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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비전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라!"
+ 본 문 : 여호수아 3장 14절 - 17절 (구약 323쪽)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아멘!
+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인사합시다. /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권능이, 당신 안에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국 해안에 조그마한 예배당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십자가 탑이 크지는 않았지만,
밝은 등불 밝히며 서 있던 예배당이, 어느 날 폭풍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재정사정도 어렵고, 사람도 없어 무너진 채로 예배당을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군 제독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배당을 왜 세우지 않습니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우리가 세워 드리지요. 어둔 밤 불을 밝힌 이 작은 예배당은,
우리 해군 병사들의 이정표가 되었고,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우리 배들의 등대가 되었으며,
우리의 푯대가 되어 주었지요." 동방을 등불이라는 타고르의 시가 아니라 할지라도,
오래 전부터 21세기가 되면 한국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나라와 교회와 민족이 되리라,
기대했던 그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25년이 지나왔습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 열방의,
불을 밝힌 등대가 되어야 할 것이며, 한국교회는 새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지나갈 광야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40년이나,
광야에서 방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루했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입니다. 출애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땅을 늘 뒤돌아보던 어리석은 백성들의 실수를, 재범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앞에 가로막혀 있는 아말렉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도 걷어 치워야 할,
때입니다. 걸핏하면 불평하고, 넘어지고, 원망하다가 뱀에 물려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신음소리도 그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생활의 현실에 파묻혀서,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한편 허공만 쳐다보고,
정신을 놓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아야 할 때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어야 할 때입니다. 옛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는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속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세요. "오르지 못할 큰,
나무가 있으면 쳐다보기라도 하라. 그래야 꿈 이 생긴다. 쳐다보다 보면 길이 보인다."
추장이 나이가 들어서 세 아들 중 누군가 후계자를 삼아야 되겠다 생각하고,
세 아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랐습니다. 푸른창공이 펼쳐져 있고 저만큼 언덕 위에,
나무가 보이고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먼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네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둘째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무엇이 보이느냐?" "큰 소나무가 보이고 독수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막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네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활을 당겨 쏘아라!" 그래서 이 셋째인 막내 아들이 추장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먼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도, 어두운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도 미래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공격의 오메가, 마지막 포인트가 우리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약속의 땅이 내 눈에,
들어와야 한단 말입니다. 일찍이 패턴 장군은 전역하는 부하 장병들을 훈시하는 말,
가운데 흔히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먼 훗날 그대들의 후손들이 그토록 처절했던,
전쟁 때, 누군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하고 물을 때, 그대들은 자랑스럽게,
그렇게 대답을 해라. 나는 대 패턴 전차군단의 일원이었다고 말이다."
역사의 대열을 놓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하는 사람 가운데도 패잔병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승전군인들처럼, 자신만만하고 긍지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 한번을 드리더라도 장례식에 참여한다는 기분으로 오는 사람이 있고,
결혼식에 참예 한다는 기분으로 행복감에 젖어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역사는 늘 긍정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되어 집니다.
언제나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한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위대한 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은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갔습니다. 여기서 히브리말로 "핫비르"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은 "강을 건넌 사람들"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강을 건너가야 할,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강을 건너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 노예 생활을 430년 동안이나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초청했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감으로 노예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민, 천국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제 건너야 할 강이, 저들 앞에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바로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을,
누릴 수 있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홍해는 60만 장정과 허다한 잡족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출애굽한 사람들 중에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건너갔습니다.
요단은 믿음의 사람만 건널 수 있는 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요단을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거인족을 보고 두려워 떨던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불평하던 사람은 아무도 그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거룩한 시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요단을 건너가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언제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약속의 땅을 쟁취할 수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창조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미래의 주인공이 됩니다.
언제나 새 시대는 믿음의 사람, 꿈의 사람들에 의하여 펼쳐져 갔습니다.
요단강이 무엇입니까? 요단강은 죽음이요. 가나안 땅은 천국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성경을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선 저들은 강단 없는 전쟁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그 땅이 천국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가나안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하신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축복의 땅입니다. 사명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이 무엇입니까?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만 했던 첫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지난 여러 시간 동안 불순종하다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신 분이 계십니까?
