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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 9개국 탐방
날짜:2011년 9월 7일 수요일~18일 일요일 11박 12일
여행국: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 보스니아 국경선 통과
여권 검색을 하지 않는다. 국경선 사무국 직원들이 제복을 입고 밖에 나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일부가 보스니아 소유로 되어 있다. 크로아티아 사이에 약간 들어온 보스니아 영토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소유의 바다를 팔라고 해도 보스니아에서 팔지 않는다. 버스는 쉽게 국경선을 넘어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왔다. 여기는 보스니아 영토다.
* 보스니아 휴게소
크로아티아에서 국경선을 넘어 보스니아로 왔는데 여전히 아드리아 해변 길이 이어지고 비경을 선사한다. 휴게소도 아드리아해가 보이는 바로 곁에 있다. 보스니아의 아드리아 해협 석양이 아름답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더러는 지하의 수퍼마켓에 들르고, 우리 부부는 보스니아 마을과 거리, 가게 풍경까지 둘러보았다. 아드리아 바다를 향해 형성된 마을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붉은 지붕의 집들이 곱다. 명소만 보는 것이 여행은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하여서 세계여행 중에는 지나는 곳마다 깊은 관심으로 살펴보곤 한다. 돌 하나에도, 풀 한포기에도, 집모양, 거리 풍경 등 모두가 소중한 여행의 자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경선까지는 40분 소요된다. 이번은 진짜 국경선을 넘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가는 국경선은 1.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간이 국경선, 2.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 3.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진짜 국경선, 이렇게 국경선을 넘는다. 지금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가고 있다. 국경선에 대한 이색 체험이다.
*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국경선 통과
이곳 국경선 사무국에서도 여권 검색을 하지 않는다. 쉽게 국경선을 통과했다. 여기는 크로아티아 땅이다.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이고 광활하게 전개되는 들녘 기름진 농토 사이로 물길이 보인다. 농사짓는 마을이 있다. 무화과와 석류농장이 있다. 아드리아해의 일몰이 비경이다. 해변마을 풍경 또한 비경이다. 석회암산 높은 산정의 길을 돌고 돌며 간다. 다시 들녘이 보일 때는 푸른 농장의 무화과와 석류나무들이 한가득 풍요로운 발칸의 풍경이다. 산에서 들녘으로, 다시 산길로, 다시 들길로 아름다운 여정이다.
* 크로아티아 국경마을
크로아티아의 국경마을을 지난다.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에 묘하게 파고든 보스니아의 작은 영토가 있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넘나들고 있다. 보스니아였다가, 다시 크로아티아였다가, 조금 혼란스럽지만 이 두 나라의 국경지대를 살펴보는 여행이 흥미롭다. 마을 사이로 네레트바강이 넓게 흐르고 있다. 높은 산과 함께 평화로운 정경이다.
*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국경선 통과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넘어온 국경선에 양국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이 드는 국경선 사무국이다. 버스가 터미널에 정차하듯 우리 일행을 태운 발칸 버스가 국경선 사무국 앞에 주차하고 있다. 한국은 2007년부터 발칸여행이 시작되었다. 국경선 사무국 직원이 여권 검색하러 올라왔다가 ‘코리안?’하고 묻더니 여권을 거두지 않고 그냥 통과시킨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연방국가다. 보스니아 수도는 사라예보, 헤르체고비나 수도는 모스타르다. 오늘 유숙할 우리의 숙소 근처가 모스타르다. 내일 사라예보로 이동하여 관광한다. 보스니아의 일몰이 아름답다. 산불 난 장면이 보인다. 여기는 보스니아 땅이다.
