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환회장님의 카톡에서]
구름은 고향이 없다
“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은
애초에 정해진 바탕이 없다.”
누구도 바다의 고향을 묻지 않는다.
바다의 고향은 강이었고
개천이었고 계곡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황지우 시인은 말했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돌아보면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 길’이 보이지만,
앞을 보고 걸을 때 ‘가야했던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처 없는 길이었다.
인생에 정해진 길이란 없다.
오직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비록 경로를 이탈한 변방의 아웃사이더에 불과 할지라도 무의미한 인생이란 없다.
모든 꽃이 반드시 봄에 피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도 피고 가을에도 피며 심지어는 겨울이 돼서야 피는 꽃도 있다.
사과나무와 떡갈나무가 자라는 속도가 다르듯 저마다 인생의 봄은 이렇게 서로 다른 법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자.
어차피 세월은 흘러갔고 구름은 소멸할 뿐이다.
바다에게 고향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새는 날면서 뒤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나그네는 갈 길이 남아 있을 때 행복한 법이다.
가지 않은 길이란 갈 수 없었던 길이 아니라 가기가 두려워 회피한 길이다.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후회는 쉬운 길을 선택했던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가지 못한 길을 뒤돌아보는 자보다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자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그것이 길을 ‘아는 자’와 ‘걷는 자’의 차이이다.
누구나 인생을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살고 싶지만,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삶이 훨씬 더 아름답다.
어쩌면 행복이란 목적지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가는 여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그 여정의 한 길목에 서 있다.
루쉰이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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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B-CBr9JJ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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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복 한 사 람 ]
요즈음은 이따금씩
세상을 힘겹게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본다.
새벽 1시반에
지하철역을 청소하는 60대쯤의 여성이 보인다.
플랫폼 벽 아래
의자 주위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빗자루로 쓸어내어 쓰레받기에 담는다.
수세식 변기를
세제로 닦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낸다.
저런 여성들의 수고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악취 없고 깨끗한 지하철역이 되는구나를 알았다.
노조가 파업할 동안
파리의 지하철역에 진동하는 지린내를 맡아본 적이 있다.
낙서가 가득하고 더러운
뉴욕의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
화면 속의 그녀는
밤일이 끝난 후
혼자 사는 단칸 지하방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다.
잠시 후
그녀가 다른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화점의 종이 쇼핑백들이
방바닥에 가득 쌓여있다.
그녀는 종이 쇼핑백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끼우고 있다.
한 장 끼우는데 10원,
몇시간을 일하면 8000원을 번다고 했다.
그외에도
그녀는
공공근로나 일거리만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녀가 방에 앉아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제 번 돈으로 오늘을 살고 생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그걸 보면서
가슴이 찡하고
내가 편하게 사는 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변호사를 40년 하다 보니까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보았다.
소아마비로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한 여자 판사가 있었다.
명문 여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에 일찍 합격하고 판사가 되었다.
그녀가 있는 판사실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다음 번 세상에는
청소부가 되더라도
매춘부가 되더라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 말의 진정성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천만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애창하는 찬송시를 지은 여성 시인을 여러번 만났다.
심한 뇌성마비로
그녀의 몸은 작동기능을 거의 잃었다.
물체같이 굳어버린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가락과 높은 아이큐의 두뇌뿐인 것 같다.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이따금씩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가서
목욕시켜주는 봉사를 하는 여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욕을 시켜 주고 돌아갈 때
혼자 몸을 닦을 수 있는 것만도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의 그녀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카톡을 통해 내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변호사님
한번 입을 테이프로 막고
손발을 꽁꽁 묵고
사람들 사이에 쳐 박혀 있어보세요.
그게 60년 넘은 일생을 지내온 제 상태랍니다.’
나는
그 머리 좋은 찬송 시인이
다리를 절더라도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다면,
혼자 목욕을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분명 행복해 할 것 같았다.
나는
가난하고 험한 삶의 밑바닥에서
맑은 샘물같은 행복을 퍼 올린 사람을 보기도 했다.
노동자 출신 시인인
그는 폐암 말기였다.
달동네 꼭대기
어두컴컴한 임대아파트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세상의 고난은
모두 그를 찾아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난과 고독,
병과 늙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의 마지막 파도에
그는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같은 죽어가는 환자가
하루종일 누워있을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게
감사해요.
이웃의 중학교에서
급식에 남은 누룽지를 가져다줘요.
성당에서
나물 반찬을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줘요.
