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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고 틀어져만가는 역사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 몸부림은 유교의 교조주의에서는 이단으로, 신분차별제도에서는 평등으로, 문화에서는 파격으로, 정치에서는 반역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듯 허균이 살던 16세기말, 조선의 상황은 허균으로 하여금 반역의 기치를 들지 않을 수 없도록 급격히 모순에 모순을 더하고 있었다.
그가 죽음의 현장에서 말을 꺼내려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담았던 일을 생각하면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 '허균의 말은 나 자신을 통하여 뱉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몰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옳다고 여기지 만은 않는다. 또 허균이 취했던 방법이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최고와 최선보다 차선의 길이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최고와 최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할 뿐이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예언한 이율곡을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면서, 탁월한 국방정책, 병자호란의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 이 모든 것을 밝힌 허균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혁명을 모의하려다 반역의 사슬에 걸렸던 사실로 인하여 오늘까지도 허균을 역적의 괴수로 취급한다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길들여진 통치꾼과 기성세대의 허구성, 기만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되고 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각오와 역할은 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중을 섬기는 큰 뜻을 가슴에 품은 영원한 젊은이에 의해 다시금 쓰여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뒤로 미루어질 때 우리는 미래의 역사에 또다시 죄를 짓는 꼴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우리는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가?
어쩌면 역사적인 사실이 진실로 밝혀지면 오늘의 통치꾼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을 일시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가 숨기고 널리 드러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논리 정연하고 확고한 개혁사상이 사회개혁의 의지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그 실천은 비록 반역의 사슬에 걸리고 말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상식과 진실이 썩어 들어가는 오늘의 모순된 사회상을 개혁하게 하고, 민중의 숭고한 피를 먹고 당당히 자랐어야 할 민중혼 마저 꺽어버리는 오늘날의 병든 정치문화를 깊이 갈아엎어야 할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뛰어난 문장가로 한문에 밝았던 허균이 왜 다들 천대시하는 한글로 홍길동전을 써 그의 꿈을 나타냈을까?
천대받던 모든 민중을 사랑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가슴에서 태어난 율도국은 그저 꿈의 세계로만 치부될 수 없다.
우린 분명히 허균이 꾸던 꿈을 이어서 계속해 꾸어야 하고 꿈의 실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져버리지 않도록 각오를 단단히 하여 오늘의 삶을 보다 철저히 살지 않으면 안된다.
허균이 살았던 시대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였다.
이때는 조선 중기로 태평했던 시기는 지나가고 새로운 뒤틀림이 움트기 시작하던 때다.
지배지식층은 나태와 안일에 빠져 공리와 공담만 일삼으며 세월을 보냈고 급기야 개인 감정과 권력획득을 목표로 하는 훈구와 사림의 떳떳치 못한 대립으로 무오사화는 일어났고 잇달아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사회의 혼란상은 더욱 격심해져 백성은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었다. 또 난리가 끝난 후에도 국민정신을 가다듬기는 커녕 서얼금고를 더욱 강화하여 특권계급의 횡포는 점점 심해져 갔고 도처에는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탐관오리들만이 들끓었다.
사회상은 극도의 분열과 빈곤으로,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의 조정을 살펴보면 선조2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조정에서는 일본의 실정을 알아보려고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시찰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당쟁으로 인한 파벌싸움으로 일치될 수 없었으며 그것은 뻔한 일이었다.
막상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급히 책봉해야 할 필요를 느껴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태자로 삼았고, 여러 번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혼란한 때여서인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첫째 아들 임해군이 있었지만 세자로 삼지 않은 것은 그의 성질이 거칠어 인망이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조의 눈 밖에 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 33년 왕비(아들이 없었던)가 죽자 35년에 김재남의 딸을 왕비로 삼으니 영창대군이 태어나 유일한 적통이 된 셈이다.
왕권의 계승 문제는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선조는 전날에는 광해군을 좋아했는데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이 자라자 권력의 획득에만 눈이 어두운 간신배들은 선조를 축축거렸고 이에 선조도 은근히 영창 대군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이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갈등은 병중에 있던 선조가 졸지에 죽고 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는 일시에 무너졌다.