* 보스니아 호텔 도착
우리 오늘 호텔은 네레트바 강변이다. 오후 7시경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의 발칸 버스 기사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우리 일행의 가방을 모두 챙겨서 내려주는 모습이 정겹다. 불가리아 사람으로 버스 운전기사 경력 10년이란다. 불가리아에서는 그의 5살 어린 아들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번이 마지막 운행이라 한다. 우리를 태워다 주는 마지막 독일 뮌헨에서, 다시 그의 집이 있는 불가리아 소피아까지만 운전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 운전기사를 그만 둔다는 것이다. 소피아에서 친구와 사업을 한단다. 그 이유가 아들이 아빠를 매일 보고 싶다고 해서, 아빠와 매일 함께 살길 원해서라는 말에 가슴에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발칸을 비롯한 유럽 여행의 버스 기사는 한번 나오면 오래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텔 주변은 나무로 울창하다. 나무 사이로 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우리 부부의 방은 308호다. 짐을 풀고 나와 호텔 1층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날씨가 많이 덥다. 저녁인데도 32도다. 낮에는 40도까지 오른단다. 내일은 6시 모닝콜, 6시 50분 조식, 7시 30분 출발이다. 모기가 있을지 모르니 방문을 닫고 자라고 한다. 주변이 아름다워서 산책도 하라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책하기로 하고 편안한 잠을 잤다.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보스니아
* 보스니아 호텔 출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네레트바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했다. 어제 본 산불이 오늘 아침에도 보인다. 오늘도 높은 산자락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새벽 여명이 강물을 곱게 적신다. 호텔의 뒤편인데 정원에 큰 나무가 많다. 호텔 식당은 네레트바강이 보이는 곳에 있다. 호텔 앞쪽 우리의 버스를 주차한 곳에 정교회 성당이 보인다. 보스니아 모글리에 아담한 도시의 호텔을 출발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가는 길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로 간다. 네레트바 강줄기를 따라서 간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의 메주고리예는 성모발현지로 조사 중이다. 성지 순례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호텔에서 나와 시가지를 벗어나자 들녘은 여전히 발칸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옥수수 재배지가 나온다. 네레트바 강변에는 비닐하우스도 있다. 산불 연기가 높은 산 위로 까맣게 오른다. 강변의 나무들이 울창하다. 강변 마을은 대부분 포도밭 농가다. 줄지어 들어선 포도나무들이 장관이다. 사라예보까지 네레트바강 협곡 따라서 간다. 발칸의 석회암 고산과 강 풍경이 비경이다. 산불 흔적이 보인다. 발칸의 산에서 종종 일어나는 산불이다. 사라예보까지 2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1시간 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다. 한국시간과 시차는 -8시간이다. 도로는 잘 발달되어 있어서 버스가 잘 달린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시를 지나고 있다. 인구 10만 명으로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도시다. 모스타르는 사라예보를 관광한 후에 다시 들를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발사한 총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집 담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대로 있는 곳도 있고 또는 부수어진 곳도 있다. 발칸의 잔인한 아픔이다. 이곳은 이슬람교 집단 거주지 지역이다. 석회암 우람한 산 아래 마을에 아주 큰 공동묘지가 있다. 산정 십자가가 오롯하다. 주유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한국의 삼성SAMSUNG 광고 안내간판이 건물 위에 있다. 발칸, 이 먼 곳에서 내 조국의 기업광고를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다. 길가에 세워둔 허름한 자동차가 2대 있다. 앞 번호판이 없는 차로 보아 버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먼지도 많이 쌓였다. 모두 보스니아의 내전 아픔으로 다가온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변에 전면이 탄흔 자국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자꾸 보인다. 허물어진 건물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하여 그러기도 하고, 전쟁에 대한 교육용 전시로 일부러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예쁜 교회가 있어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도 한다. 마을의 공동묘지가 아주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 마을의 희생자들 무덤으로 소슬하다.
* 보스니아 네레트바 협곡
석회암 산이 계속 이어지고 산정에는 자작한 나무들만 바위틈에 있다. 산 아래로 강줄기가 보인다. 네레트바강이다. 지금 보이는 곳은 네레트바 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600~2300m의 고산들이 줄지어 장관이다. 에메랄드빛 물빛이 비경이다. 터널이 많다. 석회암산 고산이 계속 이어지며 비경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산자락 아래 네레트바 강에 민물 양식장도 있다. 나무와 물빛이 동일하게 푸른빛이다. 산악기차가 맞은편 길로 지나간다. 산에서 산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점점 강폭 좁아진다. 댐을 건설 중이다. 댐이 있다. 비스듬히 줄을 긋는 주름진 산이다. 저 산들의 형상으로 보아 한때는 이곳이 육지였다는 것이다. 보스니아 아름다운 산악 협곡 길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정이다. 푸르게, 푸르게 저장되어 결코 낡아지지 않을 풍경들이다.
