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75]온몸이 <시 詩 , 그 자체>인 어느 시인詩人
그리운 정치인을 그리는 추모시집은 두 권 본 적이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주인공으로 삼아 수 백 명의 시인들이 시를 써 모은 책이다. 정년퇴직하는 교수님들에게 제자나 동료들이 바치는 '논문봉정문집'도 많이 봤다. 그런데, 살아 있는 시인에게 바치는 문집은 과문의 소치일 것이나 처음 본 듯하고, 유례가 없는 일일 것같다. 『고은 선생 90세 헌정문집-그리움 너머 그가 있네』 (동쪽나라 2023년 7월 펴냄, 439쪽, 3만원)가 그것이다. 막역한 친구가 “당신한테나 필요하겠네”하며, 4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시인의 아내 이상화가 남편에게 바치는 헌시를 묶은 『고은과의 기쁨』이라는 시집과 함께 보내줬다. 정말 화들짝 반가웠다. 고마운 선물이다.
올해 초이던가, 인터넷에서 언뜻 고은高銀이 수 년 동안의 칩거생활을 떨치고 시집을 내며 문단에 복귀한다는 뉴스와 함께, 그에 따른 비난 일변도의 기사들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사건(미투)’에 대한 사과 한 마디 없는 게 올바른 태도인가,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가 아니냐는 등 문단에서도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출판사에서 판매를 보류했을까? 이 논란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낼 수 없는 나로서는 ‘강 건너 불구경’식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많이 답답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 생각이 떠오르면서 이 헌정문집을 읽기 시작했다.
발간위원회의 머리말 제목 ‘화택연화火宅蓮花 한 송이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고은 선생의 구순을 그냥 보내 허전한 이들이, 백 세를 바라보는 시인의 망백望百(1933년 전북 군산 산産)을 맞아, 타오르는 ‘화택火宅’속에서 오직 제 가슴으로 정련한 ‘연화蓮花’ 한 송이씩을 내어 소졸疏拙한 문집을 엮었다는 변이다. 이 입장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한마디로 “잘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다. 화택연화, ‘의당 그래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이 문집에 글을 써올린 이들의 진심이 느껴져서이다. 헌시를 쓰고, 그와의 인연과 추억을 그리는 그들의 ‘진실한 마음’에는 누구라도 이유가 어쨌든 ‘깜박 죽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이런 진심만큼은 왜곡되거나 비난받으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97)의 목소리를 녹취하여 정리한 글도 실려 있었다. 김수영은 일찍이 고은의 천재성에 주목하여 “열심히 공부해라. 장 주네(1910-1986: 실존주의파 프랑스 시인, 소설가, 극작가. 사르트르가 ‘장 주네 평전’을 썼다)를 넘어서라”고 야단치며 술 마시는 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백 세를 앞둔 그 할머니는 ‘미투사건’에 대해 “고은은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다/ 고은 같은 천재성 있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서 세속과는 다른 경지로 나는 본다. 고은을 미투에 가두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예전부터 시인의 기행奇行에 대해 들은 적 있지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문제는 ‘거대한 성城’으로 구축한 그의 문학文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문학을 넘어 그의 ‘사상思想’이라고까지 하겠다. 노벨문학상 수상여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절대기준일 이유는 전혀 없다. <만인보萬人譜>(창비 총 30권 발간, 주인공 5600여명. 25년에 걸쳐 쓴 ‘휴먼 다큐’연작시집이다)라는 거대 시집을 아시리라. 그분의 다른 소설, 시집 등을 차치하고, 일단 <만인보> 시집으로만 세계 문단에 우뚝 섰을 뿐 아니라 ‘시산詩山’이 있다면 진즉에 ‘시 산신령山神靈’이 되었을 것이라면 과찬일까? 아니다. 결코 과찬이 아니다. 그러니, 미당 서정주나 김동리나 김지하와 견주어 말하면 안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여러 찔質’이 있으나 ‘찔質적으로’ 다른 사람은 있게 마련인 것을.
‘시은詩恩’이라는 말은 조어造語일 터이나, 우리는 대부분 그로부터 ‘시적 은혜’를 받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일정부분 기름지게 해준 ‘고은 시의 수혜자’들이 아닌가. 윤동주의 <서시>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그러하듯, 국민 애창시 <그 꽃>(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본/그 꽃>을 비롯하여 가수들이 부른 <세노야> <작은 배> 등도 들어보았으리. 모두 그의 작품이다. 니힐리스트인 그는 70년대 들어서면서 마침내 ‘허무의 강’을 건너고, 우리의 말과 글을 살려내어 반짝반짝 빛을 냈으며, 마침내 민주투사도 되었던 것을. 미수米壽(88세) 그때쯤, 그는 얼마나 허허롭고 허무했을까?
아내시인은 그 언저리에 남편의 생일을 앞두고 <당신의 노을>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전략)당신의 노을이 실로/영광에 가득 찬 아름다움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그 아름답고 장대한 노을에/이해할 수 없는 일/노을은 잠시 사라진 듯 했습니다/놀라고 당황했습니다/파도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평생 거짓말은커녕/변명도 해명도 하지 않는 당신/묻지 않았습니다/침묵할 뿐이었습니다//오래잖아 그 노을/다시 빛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광채가 퍼지고 맑은 기운이 감돌며/어떤 불순물도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내 목숨 다하도록 단 하나 바라는 바/당신의 불타오르는 아름다운 노을이/오래오래 이어지는 것입니다”라는 시를 썼다. 아아-, 이제 알겠다. 그런 아내와 같이 익어가기에, 시인은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 그 뒤로는 아내가 다시 나를 낳았다”는 말을 했구나 싶었다.
이 문집을 읽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 하나 있다. 고은의 시가 해외에 번역이 제법 된 모양이라지만(아무리 번역을 잘 했다고 해도 그렇다), 어떻게 외국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고은의 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느냐이다. 세계 각 나라 28명이 망백의 고은을 위하여 시를 바쳤는데, 하나같이 상찬, 극찬의 언어로 가득 차있다. 고은을 위하여 조각, 채색드로잉, 동판화를 제작해 보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언어 밖의 언어는 서로 통하는 것일까? 하기야, 어느 소리꾼 명창에게 들었다. 외국에서 판소리 공연을 할 때, 심봉사가 딸을 붙잡고 눈을 뜨는 장면을 늘어놓으면 청중들이 뜻도 모르며 줄줄줄 운다는 것이다. 공연 끝난 후 무슨 내용이라고 알려주면 그 내용이 슬퍼서 더욱 더 운다고 한다. 아아- 위대한 세종대왕님이시여. 어쩌자고 이렇게 훌륭한 소리문자를 창제하셨단 말인가. 세계가 곧 하나가 될 듯하지 않은가.
아무튼, 대단하다. 그를 일러 문단의 거목, 시선, 시성 등 뭐라 하든 아그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편의적인 수식어에 불과할 터. 시인의 아내가 말했듯, 그의 영감靈感이 그리고 싱싱한 시적 감수성이 백 세까지 이어지기를 비는 마음이다. 끝으로 나해철 시인의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시를 부기한다.
“절벽 위에 핀 꽃 아름다워라//하늘하늘/구름과 바람이 벗하네//경계에 피어서 위태롭다고/누가 말하는가//이미 절벽 너머로/한 걸음 내딛어/허공 중에 찬란하네//자유롭고 맑은/꽃송이/그 향기 천지에 그윽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