이에 실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를 저지르게 했다.
어릴 때의 총명이 난폭과 나약으로 변질되고 만 광해군의 등장은 조선 중기를 어떤 기대조차 가질 수 없도록 암흑기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대북에 눌려있던 서인 이귀·이괄·최명길·김자점에 의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게 되는 이 일은 역사에 인조반정으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얼금고로 얘기되는 신분차별은 그 폐가 심하여 재능이 있고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얼이라는 명목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펴 나라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결국 시세를 잘 타는 무리들만이 권력에 붙어 자기의 안일만을 구했던 것이다. 또한 천민은 천민대로 천대를 받았는데 1차 생산집단인 평민·천민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의병에 가담하여 나라를 지키려했던 것이다.
또 여자를 자신들의 노리개감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던 당시의 지배 지식층들은 한술 더 떠서 여자의 개가를 금지시켜 그들의 삶을 빼앗아 버리는 허위에 가득 찬 권위만을 내세우는 등 똑같이 부여받은 인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상은 유교의 교조주의, 즉 그 독단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사고의 영역까지 얽어매는 부끄러운 꼴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균은 고려 충열왕 때의 문신인 허공의 후손이다.
허공은 정직·청렴했으며 대원방면의 외교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전함을 건조하는 일에 여러 번 참여했으며 그럴 때마다 끝까지 그 책임을 다하는 성실성을 보이고 있다.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인 허종은 철저한 배불론자 였으며 허종의 동생인 허침은 연산군의 폭정에 앞장서서 반기를 든 의기에 찬 남아였다.
또 할아버지 허한은 그 당시의 이름있는 선비로써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고 있다.
이제 허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가족을 소개하면,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자·문장가·외교가·정치가라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바른 말을 잘 했으며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는데 모함으로 죽었던 조광조의 한맺힌 원한을 풀어줄 것을 청하고, 허자와 구수담의 무지를 주장하다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성리학에 밝았던 그는 학문계통이 다른 이퇴계의 칭찬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허엽은 전처에서 난 딸과 허성, 후처에서 난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는데 허균의 나이 열두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 김씨는 김광철의 딸로서 일찍이 남편을 잃고 이어 아들 봉과 딸 난설헌, 며느리(허균의 처)를 잃은 후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단 한 많은 이 땅의 어머니였다.
허균의 큰 누이는 우성전의 아내가 되었으며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우성전은 퇴계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임진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또 큰형인 허성은 유희촌의 문인으로 아버지와 비슷한 성품을 지닌 그는 문장가·외교관·정치가로 활약한 당대의 이름난 선비였다.
특히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그들이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는 동인인 김성일의 주장에 반박하고 일본의 침략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서인인 황윤길의 주장에 같은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파를 초월해 있음을 보여준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선조가 죽을 때 어린 영창대군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믿음이 두터운 선비였다.
작은 형 허봉은 허성과 같이 유희촌의 문인으로 박희립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후 동인의 우두머리로 활약하였으며 박근원과 함께 병조판서 이율곡이 이론만 내세우고 군정을 게을리한다고 탄핵하다 도리어 유배를 당하였다.
그후 이조판서가 된 이율곡의 아량을 기대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홍문관 동기생인 유성룡의 수고도 헛일이었다.
나중에 영의정 노수신의 노력으로 삼년만에 풀려나 벼슬이 주어졌지만 이미 그의 가슴은 사나이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배지식층의 흐름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유랑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지만 큰 가슴을 펴지도 못한 채 금강산에서 서른 여덟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이러한 허봉의 됨됨은 이익의 성호사설 유선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작은 누이 허난설헌은 허균과 같이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일곱 살때부터 훌륭하게 시를 지었다고 하니 신동으로 소문이 날만 했다.
남편 김성립이 술과 여자에 빠지고 아내에게 열등감을 갖는 등 의좋은 부부로서의 생활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언제나 고독 속에서 한 많은 청춘을 노래할 뿐이었는데 아깝게도 스물 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허균의 나이 스무살에 형 허봉을, 스무 한 살에 누이 허난설헌을 잃은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허균은 형 허봉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누이 허난설헌에게서는 핏줄의 뜨거움을 체험했던 것이다.