* 보스니아 협곡 휴게소
네레트바 길고 긴 강과 협곡은 많은 것을 선사한다. 산과 강은 지친 여정의 객들에게 비경을 선사하고, 짙푸른 품자락에 휴게소를 세워 때 묻지 않은 발칸 천연의 영토를 밟아보는 체험까지 허락하였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산중에 양고기를 굽는 집이 있다. 이곳의 특식이라 하여 더러는 사 먹는 사람도 있다. 아래로는 협곡이 절벽을 이루고 강변에는 고운 마을이 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산과 강과 울창한 나무들이 잘 어우러진 절경이다.
* 보스니아의 긴 네레트바강
크로아티아에서 넘어와 보스니아 국경마을에서부터 만난 네레트바Neretva강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보스니아 남부를 흐르는 전체길이 약 218㎞의 긴 강이다. 헤르체고비나의 디나르 알프스산에서 발원하여 아드리아해로 흘러 들어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르티잔 부대가 이 강을 건너 독일군의 작전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강의 야블라니차 근처의 댐에는 큰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강 상류는 계곡과 협곡을 이루고 하류는 평야지대로 면화와 포도주 등이 생산된다. 여전히 따라오는 물빛은 에메랄드빛 비경이다. 신의 손길로 풀어놓은 천상의 절대적인 물빛이다. 뒹굴고 싶은 욕망을 분출시키는 물 위 옥빛 융단이다. 이곳은 산이 아주 우람하고 짙푸르다. 깊은 뚝심의 강과 함께 절창을 이룬다. 길고 긴 강은 마을에서 동그랗게 아물어지고 있다. 협곡이 끝나고 마을이 나온다. 강변에는 아담한 집들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정원에는 발칸 특산의 석류나무가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산마을 도로변에 약국이 있는데 간판이 보스니아 언어로 되어 있다. 여기는 발칸의 보스니아, 이제 곧 그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도착
양쪽에 산이 있는 온화한 도시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감상하며 온 발칸의 시다. 산등성이 붉은 집들이 곱다. 사라예보에는 한인 교포가 6명만 거주한다. 오늘 우리의 가이드는 그 한인 6명 중 부인이 나온다. 남편은 선교사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의 성지다. 보스니아 인구는 450만 명이다. 그 중 사라예보에 40만 명이 거주한다. 사라예보 시내에 전차가 많이 왕래 한다. 공중에 전선이 많이 있고 도로에 철선이 있다. 도로 중앙의 가로수 지역이 넓고 도로는 편도 2차선이다. 시내 진입 교통이 체증으로 복잡하다. 건너편에 호텔 사라예보HOTEL SARAJEVO라는 영문 표기 상호의 호텔이 보인다. 바로 그 앞 도로를 따라 놀이공원으로 소풍 가는 초등생들의 행렬이 지나간다.
점점 도심 가까이로 들어가자 차량이 많아지고 차량 번호판이 여러 가지다. BH는 보스니아, SL은 슬로베니아 차량이다. EU가입국 표식으로는 파란 바탕에 별 그림이 있다. BH만 있는 것은 나중에 EU가입하면 별을 그리려고 한 것이다. 경찰이 교통지도를 한다. 잔인한 파괴 현장이 보이기도 한다. 사라예보 시가지 한편에는 고층 APT가 오롯하여 평화롭다. 도심의 밀라츠카강 강폭이 좁다. 유럽지역의 강수량이 줄어들고 있다. 세련된 블루 빌딩이 아름다운 조형이다. 노란색 홀리데이인 호텔이 유일하게 폭격 받지 않은 건물이다. 기자단 유숙으로 그렇게 보호해 줬던 것이다. 합의하에 폭격하지 않았다. 청색 빌딩은 국회건물이다. 밀라츠카강에 비가 안 와서 물이 더럽다. 고기는 많다.