이제 모든 실패는 모두 광야에 묻어두고 새 세계를 향하여 건너 가십시다.
습관적인 죄 때문에 한발자국도 믿음의 향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갈등과 번민 때문에 믿음의 향상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모두 다 광야에 묻어두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건너가십시다.
예배에 실패하고 기도 생활에 나태하고 말씀 생활에 게을렀던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제는 요단을 건너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준비하십니다. 풍성한 선물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훌륭한 목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운 여정을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요단을 건너는 모험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할 것을 요구하고,
땀과 피를 흘려 싸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축복은 때로 고난이라는 보자기에,
쌓여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요단을 건너갈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여호수아가 시작하는 말씀에 "여호수아가 일찍이 일어나"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정직과 성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싯딤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4장 10절에 보면 싯딤은 역청 구데기가 많은 곳이라고 그랬습니다.
때문에 싯딤에서 떠났다는 얘기는 이 땅, 썩어질 것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새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헌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고 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헌 땅을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카렌다의 숫자가 달라졌다고,
새 세상이 펼쳐지는 것 아니지요. 우리 마음이 달라져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달라져야 됩니다. 우리의 비전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싯딤에서 떠나야 합니다. 습관 적인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실패의 흔적에서 떠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떠나야 합니다.
캐논 선교사가 선교여행을 하는데 하늘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더니,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치고 땅에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어떻게 해서 꼼짝 못하고 하늘에서 저렇게 떨어지나 가까이 가서 봤더니,
독수리가 먹을 것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가 땅에 족제비 한 마리가 지나 가길래
쏜살같이 족제비를 탁 낚아챘지요. 그런데 족제비란 놈이 독수리의 가슴팍에,
탁 달라붙었습니다. 이것을 털어내야 하는데 털어내지 못했지요. 그러니까 족제비란,
놈이 독수리의 가슴팍을 다 갉아먹어버린 것입니다. 그해서 독수리는 하늘을 날다가,
가슴팍이 다 헤어진 다음에야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창공을 솟아올라야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광활한 새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야 될 거룩한 성민들이 축복의 세계를 만끽하고 살아가야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떨어지게 됩니까? 털어내야 될 족제비 한 마리를,
털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싯딤에서 떠나야 됩니다. 여러분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부정적인 시각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죄 짓고 살아가던 어제의 모든 허울들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실패의 흔적들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불평과 원망과 입술의 실패들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2장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가만히 정탐하러 보냈습니다.
"싯딤에서 떠나라." 무슨 얘기입니까? 정탐하는 신앙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경꾼 신앙생활 벗어 던지라. 생각만 하고 주저 앉은 신앙생활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 머뭇머뭇 하겠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것이요. 바알이 너희의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를 것이니라."
세상도 좋고 천국도 좋고, 세상 쾌락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천국 복락도 누리고 싶고,
어느 사이에 천국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겠습니까?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너희는 오늘날 너희 섬길 신을 택하라"
하나님나라는 천국은 공동 우승이 없습니다.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게끔 되어있고,
신앙생활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먼저 싯딤을 떠나야 합니다.
세상에만 매여있던 끈을 자르고 정탐만 하고, 구경만 하던 신앙생활을 벗어 던지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중심을 모두 다 실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요단강을 건너가기 위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여호수아 3장 3절입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무슨 말씀입니까? 200만 대군이 광야를 여행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앞에 선 몇 사람만 볼 수 있도록 법궤를 둘러쌓도록 되어 있지 않고, 멀리 떼어놓고,
200만 모든 백성들이 장군들도 사병들도 노인들도 어린아이들 도 남자도 여자도,
법궤로부터 시선을 떼지 말고 법궤를 바라보고 따라라 그 얘기 아니겠습니까?
“제사장을 따르라. 법궤를 보고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 앞장 서 가리라.
너희 가는 길은 내가 개척하리라.“ 앞장 서 가는 하나님! 얼마나 멋진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시겠습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당황스럽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십시다.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마십시다.
조그만한 구멍가게를 열어도 기도보다 더 앞장서지 마십시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예수보다 내가 앞장서서 달려가지 마십시다. 우리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십시다.
