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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대마도 11 - 가네다성터를 내려와 다이렉스 미쓰시마를 구경하고 이즈하라에 가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히타카쓰 (比田勝) 에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에서 차를 빌려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 올라 아소만을 조망하고는 이어 만제키세토 (万関瀬戸) 운하를 구경합니다.
만제키바시 (万関橋, 만관교) 로 운하를 건너 남섬으로 달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20여분간 산을 올라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가네다성터 에 올라 수백년후 세종 1년때 이종무 조선군의 대마도 정벌시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 이 쓰시마군을 추격하다가 매복으로 수백명이 죽은 일을 회상하고는 내려옵니다.
그러고는 다시 렌터카에 올라 남쪽으로 조금 달리니 면세점인 다이렉스 미쓰시마 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 쇼핑을 하는데 면세할 상품과 그렇지 않고 여기서 먹을 상품은 따로 구분해서 계산 을 합니다.
쓰시마 그 자체 관광 보다는 면세쇼핑 을 위해 당일치기로 오는 한국인들도 많은데.... 3만원 당일치기
티켓 으로 몇십만원어치 면세쇼핑하고 오는 경우도 허다하니, 쓰시마섬 갔다 오는 티켓 자체가
해외여행 치고는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굉장히 이익으로 물론 이 사람들이 쓰시마섬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오는 건 아니고, 면세점이 주이지만 겸사겸사 구경도 하고 온다는 식이랍니다.
다만 싼맛에 당일치기를 즐길 수 있는 건 부울경권, 잘해봐야 대구권 까지만 한정된 얘기니 타 지역일 경우
부산항 까지 이동하는 교통비, 숙박비 등이 소요되며 유류할증료까지 합하면 저가항공 왕복권을
구매해서 일본의 타 지역을 다녀올 돈이 되므로 타지역 사람들에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 돼버립니다.
그러고는 다시 렌터카에 올라서 한 5분쯤 달리니 드디어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
하는데.... 바로 '쓰시마시의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 (嚴原 엄원)" 입니다.
시내로 들어가 5분쯤 달려서는 항구 가까이 식당거리 인근 운하 옆에 있는 우리가 예약한 호텔에 도착
하니 이름은 "지온(祈園)" 이니.... 교토에서 마이코 를 볼수 있는 오래된 옛 동네 이름이 생각납니다.
여기는 한국인이 주인 으로 건물은 1층은 카페이고 3층은 레스토랑 이며 5층은 민슈쿠(民宿, 민숙)
인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난 3년 동안이나 여행이 불가능했던지라 그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2022년 여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으니 1년 반이 지났는데도 아직 옛 실적을
회복하지는 못했으니..... 건물 전체를 풀가동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텔(식당) 건물의 1층에 들어서면 인테리어 가 돋보이니 일본식 붉은 우산
에 인형과 사진 등 모든게 "일본풍" 으로 완전히 일본식이기는 합니다.
1층은 카페로 밤에는 영업을 하는 것 같은데 손님이 없으면 문을 열지 않는 것 같으며 3층 레스토랑
은 그냥 다다미가 깔린 넓은 식당으로 여행사 한국인 단체 관광객 을 주로 받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즈하라 에는 식당과 술집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대형 식당은 드문지라 스무명이
넘는 단체가 들어갈수 있는 곳이 많지가 않으니...... 여긴 그런 단체에 적합 합니다.
대마도(쓰시마) 는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일본 땅이며, 분단으로 섬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
배로 가깝게 갈 수 있는 외국 땅 이니, 부산과 쓰시마의 거리는 50㎞ 밖에 안 되는데,
후쿠오카와 쓰시마의 거리는 130㎞ 나 되니 한국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입니다.
1990년대에 해외여행 열풍이 불면서 수많은 여행사들이 상품을 개발하려 살펴볼 때 배로 가깝게 접근할수
있는 쓰시마섬 으로 눈길을 돌렸으니, 1989년 부산항과 히타카츠항을 잇는 부정기 노선이 생겨나면서
패키지 관광이 생기고, 1993년 마산 - 쓰시마 간 정기 노선이 생기고 나서 부산 - 쓰시마 - 마산 노선
으로 확대되면서 관광객이 늘어났으며 2000년에는 이즈하라항과 부산항 을 잇는 정기 노선이 생겼습니다.