한인 여자 가이드 남편은 NGO란다. 한인이 없어서 남편이 영사관 활동도 한단다. 오늘도 남편이 나와야 하는데 바쁜 일정으로 그의 부인이 대신 나온 것이다. 발칸에서는 한국인을 만나기 어럽다. 정착하여 사는 사람도 거의 없고, 여행객도 아직까지는 거의 없다. 정말로 발칸 여행 중에 한국인을 만난 것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식당 한군데에서 몇 명을 만난 것이 전부다. 교포 여인은 아주 친절하고 성실하게 보스니아에 대하여 설명해준다. 그의 가족은 3남 1녀의 자녀와 함께 모두 6식구란다.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이며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 시가지를 2시간 도보로 여행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구시청사
보스니아 내전 때 폭격 맞은 구시청사 건물로 보수 중이다. 밀라츠카강 다리를 건너와서 보았다. 1894년 건축되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통지 중에는 사라예보 시청사였다. 1949년부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국립도서관이었다. 1992년 8월 25일 내전으로 건물의 90%가 파괴되었다. 이때 도서관의 책 200만권을 잃었다. 이런 아픔을 딛고 그대로 모양을 복원해서 국립도서관으로 건립하고 있다. 처음에 시작한 건축가가 정신이상 되었다. 그만큼 건물 복원에 어려움이 있던 것이다. 또 다른 건축가가 이어서 일하고 있다. 건축가가 바뀌면서 원래의 모양과 약간의 변형미기 생겼다. 지금 미완의 모습인데도 아주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인데 다 복원되면 대단한 건물이 될 것 같다. 저 쪽에서 파괴되었던 그 당시의 집을 밀라츠카강 건너 구시청사 맞은편에 복원해 놓은 것도 있다. INAT KUCA라는 글씨가 하얀 벽면에 붙어 있고 앞에는 나무 창살의 예쁜 집에 꽃을 매달았다. 평화를 읊조리는 듯한 울림의 집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라틴 다리
라틴 다리는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비극의 역사현장이다. 황제다리라고도 부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이 발생했던 역사적인 다리다. 왕자가 오픈카로 이 다리를 달릴 때 세르비아 비밀 결사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살해가 되었고, 이 때문에 1차 대전이 시작된 곳이다. 사라예보는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지만, 당시에는 1908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주의 중심도시였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가브리엘로 포린칩이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50세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43세의 그의 부인 소피아를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 부분에서 암살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된 것이다.
이 암살사건은 남 슬라브 민족의 통일을 부르짖고, 황태자를 그 장애물로 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비밀결사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폐결핵으로 사형선고 받은 자들을 모은 검은 조직에게 손을 써서 수류탄을 차에 던지도록 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수행원들은 기차에서 내려 차를 탄 후 두 명의 결사대원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거사를 실행할 수 없었다. 군중들 속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수류탄을 던진다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처음에는 수류탄이 왕자가 탄 차의 측면에서 터져 페르디난트는 몸을 피해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와 함께 타고 있던 수행원 몇 명만 부상당했다. 페르디난트 왕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시청의 영접 행사를 치르고 몇몇 수행원의 사상자 병원에 가려고 멈출 때 다시 총살당하여 죽었다. 첫 발은 황태자의 부인 소피아 대공비의 복부에 명중하여 당시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두번째 총탄은 황태자의 심장 근처에 명중했고 그는 쓰러진 자신의 부인을 향해 소피아, 이 말 한마디를 하고는 결혼 14주년 기념일에 쓰러져 즉사했다. 차가 라틴 다리 근처를 지나는 순간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건물 안에서 거리로 나와 자동권총을 꺼내 두 발을 발사했던 것이다. 19살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이며 결핵환자였던 가브리엘로 포린칩이란 청년이 쏜 총이다. 라틴 다리 부근 한 건물 벽면에 그 운명의 장소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사건 장면과 범행자 사진과 함께 대리석에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암살 사건에 세르비아 정부가 관련되었다고 하여 즉각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유럽의 모든 강대국들이 참전하게 되었다. 바로 1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1914 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며 바로 다음날부터 베오그라드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하자 이에 맞서 독일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이를 따랐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 다음날 영국도 이 시끄러운 싸움에 끼어들었다. 다른 나라들도 속속 참전을 선언했으며 1917 년에는 미국까지 개입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기타 오토만 제국 국가들이 한편이었고,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몬테네그로, 리베리아, 산마리노, 사이암, 중국, 일본, 미국, 쿠바, 파나마, 과테말라, 브라질, 니카라구아,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하이티 등의 국가들이 한 편이었다. 1차 대전은 현대 역사상 두 번째로 값비싼 대가를 치룬 대규모 유혈 참극이다. 적어도 1천만 명 이상이 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비록 암살 사건이 없었더라도 전쟁이 발발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방문 일자를 6월 28일이 아닌 다른 날짜로 잡았더라면 오늘날의 역사가 상당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후문이 있다.