한 인물이 성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정이 미치는 영향은 가장 바탕이 되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사고의 틀은 이때 이미 그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허균은 작은 형 허봉과 작은 누이 헌난설헌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허봉을 통하여 손곡 이달의 문하에서 누이 허난설헌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사명당도 만나게 되어 불교에 눈뜨기 시작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많은 인물들을 접하게 되었다.
또 열 다섯 살 때누구보다 허균을 이해하고 아껴주던 형 허봉이 귀양을 가게 되어 허균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던 것이다.
귀양을 간 형이 보내준 여러 편의 시를 읽고 허봉과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형 허봉의 마음은 방랑의 길을 택하여 또 다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산에 있는 형을 찾아가 삶과 시대와 역사를 얘기하고 학문의 바른 자리를 논하기도 했다.
형 허봉은 불만스러운 현실에 저항하면서 사나이로서의 기개와 포부를 펴지도 못한 채 응어리진 가슴을 지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형 허봉의 죽음을 지켜본 허균의 가슴에는 불같은 사회개혁의 의지가 싹트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기존의 질서, 기존의 학문, 기존의 사고, 기존의 틀에 대항하여 반의식 사상은 자리를 잡아갔던 것이다. 허균의 삶을 투영해 보노라면 이러한 사상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얘기를 했지만 시집을 간 누이 난설헌의 삶을 지켜 본 허균은 형에게서 느낀 것과는 또 다른 사회의 모순과 질곡에 반의식을 갖게 되었고 남존여비로 얘기되는 사회신분 차별에 강한 반발을 느끼에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물론 다음 장에서 얘기 될 스승 손곡 이달에게서 영향을 받아 서얼금고의 악폐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나게 된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과 같이 서류 출신 시인 손곡 이달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시뿐만이 아니라 문학·인생·역사를 깨우쳤고 그 영역을 넓혀갔다.
손곡은 원주 사람으로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지만 서류에게 벼슬길이 막혀 있음을 알고 술과 방랑으로 저려오는 가슴을 달래며 살아갔던 것이다.
불행한 손곡 이달의 삶은 허균으로 하여금 서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했고, 개혁의 의지를 다지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제 허균이 가까이 한 사람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려고 한다.
유희경은 천민출신의 시인으로 특히 상례에 밝았음.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나라를 도왔고 광해군 때는 이이첨으로부터 인목대비의 폐비상소를 부탁 받았으나 거절하고 절교했다고 한다.
이정은 평민출신의 화가로 옳지 않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사람으로 어느 날 재상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두 마리 소가 재물을 가득히 싣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그림을 그려주어 눈이 어두운 재상을 통렬히 꾸짖었다고 함.
이징은 이정과 같은 평민출신의 화가. 권필, 이안눌, 이재영, 조위헌, 허적. 이들은 전 오자로 불리며 기윤헌, 임숙영, 정응운, 조찬한 등 이들은 후 오자로 불린다.
이들은 모두 모순된 세상을 한탄하고 썩은 권력과는 끝까지 타협을 거부한 당당한 선비들이었다.
이들 중 권필은 광해군 초에 이이첨이 사귀기를 원했으나 가까이 하지 않았고,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이 날뛰는 꼴이 더러워 궁유시를 지어 비웃음을 던진 것이 광해군에게 알려져 심한 폭력을 당했고, 이어 귀양을 가던 중 귀양길에서 말술을 청하여 마시고 죽었다고 전함.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김경손, 박응서.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서얼금고를 없애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된 후 혁명을 모의하였고, 혁명에 쓰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문경새재에서 은상을 털다 잡히어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고 죽음.
특히 서양갑은 동지들에게 남아가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죽는다 해도 이름은 크게 남을 것이라고 하여 이들의 기개를 짐작할 수 있다.
정협은 칠서들의 거사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 현응민, 김윤황, 김개, 하인준, 우경방, 김우성, 황정필. 이들은 허균과 같이 혁명을 계획하다 남대문격문사건으로 발각되어 허균과 같이 죽음.