쓰시마시에서도 부산 영도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일본노래 가요제 개최, 쓰시마 부산사무소
설치등 한국인 관광객 유치에 공을 들였으며, 2010년대에는 매년 2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방문하다가 2010년대 중순 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관광객이 더욱 급증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2011년에 한국인 관광객이 60,000명까지 줄어들었지만
이듬해인 2012년에 무려 5배인 293,200명 으로 폭증하였으니 부산-쓰시마 노선 취항사가
3개로 늘어났기 때문인데, 1997년부터 쓰시마행 노선은 대아고속해운 이 독점해 왔으나
2011년 10월 미래고속과 JR 큐슈 고속선 이 코비와 비틀을 투입하면서 선편이 늘어난 것입니다.
2013년 들어 아베 신조 정권의 경제정책으로 엔저 현상이 계속되면서 쓰시마 관광객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14년에 한일관계 악화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관광객 수가 다시 줄었지만 2016년부터 다시 급증 했으며..... 그후 한일 무역
분쟁과 코로나 19의 여파로 2020년 3월 이후는 한국인 관광객 숫자가 0명 이 되었습니다.
쓰시마섬은 페리 노선 개통과 지자체, 여행사의 관광객 유치 노력으로 정기 노선에 접근하기 쉬운 부산
및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는데, 페리 가격도 저렴 하고 2박 3일
정도로 어르신들이 경치 구경하기는 좋으며 게다가 한국인 관광객들이 지역경제의 중추가 되는
지라..... 한국어가 통하는 현지인 이 꽤 많으며 간판, 메뉴판들도 한국어 안내 를 해주는 곳이 많습니다.
또 한국인 관광객들 중에 렌트카를 빌려 여행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인지 도로 노면에
좌측통행을 유도하는 화살표 를 그려 놓았으니, 우측통행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통행 방향을 헷갈리지
않도록 쓰시마섬 당국에서 배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두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 등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 바다 낚시 하러 가는 사람이나 자전거 하이킹 코스 가 좋다고 많이들 가며 한국 자본이 많이 들어오고,
쓰시마 경제가 한국 경제에 종속 되었다고 할 정도로 한국 관광객에 의존하니, 인구 3만도 안되는
시골 섬이 서울과 부산 두군데에 관광객 유치 사무국을 운영하고 있고 매년 20만명 가까운 한국인이
쓰시마섬을 방문하고 있으며 가장 많았던 2018년에는 쓰시마섬에 방문한 관광객이 41만명 이나 되었습니다.
한국인 외에는 간혹 대만인과 중국인 들이 방문하는데, 서양인(미국, 프랑스, 캐나다, 독일, 영국 등 북미,
유럽인) 들의 방문은 드물며, 정확히는 한국에 장기여행(부산이 마지막인 경우) 하는 유럽
외국인이 근처에 일본 땅이 있다는 걸 들으며 무비자 갱신 을 위해 쓰시마에 잠깐 들렀다 가는 수준입니다.
한국인 관광객 덕분에 돈을 버는 쓰시마 지역 기업들 중에 대표적인 곳이 이곳의 대중교통을
책임지는 쓰시마 교통 (対馬交通)인데, 전에는 텅 빈 버스만 굴러다니다 보니 경영난
이 가중되어 기사들을 해고 하려고 시도까지 하였으나..... 한국인들의 쓰시마 관광
활성화 이후 전세버스 대절 로 쏠쏠한 이득을 얻게 되자 구조 조정 계획이 취소 되었습니다.
쓰시마 주민만을 대상으로 한 노선버스 영업 만으로는 회사를 지탱해 나가기 빠듯할 지경인데다가,
하루 영업을 마친 빈 버스들을 그냥 놀려 두는 것 보다 관광객들에게 전세버스 로 제공하는게
훨씬 이득이었으니 지역의 고용을 유지케 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힘이 결코 무시할게 못 됩니다.
반대로 쓰시마섬의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인 관광객의 1/5 밖에 되지 않는데, 일본인 입장에서는 끄트머리에
있어서 뱃삯이나 비행기삯은 부산에 가는 것과 비슷하게 나오면서도 쓰시마 보다 더 가깝고 관광산업이
발달해 휴양지인 이키섬 을 마다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려운 깡촌이라 굳이 오지 않는 것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업 외에 먹고 살 길이 별로 없는 쓰시마는 관광업, 특히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며, 과거 일제강점기 때도 쓰시마섬은 후쿠오카가 아닌 부산과
같은 경제권 이었으니, 지금도 쓰시마섬 주민들이 부산으로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로 쇼핑을 하러 가게 되면..... 주말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놀러갔다가 온답니다.