신앙생활을 변두리로 취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를 변두리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장세우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인생에 앞장서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믿습니까?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산불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두 길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는 맞불을 지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유혹을 불길들이 얼마나 크게 타오르고 있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큰불을 일으킵니다. 세상의 정욕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불을 지피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불을 키워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의 불을 피우고 달려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골짜기로 내려가면 어디에서 불이 오는지 보이기에, 불에 타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이나면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야 합니다. 정상에 올라가야만 삽니다.
정상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이 지금 어디서 타오르고 있고 어디에 길이 있고,
어디로 내려가면 내가 살 수 있는가 하는 길이, 한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높은 곳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높은 곳에 올라라. 믿음을 높여라. 기도의 차원을 높여라.
말씀의 차원을 높여라. 그러면 너희들이 달려갈 새 시대가 너희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갈매기의 꿈으로 유명한 리챠드 바크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높이 오르는 사람만이 먼 곳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주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의 비젼을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제는 자녀 교육을 하더라도 멀 리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믿음 생활하더라도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멀리 볼 수 있는 시각, 지혜의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 바라봄이요. 믿음과 꿈을 높이고 길을 찾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강아지가 자기 손에 있는,
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손이 입으로 가면 입을 쳐다보고 손이 내려와 빵을 뜯으면,
빵 뜯는 손을 쳐다보다가 또 올라가면 그 입을 봅니다. 할 수 없이 빵을 뜯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강아지에게 주었습니다. 그걸 바라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하나님 나는 세상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바라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 눈이 엉뚱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철없는 강아지 한 마리만도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보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마틴 루터는 분연히 일어나 오늘의 종교개혁을 낳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 3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지금 넘실대는 요단강을 건너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이 합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지금 이 요단강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떤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200만 행진의 대열 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창궐하게 솟아오르는 물을 바라보며,
한결 같이 조바심하여 "하나님 이 강을 어떻게 건널까요?" 저들이 안타깝게,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데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이 얼마나,
엉뚱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업이 어려워요. 내가 하던 일들이,
잘 번창할 것인지 아니면 하던 일들마저 어려움을 겪을 것인지, 방황하고 비틀거리는,
내 자식을 바라 볼 때마다 이 자식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 아이를 어떻게 권면해야 됩니까?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해야 된단 말입니까?
우리 가정이 어려워요. 우리 민족이 어려워요. 우리가 통일을 원해요.
휴전선을 거둬 주세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묻는 대답은 듣고 싶은 방법은 듣고 싶은 말씀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스스로 성결케 해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그 전략이나 방법을 가지려고 하지 마라. 내게 중요한 것은,
거룩이니라. 내가 너희를 쓰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너희를 살펴 볼 지니라.
나는 준비된 그릇대로 쓴단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성결의 문제였습니다. 정직의 문제였습니다. 아멘입니까?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원하시면, 여러분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입술을 쓰기 원하십니다. 입술을 성결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손발을 쓰기 원하십니다. 손발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장을 쓰기 원하십니다.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쳤습니다.
아직도 요단강 물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언덕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 발이 요단강 물가에 닫자마자 물이 갈라집니다.
요단강 물이 갈라진 다음에 제사장들이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오직 말씀을 믿음으로 발을 들여다 놓았더니,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내가 믿을 거예요.
하나님 내가 사업을 시작했어요. 사업이 번창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충성도 하고,
헌신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내가 충성해 볼께요. 하나님 살아계신 증거를 내게,
보여주세요. 그래야 믿을 것 아니예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정반대로 말씀합니다.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라." "보리라." 우리는 언제나 이 동사를,
바꾸기 원합니다. “하나님 보여 주세요 믿을께요.” 우선순위를 똑바로 해야만 합니다.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께요. 아니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여러분의 옛 생활 애굽을 뒤돌아보던 지난 날의 모든 광야생활을 이제 청산하십시오.
지루하고 저주스럽던 광야생활을 묻어버리십시오. 요단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요단강에 믿음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첫 걸음을 내딛어 가십시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높여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멀리 바라 봐야 할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 바라보고 승리하며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