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912.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 방전과 충전. 등 )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방전과 충전 2023.09.12 05:31
어제는 어떤 분의 편지에 답하면서 잘 지내시라는 뜻으로
‘방전하지 마시고 충전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저에게 하는 말이었고
오늘 여러분께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지난 주말 몇 가지 일정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무척 바빴고 힘이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습관적으로 힘들다고 말하며 힘든 일을 도무지 하지 않으려고 하면
힘이 들어야 힘이 들어 오지 힘들지 않고 힘 들어오지 않는다고 충고하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힘들게 일하고 나면 힘이 빠져나가기만 하고,
재충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그런 말을 제게 하듯 그분에게 한 것일 겁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치유하실 때 힘이 빠져나가셨다는 표현이 있는데
혈루증을 오래 앓은 여인이 주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주님에게서 힘이 빠져나가 치유해주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오늘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힘을 쓰지 않고 어떤 일을 이룰 수 없고,
주님께서 그 많은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힘이 소모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밀려드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계속 치유하실 수 있었던 것은
저와 달리 방전하신 다음에는 즉시즉시 충전을 잘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마트 폰 충전기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요즘 풍속도이고,
여기저기 충전 서비스가 있고 버스에도 충전기능이 있어서,
즉시즉시 충전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스마트 폰 충전은 즉시즉시 잘하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그래서 방전되고 맙니다.
그래서 요즘 흔한 말 중의 하나가 ‘Burn Out’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국제 질병 기구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번아웃 증후군 곧 무기력증을 일컫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힘든 일로 힘이 완전하게 소진되고
재충전이 안 되면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증상인데
충전기로 치면 완전 방전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충전이 안 되는
다시 말해서 충전기가 완전히 고장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사랑 충전과 힘의 충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자주 하지만
의무 기도를 많이 하거나
청원 기도만 많이 한다면
사랑 충전이나 힘의 충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전만 하고 충전은 하지 않는 나는 아닌지,
즉시즉시 충전하는 것을 놓치며 사는 나는 아닌지,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 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둘을 뽑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하고 싶은 바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르심은 자격이요, 응답은 능력이다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이 많은 사람,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카6,12) 나서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그 중에는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습니다.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응답하는 이에게 당신의 뜻을 전할 힘을 주셨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이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주님 안에서 부끄러움을 감당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스승이기에 앞서 제자의 삶을 충실히 살았기에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많은 분이 ‘저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며 봉사의 기회를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교만함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부족하지만, 당신께서 쓰신다면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저를 뽑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용기를 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23년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브라더스’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올해는 디즈니의 꿈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디즈니랜드는 미국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에게는 미국인의 꿈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어린 시절 꿈을 키웠습니다.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난은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미국인들은 경제 대공황에서도, 전쟁에 참전하면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디즈니랜드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저는 지인들과 함께 100주년을 맞이하는 디즈니랜드엘 다녀왔습니다.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함께하는 행진을 보았습니다. 미키마우스, 피터팬, 신데렐라,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 알라딘의 주인공들이 행진을 하였습니다. 밤에는 ‘불꽃놀이’를 보았습니다. 성을 중심으로 음악과 애니메이션이 펼쳐지면서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come true.)’라는 말처럼 100년 전에 시작된 디즈니의 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꿈’을 꾸었던 분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꿈은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꿈은 ‘십자가, 나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회당에서 자신이 꿈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꿈은 ‘하느님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기쁜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받으셔야 할 분이 기도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이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의 기도, 섬김,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12명의 제자를 선발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는 자랑스럽게 사도들의 이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제자들은 기쁜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인류역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예수님 이전(Before Christ)와 예수님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꿈’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12제자를 뽑으십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제자들의 대부분은 하늘나라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자들을 뽑기 전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을 뽑기 전에 주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사실 주님께서는 어떤 중요한 것을 행하시기 전에 늘 기도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묻고 또 물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고자 노력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렇게 절실하게 밤을 새워가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짧게 몇 번 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내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러고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없다고 말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모습인가요?
늘 우리들의 삶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뜻이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맞는다면 그 기도는 분명 이루어질 것입니다.
냉장고 다이어트
가끔 냉장고 다이어트를 실시합니다.
그동안 냉동실에
차곡차곡 모아뒀던
비닐봉지에
둘둘둘 말아뒀던
그래서 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것들을 꺼내 봅니다.
정리도 하고
다시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런 다이어트가 가끔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차곡차곡 모아뒀던
둘둘 말아뒀던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딱딱하게 굳어있는 상처와 아픔들….
한번 날 잡고 꺼내 보세요.
