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독일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괴테는 ‘인간에 가장 끔찍한 모습은 익숙함으로 무감각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것, 위대한 것, 숭고한 것 등에 대해 아무 감흥 없이 익숙해지면 결국 그것들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신 삶 안에서 무감각해지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한때 음악을 너무나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공부할 때 반드시 음악을 틀어야 했고, 일어나서도 또 잠들기 전에도 음악을 들었습니다. 새 음악 테이프를 사기 위해 용돈을 아끼고 아꼈고, 그 음악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쉽게 얻을 수 있어서 그럴까요? 그냥 익숙해졌고 무감각해졌습니다. 음악 듣는 기쁨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전혀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쉽고 편안할 때 하느님께서 보일까요?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귀하게 여겨서 정성을 쏟아야 하느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귀하게 여겨서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삶,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신명기 6,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을 통합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사제,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율법의 정결 규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시체 접촉 회피),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원하는 상황으로 생각했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떠나 그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행동을 실천합니다. 그는 귀찮지 않았을까요? 당시에 죽은 척하고 강도질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오늘의 명언: “당신도 그래요?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우정이 탄생한다(C.S.루이스).
사진설명: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
많이 덥습니다
주일 건강의 축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