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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정마 현지소식 스크랩 8월 17일 카자흐 뉴스
zhanna 추천 0 조회 82 10.08.17 17: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극장에서 실크로드 연극제 열려


 

14일, 연극제 '실크로드'가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김로만 고려인 협회장, 김 게르만 카자흐 국립대 교수 등 고려인 동포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가 성황리에 열렸다.
 한편, 개막 공연으로 한국의 극단 '물결'이 막심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선 보이며, 밑바 인생들의 삶에 루까가 전파하는 희망은 어떤 의미이며, 삶의 진실은 무엇이며,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했다.




카자흐 교도소 폭동으로 최소 1명 숨지고 80명 다쳐




12일 카자흐 RFE/RL 통신이 밝힌 바로는, 북카자흐스탄 지역의 한 교소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최소 1명이 숨지고 80명이 다쳤다.
정 부는 11일 특수 부대를 아크몰라 그란니트니 교도소에 파견했다. 자낫 케슈바예프 카자흐 교소도 시스템 제어 위원회(KUIS) 위원장은 81명의 수감자가 폭동 기간 동안 자신의 복부를 그어 자해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사건으로 71명이 병원에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으며, 4명은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케슈바예프는 3명의 특수부대원이 수감자들과의 충돌로 부상을 입었으며, 그들은 진압과정에서 어떠한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5명의 수감자는 감옥의 질서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세 릭 카이룰린 아크몰라 검사는 11일 한 수감자가 숨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 수감자이며 카자흐의 유명한 인권운동가인 발딤 쿠람신은 RFE/RL 통신에 같은 날 세 명의 수감자가 이 사고로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숨진 자 중의 한 사람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죽었고, 두 명은 자해로 죽었다고 밝혔다.
사건이 발생한 그란니트니 교소도의 상황은 9일 6명이 자해를 시작해 병원으로 이송된 이후 긴장 상태가 지속된 것이었다.
10일, 괄룸잔 카센노프 KUIS의 대변인은 RFE/RL 통신에 자해를 했던 6명은 다른 수감자들과 싸움 후에 그러한 짓을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카자흐 교도소 자해 사건은 지난 몇 주 전 교도소 관계자들의 고문과 구타에 항의하여 일어난 적이 있다.


코스타나이 지역에 러시아 연기 번져




13일, 카자흐 인터팍스 통신이 밝힌 바로는, 러시아에서 화재로 발생한 연기가 카자흐스탄 코스타나이 지역까지 번졌다.
“카자흐-러시아 경계인 첼얀빈스크와 쿠르간 지역의 산과 들에 발생한 화재로 연가가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인명피해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다스탄 조마바예프 지역긴급상황부장은 말했다.
그가 말한 바로는, 이러한 상황은 이상 고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됐다. 지역 당국은 이 연기는 금주 내에 걷힐 것으로 예상했다. 



나자르바예프, “스포츠, 카자흐 이미지 개선의 영역”




사진: ‘네오 이르비’라고 불리는 제7회 동계아시안게임 마스코트 인형과 함께한 아이들

14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 대통령은 다가오는 15일 체육의 날을 맞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친 애하는 동포 여러분! 카자흐스탄 체육의 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다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우리의 기본 재산으로 건강을 중요시했다. 이에 카자흐 정부는 국민의 영적, 육체적 건강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고 있다. 나는 건강한 나라가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국가의 정책으로 스포츠를 대중화하는 것으로 삼고 있으며, 1월 국정연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체육 문화와 스포츠에 국민의 30%를 참여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스포츠는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다. 우리나라는 많은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카자흐 국기는 자랑스럽게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며 펄럭였다. 동계아시안게임은 내년 우리나라에서 개최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스포츠가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행복한 날을 위해! 나는 여러분의 건강과 복지를 기원하고, 카자흐 스포츠맨의 번성과 성공을 기원한다”라고 대통령은 전했다.


나자르바예프, “끄즐아가쉬 수재지역 80억 텡게 들여 재건”




나자르바예프 카자흐 대통령은 지난 3월 홍수로 피해를 당해 7월까지 3개월간의 복구를 마친 끄즐아가쉬를 방문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홍수로 가족을 잃은 주민을 위로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며 그 동안 비극을 당한 주민을 위하여 정부는 최대의 노력을 다했다고 전했다.
“마을은 3개월 만에 전부 복원되었다. 80억 텡게 이상을 지원했다. 누르오탄 당원들과 많은 기업과 시민이 후원에 동참하였다. 이것으로 국민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대통령은 말했다.


끄즐아가쉬 희생자 기념비 세워




13일,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공식업무로 알마티 주를 방문하여 끄즐아가쉬 희생자 기념식에 참석했다.
기념비는 홍수 피해를 당하였던 지역에 세워졌고,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7미터, 폭은 14미터이다. 제작자는 카자흐 건축연합회 회원인 카비 바울루코프이다.



나자르바예프, ‘자스타르’ 스포츠 센터 방문




13일, 알마티 공식방문의 일정에 있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딸띄코르간에 있는 ‘자스타르’ 스포츠 센터를 방문했다.
30 억 달러를 들여 공사를 마친 스포츠 센터는 정부 지도층을 맞이했다. 이 스포츠 센터의 관중석은 1,500석이며, 체력 보강, 미니 축구장, 농구 코트, 댄스 홀, 레슬링 경기장 등이 들어서 있다. 또한 방송 센터가 3층에 있으며, 운동선수를 위한 안락한 호텔과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으며, VIP실, 수영장, 두 개의 식당, 주차장 등도 있다. 


故 빅토르 최 사망 20주기


지난 8월 15일은 유명한 러시아의 록 가수이며, 전설적인 록 그룹 키노(КИНО)의 리더인 빅토르 최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
15일, 러시아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에서는 빅토르 최 사망 20주기를 기리고 그가 남겨놓은 주옥 같은 곡들을 들려주며 그를 회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빅 토르 최는 1962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소련 정부에게는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관영 매체로는 전혀 소개될 수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최는 18세 때 다니고 있던 세로프 예술 학교에서 성적 부진을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퇴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록 음악에 계속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래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록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소록 쉐스트)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외곽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컨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의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는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컨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라트비아 리가 외곽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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