냉장고 다이어트하듯이
우리 마음 냉장고도 날 잡고 정리해보세요.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헬스장에서 덤벨을 드는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근력 운동을 할 때 근육은 스트레스를 받고 근육 섬유는 끊어집니다. 이를 나쁜 상황이라고 할까요? 아마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을 하는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근육 섬유가 끊어졌다가 회복할 때 예전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주일 후에는 약간 더 무거운 덤벨을 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신중하게 무게를 늘려가며 1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면, 힘이 세지고 몸은 더 튼튼해집니다. 그 이유가 바로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라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나를 튼튼하게 한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자체에 집착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또 이 고통과 시련으로 이어지는 스트레스를 왜 나에게 생기냐면서 불평불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스트레스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힘을 주십니다. 이 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굳이 이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상황을 떠올려 보면 특별히 중요한 순간에 앞서서 하셨습니다. 세례받으신 뒤 공생활을 앞두고 기도하셨고,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때에도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왜 기도하신 것일까요? 기도해야 한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신 것이고, 그 뜻에 함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는 식의 청원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또 함께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스트레스와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소중하게 있는 것을 아는 일이다(공지영).
---------------------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의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이다-
어제 읽은 시가 준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이미 시작된 지옥도 같습니다. 천국을 만들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지진은 늘 먼곳의 비극이니
여기는 그러려니 했다
별들이 사라졌다고들 했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한여름 우박이 쏟아지던 날도
별일이지만 그러려니 했다
때 아닌 꽃들이 피었다고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까르르 웃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푸드덕 날던 새들이 사라졌다
꽝꽝 얼던 빙하가 사라졌다
인간은 사라지고 인공지능만 좀비처럼 둥둥
지금 여기
곧,
개봉 박두”(시인 김유철; 삶예술연구소 소장)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답은 기도뿐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에 하나 더 한다면 참되고 항구한 회개입니다. 세계가, 지구가, 특히 한국이 총체적 위기요 총체적 난국입니다. 좀처럼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회개입니다. 그 어느때 보다도 절박합니다. 신문을 성서 보듯, 성서를 신문 보듯 하라는 개신교의 칼바르트 세계적 신학자의 권고에 공감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님의 기도”가 있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애국가”가 있습니다. 어제 면담고백성사후 두분 자매에게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에 이어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감동입니다. 나라 사랑이 하나로 녹아있는 기도요 성가같은 애국가임을 체험합니다. 아, 한국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은 기도합니다. 아, 이제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도해야 되는, 기도는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 과제가 된 느낌입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회개와 겸손, 지혜로 인간 본연의 품위를 되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지구, 병든 세상, 병든 나라, 병든 사회, 병든 학교, 병든 가정, 병든 개인 제가 진단하는, 인간 무지로 자초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온전한 건강한 개인은 불가합니다. 총체적 난국과 위기에는 총체적 기도와 회개뿐입니다. 정말 깨어 살아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영혼 건강, 정신 건강, 마음 건강이 절박합니다.
길을 잃으면, 희망을 잃으면, 꿈을 잃으면, 빛을 잃으면, 중심을 잃으면 영혼은 정신은 마음은 저절로 방황이요 병들기 마련입니다. 이래서 제가 강조하는 바 영혼의 건강, 정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을 위한 최고의 처방은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요, 바로 이를 위해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의 원천인 하느님과의 생명의 소통, 사랑의 소통인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참으로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시고 당신 대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밤은 잠자라 또는 기도하라 있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밤마다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친교로 매일 밤을 새우다 시피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관상적 쉼과 친교의 기도를 통해 영육을 충전시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히 중대한 일을 목전에 두었을 때는 참으로 치열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나라를 책임진 위정자들이나 공동체를 책임진 이들이 치열한 영적전쟁터에서 “주님의 전사”로 이렇게 주님처럼 겸손히, 치열히 깨어 기도하여 총체적 난국의 출구를 찾아야 할 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기도후 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서시니 사방에서 구름떼처럼 당신 중심으로 모여드는 병든 백성들입니다. 말씀에 굶주리고 육신의 병으로, 또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고통받는 무지의 중생들입니다. 아, 어쩌면 예나 이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인간 무지의 병든 현실인지요! 인간의 진보는 도대체 가능한지, 여전히 계속되는 반복의 악순환인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유일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젠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이요 온 인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 떠난 육친의 어머니 대신 영원한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연상하며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다시 엊그제부터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름으로 다시 산책중 동요부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복음 대목이 예수님이 결정적 답임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썼으니,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힘은 기도의 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르시며 또 병든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일치의 중심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과 날로 깊은 관계 속에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요 성인(聖人)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제1독서 콜로새서의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와 닿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이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치유의 구원이요 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영적승리를 위한 유일한 답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활짝 열려 있는 “활동의 앞문”으로, 사막의 하느님께는 활짝 열려 있는 “관상의 뒷문”으로 사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230912.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산>
산에 오릅니다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서 내려옵니다
사람들을 만나러
산에 오릅니다
산에서 내려오러
산에서 내려옵니다
산에 오르러
언제나 어디서나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르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산이 있으니
산에서 내려오고
산으로 오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