라틴 다리가 놓인 밀라츠카 강변 무슬림 마을에는 15세기 황제모스크가 있다. 안에는 터키식목욕탕도 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눈 감은 양 처연하게 서 있다. 밀라츠카강에는 13개의 다리가 있는데 라틴 다리도 그 중 하나다. 슬픔 가득 배인 라틴 다리을 건너서 갔다. 다리 아래 강물도 강변의 건물들 그림자만 보듬고는 말없이 흐르고 있다. 역사적 비극은 언제나 큰 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묵언으로 말해주고 있다. 나라마다 서로 상처 주지 말고 평화공존을 유지하는 세계가 되길 염원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시가지
라틴 다리를 건너 시내 안쪽으로 들어가니 유럽풍의 육중한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주상복합건물로 외형이 아름답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도로의 폭이 좁아서 도보로 관광을 하고 있다. 전쟁 전의 사라예보는 모스크와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터키식 바자르가 있는 도시였다. 도시의 강가는 1914년 페르디난트 왕자가 삶을 마치던 그날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후 사라예보가 다시 1984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00년 동안 사라예보는 이슬람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과 유대인과 또 다른 이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했지만, 관용의 전통은 세르비아인의 대포에 의해서 파편 속에 부서졌다. 최근의 전쟁 동안 1만명의 사람이 죽었고, 5천명이 부상당했다. 3년의 잔인한 공격에도 사라예보는 다시 안정 상태다. 트램이 움직이고 많은 카페와 호텔들이 다시 문을 열고, 여행객들이 조금씩 도시를 채우기 시작했다. 최초의 방문객들은 인류의 종말과도 같은 전쟁의 그 엄청난 폐해를 보여주는 장소를 최초로 보고자 하는 전쟁그룹들이었다. 사라예보는 다시 찬란한 대도시로 태어나고 있다. 언제 슬픈 내전이 있었느냐는 듯이 평온한 시가지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무역상인들 상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도심에 16세기 무역상인들 여관자리가 폐허로 무너져 있다. 곁에는 현대의 건축물이 도시를 빛내고 있는데, 이곳은 벽돌이 허물어진 형상을 그대로 두어 흉물스럽다. 상인들이 상가는 복원했다. 18세기에는 8만명의 인구로 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화려했던 시절의 표상처럼 오롯이 남겨진 흔적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정교회
이 정교회는 터키 술탄과 러시아의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 당시 터키와는 배척 관계였다. 1868년에 화합의 상징으로 지었다. 교회 안에서는 서서예배 본다. 이곳은 양력 1월 7일이 크리스마스다. 그 이후부터 새해맞이를 한다. 크림색 고운 건물이 아득하게 높다. 교회 앞에는 한국의 종묘공원격의 공원이 있다.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다. 조각상 조형물도 있다. 시민들이 곳곳에 많이 모여 휴식을 취한다. 노벨 문학상 받은 시인의 동상이 흉상으로 세워져 있다. 가까운 곳에 노찬카페도 있다. 정교회 주변은 참으로 다양한 것들로 채워진 아름다운 공간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로마 카톨릭 대성당
사라예보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 카톨릭 대성당은 사라예보 기독교의 상징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네오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의 건축 요소를 사용하였다. 1884년부터 1889년까지 지었다.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다. 두브로브니크의 주교가 그 시작을 선포하였다. 가톨릭이 국교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보스니아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양쪽으로 하늘 높이 솟아있는 2개의 탑과 아치형의 입구에 조각 장식이 성스럽고 예술적이다. 내부에 들어가니 정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 보스니아 내전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다. 사라예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성당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가즈하스레브베이 모스크
가즈하스레브베이 모스크에서 가즈하스레브베이는 인명이다. 청빈하고 기부를 많이 하여 사랑받은 사람이다. 발칸의 10대 모스크 중 하나다. 사라예보 구시가지 길목에 있는 이 사원은 이슬람교도들의 안식처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건축물로 1521에서 1541년까지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즈하스레브베이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 돔 지붕이 웅장하다. 안에는 발을 씻는 곳, 샘, 초등학교, 기도실 등이 있다. 예배와 기도를 위해 많은 무슬림들이 찾고 있는 신앙의 중심지다. 입구의 아치형 문과 이슬람교의 문양이 아름답다. 건물도 크고 우람한데 큰 나무가 있어 더욱 숙연한 분위기의 사원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구시가지
