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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6월 16일 강명화의 자살에 관한 내막을 실은 기사.
강명화-장병천 목숨건 연애
1920년대 조선사회 흔들어
신문기사·소설로 대서특필
‘요부인지 명기인지 좌우간 여염에 말이 많던 강명화는 23세의 젊은 목숨을 백만장자 장길상 씨의 외아들 장병천의 눈앞에서 끊어 버렸다. 그 이면에 서린 비밀은 과연 어떠한 것이던가.’ 혼돈과 격동의 시기,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사건 내용은 1920년대를 휩쓴 강명화의 정사(情死) 사건으로 한 시대의 폭발적인 화제를 만들어 냈던 연애와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장안에 내로라하는 평양기생 강명화는 어떤 이유로 음독자살을 했을까.’ ‘장병천 씨의 가정 사정과 기타 복잡한 내막은 무엇이었을까?’ ‘부호의 독자 장병천의 자살’ 등 쏟아지는 신문기사와 소설들은 그 시절 그들의 정사 사건을 각색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고,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비극적 정사 사건의 주인공 강명화와 장병천은 장안의 신드롬을 예고하며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평양기생학교에서 노래와 서화는 물론 전통무용과 시조를 수련한 강명화는 17세가 되는 해 경성으로 올라와 대정권번(평양기생 조합)의 기생으로 당대 유명한 문인과 인사들을 상대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인텔리 기생이었다. ‘여기서도 부르고 저기서도 청하여 잠시 한가하게 집에 들어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아무라도 명화를 데리고 놀려면 삼사일 전에 미리 날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해조의 ‘강명화실기’에 쓰인 이야기처럼 강명화는 절세가인, 최고의 기녀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류계에 그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허다한 남자를 모두 마다하던 명화가 우연히 남자를 만났다.
‘묻노니, 그 남자는 누구인가? 가세를 말하면 경상도 대구지역에서 첫손가락 꼽을 만한 부자요, 지체와 문벌로 말하면 양반 중에서도 으뜸가는 양반의 집이다. 그 집 귀남자 장병천이다.’
전근대적인 100년 전, 신데렐라 스토리를 연상케 하는 기생과 대부호 아들의 사랑 이야기는 이미 불행을 예고하는 듯하다.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의 허용, 혼인의 결정적 주체는 예나 지금이나 세대 간의 논란거리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며 손가락도 잘라 보고, 구름 같은 머리도 잘랐으며 끝내는 고뇌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죽음을 결심한다.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하고 당신을 위해 한목숨을 끊는 것이 옳소. 세상 사람 중에 나의 가장 사랑하는 파건….”
파건은 장병천의 별호이니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유연애 실현을 위해 비극적 죽음으로 생명을 던졌다.
그로부터 넉 달 후 야윈 낯에 눈물에 젖은 장병천마저 뒤를 이어 음독자살하자 그들은 시대의 연애 상징이자 대중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1920년대는 신여성의 시대였다. 새로운 신여성상이 부각되기 이전 연애의 주역은 흔히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기생이었다. 전 조선 사회를 뒤흔든 정사 사건을 지켜보며 여성 화가 나혜석은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조선에 만일 여자로서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 아는 자는 기생계를 제하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라며 동정을 표했다.
한편 사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풍조가 젊은이들 사이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신채호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육(肉)의 귀(鬼)이다. 자기 쾌락을 위해 몸을 던지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건을 두고 ‘신성한 연애’ ‘비극적인 죽음’ 운운하다니 한심할 따름이다’라며 강명화의 죽음에 꽃 대신 돌을 던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사(情死)’란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사건이다. 봉건적 도덕 윤리와 낯선 서양의 신문물들이 쏟아지던 시대에 달콤한 사랑과 숙명적 운명, 갖은 화제를 뿌린 끝에 지독한 사랑을 한 남녀의 비극적 결말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을까.
(문은희 책임사서원ㆍ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