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뉴욕시 잭슨 하이츠[7]
나는 콩국을 또 만들어서,이번에는 평일 아침 바쁠 때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으려고 설탕과 바닐라 향을 첨가했다. 진한 두유에 시리얼을 타서 먹으니 할머니가 콘플레이크를 하프앤드하프 크림에 타서 드시던 생각이 났다. 할머니 연세의 한국인들에게 유제품은 사치스럽고도 진기한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뉴욕시립대학 대학원으로 출근할 준비를 하면서, 달콤하게 만든 두유와 시리얼을 엄마에게 서둘러 차려드렸다.
나는 감옥에서 막 출소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회 이론과 감금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했는데,그날이 첫 강의였다. 나는 강의 계획서와 첫 수업 교재인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 발췌본 복사물을 비롯해 필요한 걸 다 챙겼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 강의를 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론 수업은 처음이라, 내가 가르칠 만큼 잘 알고 있는지, 또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비폭력 범죄로 수감되어 보낸 여성들이 의미 있다고 느끼도록 잘 가르칠 수 있을ㄹ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만한 게 있을까? 세상의 자유를 맘껏 누린 내가 감금이라는 주게에 관심을 가지는 배경은,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교화 시설'에 수용될 수도 있었던 엄마를 돌보는 경험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보았다.
엄마에겐 먹거리와 살 집을 기꺼이 내주는 아들딸이 있고,감옥 창살 안에서 살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물리적인 창살만 창살인 게 아니었다. 우리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심리적 감옥형으로 벌써 8년째 수감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감옥 벽과 교도관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켜야 할 규칙은 실재했다. 오키는 엄마가 갈 수 있는 곳,할 수 있는 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어 놓았다. 어쩌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하면, 엄마는 "역겨운 명령"에 따라 형편없는 음식만 먹어야 했다. 내 첫 세미나가 있던 날 아침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가방을 다 챙겨서 준비를 끝내놓고 나는 망고 맛 시리얼을 담은 그릇에 두유를 부었다., 한입 떠먹자마자 나는 역한 맛에 먹은 것을 뱉어냈다. 두유는 상해서 거품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싱크대에 그릇을 내려놓고 시리얼을 뱉어내고 엄마 방으로 뛰어갔다. 텔레비전이 켜저 있어 뉴욕 지역 채널에서 오늘의 뉴스가 끝나고 일기예보가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방 한가운데 소패에서 무릎을 구부린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엄마 두유가 상했던데!" 쟁반을 내려다보고 문 옆에 놓인 빈 그릇을 보자 가슴이 벌렁거렸다.. "제발, 이거 먹었다고 하지 마." 엄마는 대답은 않고 바닥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자고 이걸 먹었어?"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상했다고 왜 얘기 안했어? 아프면 어떡하려고!"
엄마는 날 본 척도 않았다,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바람에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엄마한테 상한 음식을 대접했고, 엄마는 그걸 다 먹었다. 내가 콩국 보관을 잘못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며칠을 두고 먹는 게 아니라 바로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는지도, 두유를 직접 만들어보는 게 처음이었던 나는 그게 이렇게 빨리 상할 줄 몰랐다.
엄마는 고개를 들지도 입을 열지도 않은 채 내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엄마 그릇을 부엌으로 가지고 나와 엉망진창이 된 싱크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눅눅해진 시리얼로 가득 찬 거름망을 들어올리자, 배수관에서 올라오는 생선 썩은 냄새가 얼굴을 정통으로 때려 구역질이 났다. 며칠 전 고등어를 구운 뒤로 생선 기름이 배수관에 껴서 계속 그 냄새가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