사라예보 구시가지는 16세기의 구역으로 붉은 도로다.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19세기의 구역은 신도로다. 이곳 16세기의 구역 구시가지 거리에는 무슬림 전통상가가 도로 양쪽으로 줄 지어 늘어서 있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바슈카지르아 광장까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만든 구시가지 거리가 전개된다. 이슬람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전통 가옥이 한국의 전통 가옥 지붕과 유사하다. 동양적인 향수가 배어 있다. 이슬람 생활과 문화의 중심인 모스크가 있고, 직인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 레스토랑, 카페들이 즐비하다. 상가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다. 그래도 이곳은 발칸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물건 값이 싼 편이다. 좋은 물건을 잘 고르면 아주 저렴한 값으로 살 수 있다. 나도 두 아들의 선물로 가죽 벨트 2개를 샀다. 상가 골목은 길고, 진열된 물건들이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고풍스런 구시가지 거리는 사라예보의 고운 낭만에 젖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무슬림 전통상가
무슬림의 전통상가였던 곳에 가 보았다. 그들이 물건을 두었던 곳, 사무실, 숙소 등이 있다. 복도가 상당히 넓다. 복도 게시판의 게시물 속에 1992년 3월 1일 보스니아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티토왕 사진이 있다. 그의 아들이 무슬림왕이었다. 사라예보 구시가지에서 이런 저런 역사 유적을 보며 많이 걸었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바슈카르지아 광장
바슈카르지아는 중앙 시장이라는 뜻으로 오스만 투르크 색채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터키인들의 거리다. 바닥이 자갈로 덮혀 있다. 모스크와 각종 상점,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사라예보 관광의 중심지다. 세빌리는 1891년 만들어진 약수 샘으로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중앙에 위치하며, 예전에 나오던 암반수인데 지금도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 세빌리는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40분까지 모이기로 하고 다시 자유 시간을 갖었다. 사라예보 엽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구시가의 상징 광장이다. 광장 중앙 큰 나무 아래 비둘기가 한가득 모여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이슬람 모스크mosque 사원과 재래시장이 있다. 유럽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사라예보의 한 영역이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갈길은 터키의 향수를 전시하고 있다. 바로 광장 앞의 도로에는 전차와 차들이 분주하게 왕래한다. 과거와 현대가 접목된 고운 풍경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케밥 중식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한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케밥 중식을 했다. 케밥은 터키 여행 중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다. 오늘 이곳에서는 음식도 좋지만 커피잔 참으로 곱다. 쟁반에 이슬람 양식의 문양이 새겨진 커피잔 세트와 함께 커피를 가져온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정취가 배어 있다. 이것으로 사라예보에서의 여정이 마무리 된다. 아쉬움으로 바슈카르지아 광장을 돌아보며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기억 속에 담았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출발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떠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로 간다. 바슈카르지아 광장에서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도로에 박힌 전차의 두 줄 철선이 낯선 풍경이다. 시내 외곽의 강과 다리가 아름답다. 버스를 타고 꺼지지 않는 불 전몰자 위령 장소 곁을 지났다. 보스니아의 최근에 세운 큰 백화점 앞도 지났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이곳은 초등과정은 9학년, 고등과정은 3년 학제다. 1학년~5학년까지는 한 선생님이 같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3년은 중등과정이다. 보스니아 내전의 중심지였던 사라예보는 1984년 1984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1992년~1995년에 걸쳐 계속된 참혹한 내전으로 다시 세계에 알려졌다. 유럽 문화 속에 이슬람 문화가 깊이 숨 쉬는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사라예보 거리의 동쪽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구시가지가 있고, 서쪽으로는 합스부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신시가지가 있다. 좀 더 서쪽으로 가면 공산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거리 풍경이 있다. 내전의 상처로 아직도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조금씩 상처를 지워나가며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나라다. 말로만 들어오던 사라예보에 와서 실제로 목격하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간다.