사쿠라이 마코토 를 비롯한 일본 혐한 세력들은 쓰시마가 한국에 종속 된다며 한국인 관광객을 쫓아내는
등의 추태를 부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쓰시마에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도 않았으니
쓰시마 항구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향해 욕설을 했 던 재특회 단원들은 그 날 당일치기로 돌아갔답니다.
더구나 밥 조차 쓰시마에서 안 사먹고 전원 본토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컵라면 으로 해결했다고 하니 한마디
로 쓰시마에 도움 한번 된 적이 없단 의미로.... 정작 그들이 그토록 욕하던 한국인 관광객들은 자기
돈 써서 쓰시마를 관광하면서 섬 주민들 주머니라도 보태줬으니 한국에서는 그저 비웃음거리 가 되었습니다.
재특회에서는 '쓰시마 관광 홍보 영상' 같은 걸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지만, 한국인 관광객
으로 인해 생기는 이득을 대신할 정도는 못 되니, 쓰시마 주민들 입장에선 영업 방해 및
생계 위협 행위 이므로 이들을 사실상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었으며, "간토에서 쓰시마로 놀러
가자고 독려해봤자 차라리 상하이시나 제주도 로 놀러가는 게 가깝겠다" 라면서 비웃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도쿄도를 위시한 간토 지역에서 쓰시마로 가려면 교통편이 굉장히 애매하니 환승하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기 때문이며, 도쿄 국제공항 기준으로 쓰시마로 가려면 후쿠오카로 가서 후쿠오카
에서 다시 비행기 를 타야 되는데..... 이렇게 하면 환승하느라 첫날엔 놀 수가 없어서 2박 3일로
가도 결국에는 하루 밖에 못 다니며 거기다 관광할 거리도 상하이나 부산, 제주도와 비교가 안 됩니다.
쓰시마가 내세우는 것은 국경의 섬 이라는 것인데, 정작 일본인이 쓰시마에 와도 한국의 향취를 느낄
만한 곳이라고는 가미쓰시마 북쪽 끝까지 가서 부산이 보일락 말락 하는 전망대 올라가는게
전부이니 매력이 없을 수밖에..... 이렇다 보니 일본에서 주기적으로 섬 여행을 하는 유행
(離島ブーム) 이 와도 지역별로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섬 중에 쓰시마까지 차례가 오지 않습니다.
2011년 일본 도호쿠 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자 다카라베 쓰시마
시장이 부산을 방문해 여객선의 조속한 운항재개를 요청하였는데.... 방사성 물질의 영향도 를
따져봤을때 쓰시마섬이 위험하다면 부산이라고 괜찮을리 없을텐데 일본 영토라 관광객이 줄어
들었으니 억울할만한데, 결국 6월부터 주말 운항이 시작되고 7월부터는 매일 운항 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쓰시마를 자주 찾았던 것과 반대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부산의 대형마트로
물건을 사러 가는 현지인 도 있는 모양이니, 일제 강점기에도 쓰시마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
가 바로 부산 이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며..... 부산-후쿠오카 쾌속선 노선 덕분에 부산에는
후쿠오카에서 쇼핑 차 당일치기 여행을 즐기는 일본인이 많이 오며 물론 반대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등산 애호가들에게도 어느정도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니 아리아케, 시라타케, 미타케 산 이 등산 코스로 제법
인기가 있으며,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리아스식 해안이 절경 이고 2019년 1월 20일에는 KBS 2TV
의 영상앨범 산에서도 이 섬을 소개하였는데.... 쓰시마섬을 소개한 영상앨범 산의 해당 회차는 661회 입니다.
쓰시마 관광은 대부분 먹거리 관광 이나 면세 쇼핑 위주로만 진행되어서.... 문화재 관광
측면은 한국인이 접근하기 좀 어려운 편인데, 쓰시마섬이 지닌 고유한
역사성을 담은 특수한 문화재나 명승지가 제법 있으나 한국인이 접근하기는 어렵습니다.
울릉도 는 신라시대에 이사부가 정복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섬 주민들이 자치를 해 오다가 고려 전기에는
함경도에서 수백년간 터전을 잡고 살던 "여진족" 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규슈와 대마도 까지 해적질
을 다니는데.... 오고가며 그 중간에 위치한 섬인 울릉동에 들러 약탈 을 하니 살아남은 울릉도 주민들은
육지로 도주해왔기 때문에 빈섬 이 되었고 고려 후기는 "왜구" 의 침탈 때문에 계속해 빈 섬으로 있었습니다.
