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마이클 슈어, <아티스트 웨이> - 줄리아 카메론
부제: 개념화한 예술과 감각화한 철학
240113 문예진
철학과 예술, 인생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학문들이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관심을 쏟는 일은 비효율적인 것 같다. 철학과 예술을 전혀 몰라도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고, 오히려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다. 되려 철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다. 끝도 답도 없는 질문들에 갇혀 매일 고민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철학과 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정답이 없는 질문의 답을 찾아헤매는 이유는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삶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평면적인 삶을 사는 것 이상의, 더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족한 삶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삶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철학'이라 하면 무언가 거창한 것을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임마누엘 칸트나, 소크라테스, 공자와 같은 대단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삶의 곳곳에서 철학과 결부된 선택들을 해야할 상황과 맞닥뜨리고, 그곳에서 내리는 결정은 곧 우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이미 철학자이며, 실전에서 우리의 사상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세간에 존재하는 명확한 이론들로 모순적이고 모호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면, 앞으로 더 선명한 이유와 확신을 가지고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철학, 특히 윤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가 그러했다. ‘나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티스트의 예술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가', ‘인권 보호를 위해 샀던 제품이 기후 보호에는 악영향을 준다면?’ 같은 사소한 문제들부터, ‘공리주의나 정언명령만으로 살아가면 확실히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종교적인 신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윤리적 문제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신이라는 전제 없이 사람들에게 내 윤리적 가치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등의 큼지막한 문제들까지. 그 모든 고민들이 나를 윤리학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이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사상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이야기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사상(원래도 좋아하던 사상이었다)을 다시 곱씹으며, 내가 언제나 도덕적인 사람은 될 수 없으리란 결론에 이르렀다. 책에서는 말한다. “도덕과 악덕 사이에도 중용이 존재한다.” 즉, 도덕이 존재하면 악덕 또한 존재해야 중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덕을 저지를 때 뻔뻔하라는 뜻은 아니다. 자신이 악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며 저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혹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악덕을 저지르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이타에는 이기가 선행해야 하며 이기와 이타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내 몸을 사랑한다’ 라는 전제가 있듯이 말이다. 나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곧 타인도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이기가 악덕에 속한다면, 이기와 이타 사이에서도 중용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예술은 어쩌면 철학보다 더 쓸모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중국의 철학자인 묵자는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비악(非樂)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은 사람과 삶을 알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향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 예술의 경험이란 작가와 향유자가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삶의 경험이다”(김겨울 작, <겨울의 언어> 중) 소설을 읽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며 우리는 사람을 배우고, 타인의 삶을 함께 살아내고, 그렇게 삶이란 것을 알아간다.
그런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바로 그 창조성에 대해 <아티스트 웨이>에서 다룬다. 사실, 이 책에서는 창조성을 어떻게 깨우는지에 집중된 책이다. 어찌 보면 자기계발서인 셈이다. 예술을 창작하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착각하는 대로 문란한 생활, 빈곤, 파괴적인 감정에서만 탄생하지는 않는다. 맑은 정신으로 자기 수양을 하고, 나를 위하며, 동시에 타인을 위한 예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지 않을까. <아티스트 웨이>에서도 창조성을 위해 그런 마음가짐을 중요시한다. 물론 그렇지 못했던 훌륭한 예술가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삶이 청렴하고 도덕적인 예술가를 사랑하는 편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나 윤동주 같은 사람들, 삶의 흔적에 있어서 부끄러움을 알고, 회개를 알고, 사랑과 용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부러 고통하기도 하며 인류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예술과 꼭 붙어있다. 그러한 마음은 사랑과 사람과 삶에 대한 깊은 관심과, 공들인 사유 없이 한순간에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내뱉으며 성장한다. 사유는 철학과 이웃하고, 사유를 내뱉는 것은 예술과 이웃한다. 결국, 예술의 창조성은 철학에 근간을 두기도 한다. 철학이 바로 윤리와, 인간과, 삶 같은 것들에 관심을 쏟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이 곧 철학으로 이어지고, 철학이 예술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예술은 감각화한 철학이고, 철학은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순환성은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든다. 단순히 먹고 사는 삶 이상의, 어떻게 더 좋은 삶을 살며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답이 되는 것이다. 물론 윤리 철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실패하고 고민하며 괴로운 날들도 많겠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가 더 인간답다 느끼고, 고양된 인격성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다시 시도하라. 그리고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