* 보스니아 내전에 대하여
보스니아는 30% 이상이 무슬림이다. 그외 카톨릭, 정교회 이 3가지 종교가 공존한다. 무슬림 여자는 타종교와 결혼 금지다. 무슬림 남자는 한가정내에서는 타종교 여자와 결혼이 가능하다.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계는 반대했다. 크로아티아와 무슬림이 한 팀이 되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1993년부터 싸움을 시작했다.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두 나라가 보스니아를 나누어 영토를 분할하려고 했다. 모스타르를 크로아티아가 차지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모스타르의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1995년 1국 2체제 즉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된 것이다. 대통령도 3년 체제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 3월 회교도가 중심을 이룬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보스니아 내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에 돌입하였다. 내전 초기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장악하였다. 이에 UN은 신유고 연방에 대한 제제 조치를 통해 신유고 연방으로부터의 휴전은 이끌어냈지만,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1992년 8월 UN국제연합이 군사개입을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는 등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12월 회교 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의 1국가 2체제로 연방을 구성한다는 데이턴 평화협상을 기초로 보스니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가는 다리 모스타르 다리가 1993년 이 다리를 놓고 양편에서 폭격한 곳이다. 여기서 모스타르까지 버스로 1시간 소요된다. 우리는 모스타르를 여행을 마친 후 크로아티아로 간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가는 길
네레트바 협곡에서 잠시 정차하여 아름다운 비경을 감상했다. 푸른 물과 석회암 주름진 산, 무화과나무, 강다리, 산길도로가 기막힌 풍경을 선사한다. 한때는 육지였을 주름진 산의 흔적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저 평화로운 협곡 끝에 있는 모스타르에서 강의 서쪽과 동쪽에서 팽팽한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무슬림, 카톨릭 모두 매장문화다. 봉분이 없는 무덤을 쓴다. 흰색 팻말은 무슬림 공동묘지, 회색 십자가는 카톨릭 공동묘지다. 양옆에 무슬림과 카톨릭 묘지가 나란히 있다. 두 종교가 그렇게 싸우고도 죽어서는 사이좋게 이웃으로 붙어 있다. 종교로 인한 잔인한 발칸 내전들이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사망한 자들의 수많은 봉분이 애처롭다. 오늘 기온이 40로 매우 덥다. 도로 공사로 잠시 모든 차들이 산길에 정차 중이다. 웃통 벗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나와 도로를 활보한다. 그러다가 앞차가 움직이자 쏜살같이 달려 자기의 차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계속 강과 협곡의 산길을 따라 모스타르로 가고 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석회암산
모스타르에 들어서자 석회암산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슬픈 땅인데 산은 왜 저리도 까칠할까. 육중한 석회암산 아래 붉은 지붕의 마을이 곱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Hercegovina의 역사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하나로 북부 보스니아 지방과 남부 헤르체고비나 지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로마와 투르크의 지배에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가 1992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곳 시민들은 과거 보스니아 내전문제, 종교문제, 민족문제 등에 아직도 아주 예민하다. 아픈 역사를 지닌 영토에 온 것이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시가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시가지는 처연하다. 그래도 복구하여 도로와 건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 편이다. 가끔씩 총탄 흔적이 고인 건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평온하다. 도심에 공동묘지도 있다. 폐허에서 일어서기가 쉽진 않아서 시내의 분위기는 숙연한 느낌이다. 헐벗은 집시여인이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구걸한다. 깨끗한 상가를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빛이 보이는 길이다. 속히 회복하여 잘 사는 나라가 되길 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구시가지
신시가지가 끝나고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국에서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대표하는 이슬람 풍의 중세도시다. 바닥이 돌로 이루어졌고 길가에는 상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온통 이슬람 문화가 배인 물건들이다. 어쩜 여기가 터키가 아닌가 싶을 만큼 터키식 물품들이다. 화사한 색상의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도 물가는 사라예보처럼 싼 편이다. 모스타르 다리 주변에 형성된 이 구시가지 상가는 모스타르 다리를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또 많은 사람들이 기념물건을 산다. 나도 남편의 모자와 손자의 목각 피리를 샀다. 오밀조밀 좁은 골목, 모스타르 구시가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여정이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다리
