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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유달리 위생 관념이 철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료 수준이 극히 낙후되어 있던 시절, 수시로 전염병이 창궐했었는데, 제대로 된 치료제도 없다 보니, 그저 씻고 또 씻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최선의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어찌 보면 유다인들이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이 그토록 목숨걸고 소중히 여기며 강조했던 손이나 몸을 씻는 예식, 그릇이나 제구를 씻는 예식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정결례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정결함은 필수였습니다. 특히 제사에 앞서 정결함은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의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제나 레위인들은 하느님께 번제를 드리기 전, 반드시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정결례, 참으로 유익한 것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으로서 합당히 지녀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과함은 부족함만 못합니다. 정결례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세심주의는 사람을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으며, 세부 규정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정결례의 정신, 곧 하느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 사랑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셨던 분, 지극히 자유로운 분이셨던 예수님 눈에 유다인들의 과도한 정결례 준수가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서민적인데다가 파격적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보란 듯이 일부러 정결례를 무시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제자들도 스승님을 따라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목숨 걸고 준수하는 정결례를 밥 먹듯이 파기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맨소리로 따졌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정결례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분의 자녀로서 당연히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특히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거룩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은 필수입니다.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잔도 씻고 제구도 씻지만, 우리 영혼도 거듭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내 탓이라고, 가슴도 크게 치지만, 마음을 찢어야겠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7,1-13
교회 안에도 암세포가 있고 면역세포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왜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느냐고 따집니다.
사실 손을 씻는 법은 율법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조상들로부터 병들지 말라고 지켜온 전통인 거죠.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전화 전통은 따르지 않고 인간들의 전통을 강요하냐고 하면서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당신을 헛되이 섬긴다,
결국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암세포는 그냥 병이 들었을 때 그때만 생기는 건 줄 알았더니, 항상 생겨난다고 합니다.
대신 그렇게 생기는 것들을 없애주는 면역세포도 있습니다.
면역세포는 세포가 몸 안에서 지켜야 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 세포를 없애는 역할을 합니다.
몸도 면역세포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몸이 전체가 인제 죽게 됩니다.
몸을 사랑한다면 자꾸 생겨나는 암세포를 죽이는 면역세포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전체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교회 전통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없애는 면역세포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 들어갔을 때 가톨릭 학생회에 들어갔습니다.
가톨릭 학생회는 데모 서클 중에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어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가니
또 어쩔 수 없이 화염병을 나르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폭력적으로 나라에 저항하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만 교회의 전통이 세상의 전통이 스며드는 것을 좌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허물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스파이가 들어오고 그 스파이가 다른 전통의 가르침을 물들입니다.
그것들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면 어느 체계건 무너집니다.
가톨릭교회는 안 그럴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대부분이 교만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예전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까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반대했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습니다.
암세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지옥 이야기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우리는 어둠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다는 요한 사도도 극단적 이원론자가 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할 때 오히려 거부당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삼구(세속-육신-마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은 김대건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당부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면서 삼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하면 조선시대 사람이냐, 중세 시대 사람이냐고 합니다.
이제는 교리서에 나오거나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암세포가 될 것인지, 면역세포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올바른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암세포와 대결하는 면역세포의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전통을 지키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중요한 선물이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당연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세상 전통으로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선은 교회의 성체로만 구원이 이뤄지고 나머지는 피의 세례, 열망의 세례, 혹은 계약에 관한 신학으로 나아가야지, 처음부터 교회를 부정하는 말들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개신교가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개신교 신자로 오해받습니다.
주님이라면 아마도 암세포를 무찌르는 면역세포의 역할을 하는 이들을 더 사랑할 것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 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 8)
시작은 늘
불완전하고
불안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불안한 우리에게
내려주셨습니다.
계명을 받아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명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전통보다 계명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뜨거운 삶이었습니다.
순교의 자리에서
우리자신을
만나게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지 않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자유로운 삶입니다.
너무나 쉽게
배신하고 변질하는
이 세상을 향해
순교의 영성은
참된 삶이 무언지를
가르쳐줍니다.
삶과 신앙은
함께하는
아픔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감사의 여정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생명을
자유롭게합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무의미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순교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결단의 시간 말입니다.
신앙의 고귀한 유산은
순교의 시간으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계명은 순교로
신앙고백이 됩니다.
불완전한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을 주소서.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바위 안에 천사가 갇혀 있음을 느끼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
미켈란젤로는 원석을 다듬어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원석만을 보고서는 “여기에 아름다운 다비드상이 있군.”, “여기에 천사가 갇혀 있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에 지금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자녀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누군가의 사랑에 큰 힘을 얻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게 만드는 사랑을 향해 ‘사랑의 미켈란젤로 효과’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천사를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천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원석만을 바라보고서 ‘쓸데없는 돌이네.’라며 단정을 지어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 안에 천사가 있는데, 사랑을 통해 그 안의 천사를 꺼낼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분명 조상들의 전통에 맞지 않는 행동이고, 또 비판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두고 위선자라며 꾸짖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결 예식이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서원을 채우고자 성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의무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그저 사람의 전통일 따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오로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특별한 곳에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관심과 반응을 통해 사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의 몸과 성장을 응원하면서 이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진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20대에는 욕망의 지배를 받고, 30대는 이해타산, 40대는 분별력, 그리고 그 나이를 지나면 지혜로운 경험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그라시안).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마르7,6)
'믿음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7,1-13)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유다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에 기초해서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의 세부조항들'인 '조상들의 전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전통 중에 하나가 소개되고 있는데, 바로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음으로써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7,5)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위선자'로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7,6.7.9)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모세오경)'이나 유다인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의 본질은 '살리는 일인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계명의 본질 또한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외적 형식에만 머물러 있었고, 본질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1597년 2월 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순교한 '26명의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라는 믿음의 본질로 나아간 장한 순교자들입니다.
우리도 형식을 뛰어넘어 믿음의 본질로 나아갑시다!
첫댓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르 7,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