조선 태종 이 왜구 때문에 "공도령(空島令)" 을 내려 울릉도가 빈 섬 이 되자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는 평도전
(平道全) 을 보내 무릉도(울릉도)에 왜인이 이주 하기를 청원합니다. “종정무가 무릉도에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살고자 하므로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반인(叛人) 을 불러 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 가 대답하길 “왜인의 풍속은 반(叛)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해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광해군 1614년에 대마도는 2차 청원 을 하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를 금지 하라는
뜻으로 예조의 서계 가운데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하였습니다.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다고 또 서계 를 보내었으니 놀랍습니다. 본도가 우리나라에 소속 되었음은 여지승람
(輿地勝覽) 에 기록됐는데, 방물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 가 명확히 있습니다.”
1419년 7월 17일, 조선군의 철수 이후 태종 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해 귀화한 왜인 등현 등 5인
을 통해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교지를 전달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 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 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1419년) 7월 17일 경신 5번째 기사
1420년 1월 10일,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의 부하 시응계도가 조선을 방문해 대마도주의 뜻을 전했다.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 의 예에 의하여, 주(州) 의 명칭 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 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에 태종은 1월 말 대마도주에게 답서를 보낸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 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청한 인장의 전자 (篆字) 와 하사하는 물품 을 돌아가는 사절에게 부쳐 보낸다."
1421년 4월,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 는 조선 예조판서에게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다.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세종) 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 반드시 옛날대로 <일본 소속으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4월 6일 무술 3번째 기사
조선 초기 두 차례(1396년, 1419년) 의 대마도 정벌 과정 전후, 태종과 세종은 위와 같이 교서를 보내
대마도가 본래 조선 영토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속주화를 시도하였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항의 와 쓰시마 도주 및 호족들의 저항 등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면서 쓰시마를 영토적으로
편입시키는 대신에 도주에게 직책을 주어 쓰시마를 번병(藩屛) 으로 삼는 정치적 종속관계를 맺었다.
1443년 7월 22일, 세종은 일본인 등구랑의 건의에 따라, 일본의 이키섬(일기도)
을 살필 목적으로 강권선을 초무관(招撫官) 에 임명했다. 초무관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는 또 잡혀간 사람들을 되찾아 오는 것이 주 임무 였다.
강권선은 1443년 8월 2일에 일기도로 출발, 1444년 4월 초에 등구랑과 함께 일기도에서 왜적
여럿을 잡고, 대마도, 부산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와 4월 30일에 왕에게 임무를 보고했다.
"대마도는 일본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 "대마도, 일기도, 상송포 등지의
사람을 후하게 대하여 순종하고 복종 하게 할 것", 규슈 일대 왜적의 동태 등을 자세히 보고했다.
1462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가 이조판서에게 "대마도 도주 종성직 에게 판중추원사 겸
대마주 도절제사 를 제수하도록 하라" 고 명한다. 판중추원사는 정2품의 중추원 관직이고, 중추원은
고려 시대 행정기관이었으나 조선 초 의흥삼군부 존재로 유명무실해졌다가 세조 시기 중추부로 개칭
되어 존속한 것이라, 속주 신하에 적합한 명예직 으로서 제수한 것이다. 도절제사 역시 정2품의 관직이다.
1471년 신숙주가 《해동제국기》를 저술했다. 신숙주는 과거 1443년 조선 통신사 를 따라 일본을
방문해, 쓰시마 도주와 계해약조 (癸亥約條, 일본에서는 가길조약(嘉吉條約) 이라 한다.)
를 체결한 경험에 여러 정보 조사를 더했다. 이 때 쓰시마를 해동제국 즉 바다
건너 조선의 영토도 아니지만.... 동시에 일본의 8도 66주에도 속하지 않게 별도로 기술하였다.
1481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이 저술되었다. 《해동제국기》 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권은 쓰시마섬이 신라 이래의 실지 라는 인식을 담고, 이후 각종 문헌과 지도에
반영되었다. 이들은 쓰시마의 소속을 일본 본주는 아니되 일본국 으로 기재하고 있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쓰시마가 조일 양속 하에서 막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는 반독립적
인 정치체제 였기 때문에.... 대마도는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조선 조정과 더욱 밀접했다
( 돈과 쌀이며 콩과 무명 베를 주면 복종한다? )..... 이런저런 생각을 접고는 호텔을 나와서는
조선통신사비를 지나 가네이시 성터와 반쇼인을 보러 갑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