목욕 봉사를 하는 분이 더러 와서
몸을 씻겨줍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투명한 이슬이 맺힌 호박꽃이 보입니다.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표현하나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시인은 내가 만난 후
죽을 때까지 몇 달 동안도
매트리스 아래
공책과 연필을 놓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그는
내가 그의 마지막 시집을 내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환한 달빛 띠가 펼쳐진 번들거리는 밤바다를 보았다.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떠있었다.
멀리서
색색으로 반짝이는 보석같은 부둣가의 불빛들이 검은 바다 위에서 물결쳤다.
걸으면서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에서
작은 성취와
기쁨을
발견해 내야 하는 건 아닐까?
( 엄 상 익 / 변 호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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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글도있네u😇😊😉🫠
[늙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까?]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역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젊은
사람들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노파를 봤다.
불쌍한 표정을 짓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서 젊은 날의 어떤 모습들이 느껴졌다.
얼굴에 그 과거가 그림으로 잠재해 있기 때문인가?
며칠 후 다시 그 자리를 지나가다가 허공을 가르는 그 노파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저 년이 나보고 젊어서 뭐했길래 이렇게 사느냐고 그래요. 야 이년아, 너도 나 같이 되라.”
노파의 저주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그 노파는 왜 늙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구걸을 하고 있을까.
젊어서 노후의 준비를 못하고 인생의 절벽 밑바닥에 떨어진 노인들이 많다.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인기 있던 가수가 내게 노숙자 합숙소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그 시설을 후원하는 걸 알고 부탁한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됐을까?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때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원로가수 현인씨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었다.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이 앵콜을 요구하면서 나가지 않는 바람에 같은 곡을 아홉번이나 부른 적도 있어요.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를 쳤었죠.
그렇지만 인기라는 건 허망한 거죠.
세월이 가니까 잊혀졌어요.
미국으로 갔어요. 식당을 했지만 실패하고 아내와도 헤어졌어요.
그리고 노인이 됐어요. 아무것도 남은게 없어요.”
늙고 가난한 것만이 불행의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의과대학장을 한 저명한 칠십대 노의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돈과 명예가 있다고 노후가 행복한가요? 그런 거 다 소용없어요.
하루라도 따뜻하게 살고 싶어요.
저는 가난한 의대생이었어요.
부자 집 딸과 결혼했죠. 처가에서 작은 의원을 차려줬어요.
매일 번 돈을 아내에게 바쳤죠. 아내도 의사였죠. 저에게 밥 한번 따뜻하게 해 준 적이 없어요.
제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와도 역할이 식모였어요.
어느 혹독하게 춥던 겨울날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찬물로 며느리의 빨래를 하는 걸 봤어요.
가난이 죄였죠.
아내는 제가 번 돈으로 땅과 건물을 샀는데 칠십년대 부동산 경기를 타고 엄청나게 값이 올랐죠.
난 돈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려고 곁눈질을 하지 않고 살아왔죠.
나는 노력해서 대학병원장이 됐어요.”
그는 모든 걸 다 가진 셈이었다.
칠십대 노인이 된 그가 어느 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출을 했다.
병원장자리도 그만두고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게 그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느 날 단골로 다니던 한식당에서였어요. 수더분해 보이는 주인여자가 생선의 뼈를 발라주고 국이 식을까봐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울컥해졌어요.
그리고 따뜻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산 건 산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건 삶이라고 할 수 없죠.
그래서 집을 나와 작은 방을 하나 얻었죠.
저녁이면 내 방으로 돌아와 빨래판에 팬티와 런닝셔츠를 놓고 빨래 비누를 개서 문댔어요.
노년에 비로서 평안을 찾은 것 같아요.”
그를 보면서 노년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았다.
아직 젊을 때 늦기 전에 노년의 삶을 미리 그려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고 설계를 해보는 것이다. 노년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삶은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 주위 사람과 사회까지도 피곤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내남없이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젊음이 어느 순간 증발해 버리고 거울 속에서 자신의 늙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보는 게 삶의 현실이다.
나는 나이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시로 음미해 왔다.
그건 비관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의 과거가 쌓여 현재가 됐고 현재가 축적되어 미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주변 선배들에게 육십오세 이후 죽을 때까지 얼마의 돈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를 수시로 물어보았다.
나의 기준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친구나 이웃에게 정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다음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취미가 겹쳐진 일이었다.
나는 그걸 글쓰기와 독서로 삼았다.
낮도 아름답지만 밤도 고요하고 안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곱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엄 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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