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살고싶은 곳 - 정자는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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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7. 15:54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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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
이렇듯 누정은 마을 안이 아니라 경승지에 풍류를 곁들인 휴식공간으로 특별하게 지은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형이 높고 사방이 탁 트여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지었다. 다음은 『동문선』에 실린 이규보의 「사륜정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여름 한낮에 손님이 찾아오면 동산에 자리를 마련하여 더러는 자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데, 경치를 바라보는 데는 좋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볕 때문에 자꾸 옮겨다니다 보니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방이 트인 시원한 정자에 올라 시간을 보낸다면 그런 불편은 없을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영조법식(營造法式)』이라는 문헌에는 “정은 백성이 안정을 취하는 바이니 정에는 누가 있다. 정은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의 「백관서」에는 “여행길에 숙식시설이 있고 백성의 시비를 가리는 곳이 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규보는 정자의 기능을 손님 접대도 하고 학문을 겸한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보았다. 그는 정자에는 여섯 사람이 있으면 좋다고 하였는데, “여섯 사람이란 거문고를 타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시에 능한 스님 한 사람, 바둑을 두는 두 사람, 그리고 주인까지”였다. 아울러 정자를 만드는 이유와 방법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 것은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음양을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남녀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가로와 세로의 보(步), 척(尺)을 말하는 것은 만물이 모나고 둥근 이치가 모든 형상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퀴를 네 개로 하는 것은 사계절을 나타낸 것이고 정자를 6척으로 한 것은 6기(六氣)를 나타낸 것이며, 두 개의 들보와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것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의 기둥이 되고자 하는 뜻이다.
이러한 뜻으로 지어진 누정은 충청도 남부 지역과 전라도 일대에 산재해 있는 모정(茅亭)과 비슷하다. 지금은 농촌 지역을 답사할 때 지리를 물어보려고 해도 마땅히 얘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주인구가 줄었지만 6, 70년대만 해도 농촌의 인구는 포화 상태였다. 봄철 모내기가 끝나고 날이 조금씩 더워지면 소주회사나 농약회사에서 배급한 부채 하나씩을 들고 모정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장기를 두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농사일이나 멀리 돈 벌러 나간 누구네 집 몇째 딸내미 얘기까지 서로 나누곤 했다. 이처럼 모정은 농경지를 배경으로 농민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은 절충형 정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자가 어느 때부터 생겨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사기』에는 “황제가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신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라거나,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가 백문루(白門樓)를 짓고, 범려(范蠡)가 구천(句踐)을 위하여 비익루(飛翼樓)를 세웠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전해오는 얘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 춘천의 소양강가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요루(二樂樓)가 있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유리왕이 즉위 3년(기원전 17년)에 계비인 화희와 치희를 별거시키기 위해 동서에 별궁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백제의 진사왕은 391년에 궁전을 중수하여 못을 판 뒤 그 곳에 산을 쌓는 대역사(大役事)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제의 문주왕은 부왕인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죽임을 당하자 왕위에 오른 바로 뒤에 공주로 남하하여 궁의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못을 판 다음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사비성에서 무왕이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조원(造園)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궁남지(宮南池)를 조성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삼국사기』권 27 「백제본기」에는 “의자왕 15년(655)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라는 기록도 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자는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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