을 주셨고 예슈아께서는 이를 통해 순종을 배우실 수 있었다. 예슈아께서도 순종을 배우기 위해 고난이 필요했다면 우린 얼마나 더 고난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고난을 피하려는 생각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지 알아야 한다. 고난은 우리로 정결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고난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피하려고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아버지로부터 온 생각이 아니다. 만약 우리 삶에 고난이 있어서 토라의 길을 벗어나려 하고 토라가 없는 삶이 평안해서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스스로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고난을 환영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 이유는 고난을 통해 법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죄가 얼마나 두려운지 배우라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절대적인 순종을 배우고 겸손해 지라는 것이다. 아직도 순종할 수 없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마카비서'를 읽어보라. 특히 3서와 4서를 읽어보라. 거기에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과연 죄를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써있다. 이미 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질문에 답한 내용이 3서와 4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걷는다면 그것이 예슈아의 길이고 구원의 길인 것이다. 예슈아께서 이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즉 구원을 얻는 방법을 삶으로 직접 보이셨다. 그러므로 고난을 피하려하지 말고 어금니를 물고 진리라는 칼을 들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비웃으며 싸워야 한다. 하마스 대원들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 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누구 그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자기의 목숨도 미워하는 진정한 용사들이 되기를 축복한다(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6-28)
6 예슈아께서 구원의 저자가 되셨다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실 수 있는 유업이다. 기억하는가? 분명 예슈아께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함으로 즉 순종함으로 얻기 때문에 구원이 여호와로 부터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하고 구원은 예슈아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한 예슈아(구원)의 삶을 본받는 자들이 받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예슈아를 부활시키신 것도 여호와시다. 그분께서 순종한 우리들도 부활시키실 것이다. 그 말은 예슈아를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예슈아로 살아간 우리들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1)
그러면 왜 예슈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즉 우리를 불순종에서 건져내신다는 뜻이다(마1:21). 그 이유는 예슈아께서 어떻게 거룩함으로 고난을 통과하셨는지 어떻게 피흘리기까지 끝까지 싸우셨는지 그래서 어떻게 아버지를 경외하고 겸손하게 되는 것을 배우고 온전하게 되셨는지를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분을 보고 그분이 진 십자가를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도 지고 그분의 길을 걷는다면 우린 반드시 그분과 같이 온전해지고 구원을 얻을 것이고 부활채를 입을 것이다. 바로 예슈아께서 첫 부활의 열매가 되셔서 구원의 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뒤를 따라 부활의 열매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슈아의 삶은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 우리가 죄를 져도 그분이 죽고 부활하셔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죽고 부활하셨으므로 우린 더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순종의 종으로 그분처럼 죽기까지 죄와 싸워 이김으로 함께 거룩함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것이 예슈아의 죽으심을 영화롭게 하지 않겠는가? 만약 예슈아께서 죽으셨음에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는 그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자이고 모독하는 자이다(히10: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10:29)
7 누구의 종이냐 누가 주인이냐
우리 인생은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누구의 종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죄의 종이냐 순종의 종이냐, 우리의 머리가 순종의 메시아이냐 불순종의 메시아이냐의 문제이다. 순종의 메시아라면 우리 머리는 예슈아실 것이다. 반면 불순종의 메시아라면 우리 머리는 뱀일 것이다. 물론 우리의 부르심은 자유자이다. 진정한 자유는 무법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지키기위해 나라에서 법을 없애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정한 자유는 준법정신에서 오기 때문이다. 물론 의로운 법이 세워지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감사한 것은 사람의 법은 불의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법은 온전히 공의롭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의로운 법을 함께 지킬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법한 곳은 귀신에게 자유를 주어 죄의 종을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법도를 가득채우고 가정과 공동체와 나라에 여호와의 토라(율법)가 가득하게 하여 순종의 종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롬6:16). 그것이 예슈아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이다. 즉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땅에 율법을 가득하게 하기 위함이다. '완전하게'의 헬라어 원래 뜻은 '가득차게 하다, 꽉 채우다'이다(마5:17).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6)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8 공의를 모르면 젖먹이 신앙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말씀을 배운지 오래 되어서 이젠 선생이 되어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잘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성도가 있었을까? 아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럼 하나님께서 잘 못키우신 걸까? 아니다. 스스로 마음을 옥토밭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들이 아직도 젖먹이 신앙인 이유는 의의 말씀 곧 말씀의 공의로움에 대해 능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공의를 모른다는 것이고 공의를 모르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삶에서 이용해야 하는지 공의롭게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지에 대해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skilful을 사용하고 있다. 우린 칼이 얼마나 유익한지 잘 알고 있다. 만약 칼을 사용하는데 능숙하지 않다면 어떨까? 요리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심지어 다치기도 할 것이다. 반대로 칼에 굉장히 능숙하다면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칼을 진리라고 말한다. 진리는 능숙하지 않으면 다칠 뿐이다. 그러나 진리를 능숙하게 다루면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칼을 사용하는데 능숙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연습밖에 없다. 여러 방법으로 오랜 시간 숙련되기 위해 연습해야 한다. 공의의 말씀에 숙련되는 것도 똑같다.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으라'고 번역했지만 그 뜻은 이성을 이용하여 분별하는 연습을 통해 감각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공의를 알지 못하고 숙련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젖먹이 신앙이다. 그리고 젖먹이 신앙으로는 유업을 얻지 못한다(갈4:1). 다시 말해 공의로운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린 듣기에 둔한 자가 아니라 예민하게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진정으로 듣는 자가 공의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는 경건을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다(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7,8)
9 진리를 믿으면 심판을 면한다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제사장 제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슈아께서 어떻게 멜기 세덱의 반차로 오셔서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으며 하늘 대제사장으로서 이루신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즉 예슈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 그분의 직분과 역할등을 하늘 성전과 땅의 성전, 멜기세덱 반차와 아론의 반차를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의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신앙으로서는 이 가르침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신앙은 아직 육(땅)에 속한 자이므로 영에 속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한탄한 것처럼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히브리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많은 사람이 히브리서를 가르치나 하늘의 것으로 땅의 것을 설명하거나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설명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서를 읽고 제사장 제도나 성전, 율법을 폐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히브리서를 읽고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또는 성전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아직 육에 속한 어린 신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율법은 폐할 수 있는(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본질이 사랑임을 안다면 사랑을 폐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마23:23) 공의는 결코 폐할 수 없다.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미성숙한 신앙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분별을 위하여 복음의 초보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시 유대인들도 복음의 초보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책망을 들었다면, 육신이 이방인인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그러면 복음의 초보가 무엇인가? 물론 복음의 기초는 옳고 그름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무엇이 선한 행동이고 무엇이 악한 행동인가? 그래서 바울은 초등 교사가 율법이라고 증언하고 있다(갈3:24). 즉 하나님의 판단의 법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초보이고 시작이다. 우린 다시 시작하기에 전혀 늦지 않았다. 우리가 공의를 믿고 진리를 믿는다면 아버지와 메시아를 만나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다(살후2:12).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3:24)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후2:9-12)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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