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트
공허의 부름(The Call of the Void)
유명한 붉은 암소는 성경에 나오는 정화 의식의 핵심 요소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왜 순결과 부정함을 구분하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법이 필요한 것일까요?
유대인들 사이에는 정통파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뉴저지주 레이크우드 마을이 ‘이르 하코데쉬(עִיר הַקֹּדֶשׁ, ir hakodesh)’, 즉 거룩한 곳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곳은 특히나 그런 곳처럼 보였습니다.
마을 외곽에 사는 한 농부(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는 자신의 어린 암소 한 마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선명한 붉은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지역과 그 밖의 랍비들은 이것이 희귀하고 유명한 ‘파라 아두마(פָּרָה אֲדֻמָּה, parah adumah)’, 즉 붉은 암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농부에게 제안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한 사람은 그 암소를 100만 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로 판명된다면, 그는 그 암소를 이스라엘로 보내고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를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왜 이토록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일까요? ‘후카트(חֻקַּת, Chukat)’ 토라 구절의 서두에서 알 수 있듯이, 붉은 암소는 정화 과정의 기이한 핵심 요소입니다. 완벽하게 붉은 소의 재는 시신과 접촉한 후 성소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정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영국의 전 수석 랍비인 조나단 삭스 경은 왜 이 구절이 법적 세부 사항에 집중하는 토라 본문이 아니라, 사건으로 가득 찬 ‘민수기’의 중간쯤에 묻혀 있는지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 토라 본문의 이름에 있습니다. ‘후카트(חֻקַּת, Chukat)’는 ‘법규’를 뜻하는 ‘호크(חוֹק, chok)’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유대 법의 한 범주입니다. 그저 지시사항일 뿐입니다.
랍비 삭스는 붉은 암소가 종종 ‘호크’의 완벽한 예로 꼽힌다고 말합니다. 1세기의 요하난 벤 자카이 랍비의 제자들이 그에게 이 율법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의 목숨을 걸고 말하건대, 시체는 부정하게 하지 않으며 붉은 암소의 물도 정결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칙령을 내렸고, 법도를 제정했으니, 너희는 내 칙령을 어길 권한이 없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랍비 삭스는 랍비 요하난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철학자 존 롤스가 우리 시대에 제시한 바와 같이, 규칙에는 ‘규제적 규칙’과 ‘구성적 규칙’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으며, 이 둘은 뚜렷이 구분됩니다. 규제적 규칙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 규칙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규제합니다. 고용법이 생기기 전에도 고용주와 피고용자는 이미 존재했습니다. 먼저 관행이 존재하고, 그 후에 공정성, 정의 등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미쉬파트임(mishpatim)’이라 불리는 사회 법규은 이러한 유형에 속합니다.
반면 구성적 법은 관행을 창출합니다. 체스 규칙은 ‘체스’라는 게임을 만들어 냅니다. 규칙이 없으면 게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랍반 요하난은 정결의 법칙도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정결과 부정결은 질병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 법칙들은 의학과는 다릅니다. 질병은 치료사, 의사, 진단, 치료법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정결과 부정결은 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질문은 자명해 보입니다. 애초에 왜 이 순결과 부정함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 법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랍비 삭스는 다음과 같은 답을 제시합니다. “토라는 유대인의 의식 속에, 지금은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던 한 가지 사상을 심어주려 했습니다. ‘죽음은 부정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생명 속에 계신다. 죽음을 거룩함과 연관시키지 말라. 오히려 죽음과 접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접촉을 차단한다.’”
유대교는 그 핵심에서 생명 중심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행하도록 명령받은 선행, 즉 우리 이웃을 위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선행은 죽은 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답되지 않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합니다. 왜 시신 주위에 부정함을 규정하기까지 해야 했을까요? 시신을 만지는 것을 막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동으로 죽음을 숭배하게 되어 죽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이 구절의 다른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장인 ‘후카트(Chukat)’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쉐에게 말씀하셨다.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두어라. 뱀에게 물린 사람은 그것을 바라보면 살 것이다.”
모쉐가 놋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두었더니, 뱀에게 물린 사람은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았다.“
이 구절의 맥락은 무엇일까요? 앞선 구절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식량 공급에 대해 불평하며,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하쉠께서는 독사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독사에 물렸을 때의 치료법은 모쉐가 만든 놋뱀을 올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방법이 통했을까요? 가짜 뱀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진짜 뱀에 물린 신체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을까요? 20세기 미국의 초정통파 랍비인 라브 아비그도르 밀러에 따르면, 그 해답은 뱀이 ‘예쩨르 하라(יֵצֶר הַרַע)’—즉 악한 본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쩨르 하라는 뱀과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위협적입니다. 대개는 공격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많은 기적을 경험한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예쩨르 하라’가 작용한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피곤하거나 배고프거나 지루할 때 불평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밀러 랍비는 뱀을 바라보는 행위가, 이전까지 표면 아래에 숨어 있던 것을 드러나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었고, 그들이 자신의 예쩨르 하라(יֵצֶר הַרַע)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도록 도왔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며, 마치 붉은 암소의 재를 이용한 정화 의식과 같은 물리적 행위를 통해 죽음에 대한 생각과 유혹, 심지어 죽음의 낭만까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인들이 ‘l’appel du vide(라펠 두 비드)’, 즉 ‘공허의 부름’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것입니다.
우리는 ‘공허의 부름’에 저항해야 하며,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방어는 애초에 그 부름을 들을 만큼 공허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By Bethany Mandel (a columnist at the Jewish Daily For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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