이 도시는 모스타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보스니아 내전 중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에 엄청난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모스타르 다리는 터키식 돌다리다. 모스타르 다리 ‘STARI most’를 경계로 서쪽에는 크로아티아계가, 동쪽에는 무슬림계가 대치하여 총격전을 벌렸다. 크로아티아가 강동쪽의 무슬림을 공격하여 수백명이 사망했다. 1993년 크로아티아군의 공습으로 의해 완전 파괴되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두 대통령이 1991년 만나 통합회의를 했는데 무슬림이 반대하여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에메랄드 빛의 네레트바 강 위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아치형의 보행자 전용 모스타르 다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원래보다 4m 낮은 27.5m로 복원했다. 이태리와 터키 건축가가 2004년 유네스코와 세계 각국의 지원으로 재건했다. 복구 과정은 강바닥에 떨어진 큰 돌들을 건저 내어 원래 그 다리 모습으로 재현하였던 것이다. 이런 다리가 20개인데 12개만 복원하고 8개는 완전 소멸되었다. 스타리 모스트는 사라예보보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를 이어주는 평화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리에 적힌 ‘Don't forget 93’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모스타르 다리는 모스타르의 상징이자 보스니아 내 민족간 화해의 징표다. 보스니아 내전의 아픔을 간직한 채, 발칸 평화의 상징 다리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아름다운 다리 하나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돌다리는 비스듬한 계단식이다. 아치형 아름다운 다리 바로 아래는 네레트바 강이 옥빛으로 처연히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아픈 공간을 걸어 지나며 다리가 주는 교훈을 새긴다. 주변에는 구시가지 거리가 있고 상가가 많다. 우리 일행도 관광을 마치고 이곳에서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갖었다. 모스타르 다리와 구시가지 관광 후 스플릿으로 이동한다. 모스타르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릿으로 가는데 국경 통과까지 4시간 소요된다. 밤 9시경 호텔에 도착할 예정이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심의 무화과나무
모스타르 다리를 건너자 좁은 골목길이 이어지고 네레트바 강변 언덕진 길에 무화과나무가 많다. 아주 크고 열매도 달렸다. 발칸 여행 중 노변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자연 무화과나무를 많이도 보았는데,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이 무화과나무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내 유년시절 우리 집 뒤 화단에 있던 아주 커다랗단 그 무화과나무를 연상케 한다. 그때, 속알이 빨갛게 익으면 따 먹던 기억, 가끔은 혀가 따갑던 기억, 초등학교 때 하교 후 뒤뜰로 달려가 따 먹던 기억, 지금은 세월에 무너져 사라진 그 무화과나무가 눈앞에 선 듯한 착각으로 나는 행복하여서 만져보고 살펴보고 참 행복한 순간이다. 이곳 보스니아 전쟁으로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어찌 견뎠을까. 아주 담담하게 서 있는 무화과나무가 대견스럽다.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변에도, 멋진 돌집 카페에도, 곳곳에 평화를 머금고 처연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총탄자국 건물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심에 총탄자국 건물들이 많다. 고층 아파트의 외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낮은 건물에도 총탄자국이 많다. 어떤 건물은 허물어진 채 살점을 드러내놓고 있다. 바라보는 시선조차 가슴이 섬뜩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종교와 민족갈등의 교차로다. 이곳은 동서양의 분쟁이 시작된 이래로 기독교와 무슬림, 그리스 정교로 인한 가장 큰 분쟁의 중심이 되었던 지역이다. 잠시 동안이지만 다문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92년 독립을 위한 투표가 있은 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연방군과 세르비아 군을 통하여 이런 사회를 무너뜨렸다. 이슬람계 슬라브 민족과 그리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안 인들은 서로 분리되도록 하였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나라의 모든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경제는 추락했으며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생겼다. 저 흉측스런 총탄자국의 건물들을 왜 보수하지 않을까 의아심이 들지만, 이곳 경제의 어려움과 또 전쟁이 없는 평화상징의 강한 외침으로 바라보면 해답이 나온다. 아직 상처들이 치유되진 않았지만 사라예보, 모스타르를 중심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저 아픈 모습을 공유하며 지구상에서 그 어떤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아간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출발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대표하는 이슬람풍의 중세도시 모스타르, 내전으로 아픈 도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모스타르를 출발한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도로변에 곱게 핀 유두화가 아름다운 이별을 고한다. 산은 왜 이리도 건조한 석회암산인가. 같이 슬퍼하면 아픔이 덜어진다고 커다란 덩이로 서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흔의 건물들을, 총탄자국의 건물들을 보듬고 있는 걸까. 붉은 기와지붕의 주택들 발칸의 고운 빛으로 다가오고, 자동차들 거리를 채우고, 잘 가꾸어 놓은 거리의 나무들 평화롭다. 빨리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다음 여정은 크로아티아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릿 가는 길
여기서 50분만 가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이다. 무슬림이사는 부자 동네를 지나고 있다. 산정에 성채가 있다. 그 바로 아래 산자락에는 크고 하얀 십자가가 있다. 모스크 첨탑이 솟구쳐 오른다. 회백색 주택들이 산줄기를 채우고 있다. 탄탄한 풍경이다. 들녘에는 비닐하우스도 있고, 그 안에는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주변은 풀밭인데 잘 가꾸어 놓은 농토 한자락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