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게의 집
황상순
소라껍데기를 찾지 못한 게는
버려진 깡통으로 집을 마련했다
방도 더없이 넓고
이곳저곳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으나
내 귀는 깡통
더 이상 바다가 그립지 않다
--- 시터 동인 제9집에서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를 그리워 하나니”([내 귀는 소라껍질])는 장 콕토의 시이며, 이 세상의 수많은 학생들의 동심과 모든 인간들의 낭만적인 서정을 자극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귀와 소라껍질은 그 형태가 아주 유사하고, 이 유사성에 착안하여 영원한 고향인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그 향수를 자극하며,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바다-고향’은 영원한 젖줄이며, 언제, 어느 때나 우리 인간들이 되돌아가 영원히 살고 싶은 곳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의 토대도 끝끝내는 고향이며, 따라서 이 ‘바다-고향’을 잊은 자는 머나먼 이방인이거나 외계인, 또는 기계 인간의 로봇에 지나지 않는다.
황상순 시인의 [소라게의 집]은 고향 상실의 회한이 담겨 있는 시이며, 문명비판의 시각에서, ‘만물의 죽음’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일론 머스크와 빌 케이츠와 저커버그와 손정의 등, 이 세계적인 부자들은 인공지능 출현의 열광적인 찬양자들이며, 그들은 인간과 인공지능, 고향과 고향 상실의 전도 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악마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소라게는 그의 집을 잃어버렸고, 어쩔 수 없이 빈 깡통을 그의 집으로 삼았다. 요컨대 소라들은 오염된 바다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던 것이고, 따라서 빈 깡통은 “방도 더없이 넓고/ 이곳저곳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내 귀는 깡통/ 더 이상 바다가 그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라도 소라게도 죽었고, 바다와 고향도 죽었다. 시와 시인도 죽었고, 낭만과 꿈도 죽었다. 인공지능이 생각하고, 인공지능이 지시를 내리며, 우리 인간들은 인공지능의 명령에 따라 울고 웃으며, 이제는 인공지능만을 전지전능한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제 스마트폰과 자동차와 TV를 빼앗는다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다른 한편, 피도 눈물도 없이 인공지능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노벨물리학상도, 노벨화학상과 노벨평화상과 노벨의학상도 인공지능이 다 싹쓸이 하게 되었고, 요컨대 이 세상은 ‘인공지능 만세의 세상’이 된 것이다.
소라게의 집은 빈 깡통이고, 우리 인간들의 집은 인공지능 로봇이고, 다 시간의 풍화작용에 따라 폐기처분될 운명에 놓였다.
이단을 행하면 화를 부르듯이, 자연을 파괴하면 해로울 뿐이고, 인간이 인간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만물의 터전과 인간의 죽음만을 재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