이재영, 이사호.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허균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냈으며 심우영과 같이 거사에 가담했음. 해안, 옥준, 송운, 서산, 사명대사. 이들은 중으로 해안은 허균과 동갑이고 사주가 같았으며 허균과 한 열흘을 같이 지내다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해안을 산으로 보내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써 서운한 마음을 달랠 정도로 가까웠다.
서산, 사명대사도 허균과 특별히 친했는데 서산대사가 죽자 제자들이 대사의 비문과 문집서문을 부탁할 정도였고, 사명대사의 비문과 문집발문도 허균이 지었다.
계생, 무옥, 추섬. 계생은 기생출신의 여류시인이요,
무옥은 기생출신의 여류작가로 원부사를 지었음. 추섬은 허균의 첩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허균과 같이 죽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균이 가까이 한 사람들은 불우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대부분 평민이나 천민으로 그들과 같이 어울려 슬퍼하고, 기뻐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 계급 질서에서 생각할 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허균은 이미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한없이 낮은 민중의 자리로 내려와 있었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회개혁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허균이 한 공부
1) 유학
유교라는 큰 흐름이 사회를 감싸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유교집안에서 자란 허균은 성소부부고의 학론에서 다음과 같이 유교에 대한 자신의 학문 태도를 밝히고 있다.
"옛날에 학문(유학)하던 사람은 자기 몸만 착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개 이치를 깊이 공부해서 온 천하의 변고에 대응하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기만을 위한 학문에서 이웃을 위한 학문의 길로 그 방향을 바르게 잡고 있다.
즉 자신의 안일과 영달만을 일삼던 상시 유학자들의 학문관을 부정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그 비리를 바로잡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학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는 유교의 교조성으로 지적되는 독단에 빠져 있었던 만큼 바른 유학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유학을 닦아야만 양반계급으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이 주어진 셈이고 나아가 벼슬을 하여 지배층으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학 이외의 어떠한 학문도 정통학문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으며 유학 중에서도 공·맹과 정·주의 학설만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학과 도학을 한 사람은 물론 유학 중에서도 정통이라 일컫는 것 이 외의 유학을 하면 이단으로 사회에서 격리되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독단은 오늘날 이름이 드높게 알려진 이황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양명이 감히 방자하게 우리 주자를 배척하고 함부로 그럴 듯한 여러 말을 인용하여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사회전체가 독단적인 지배 지식계급의 논리에 빠져 있고, 특히 학문의 폐쇄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사회 지배계급의 학문에 대한 독단과 폐쇄성은 장유의 계곡만필에서도 다음과 같이 그대로 지적되고 있다.
"중국의 학술에는 여러 갈래가 있어서…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알고 모르고를 따질 것 없이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사람은 장·주만 욀 줄 알았지 다른 학문이 있은 줄은 모른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로 말미암아 허균의 학문관은 이이화에 의하여 독특하게 평가되고 있다.
이이화는
"허균은 유학도이기는 하나 정통유학도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되었으나 유학만의 그의 연구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고 하였다.
여기서 정통유학도가 아니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며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통 유학도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
특히 당시의 사회적 폐쇄성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반 유교적인 행동과 학문태도는 놀라운 것이고, 필연적인 귀결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유학도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갔으며 그의 본래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에 의하여 본질로의 회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을 뿐이다.
2) 불학
작은 형 허봉의 영향으로 불교에 접하게 된 이후 그는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인하여 더욱 깊이 불학에 뛰어든 것으로 여져진다.
그가 처음 불교도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삼척부사였을 때로 사헌부에서 도교에 열중하고 있던 곽재우와 함께 불교에 열중하고있던 허균을 벼슬에서 몰아 내려고 여러 번 상소를 올렸던 바로 그때였다. 물론 이 지탄은 당시 사회전체에 흐르고 있던 유교의 교조성과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여기서 상대편이 올린 상소문을 깊이 헤아려 봄으로써 허균이 간직하고 있던 불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얼마나 컸었나를 엿볼 수 있다.
"허균의 아비는 힘써서 우리의 도를 배우고 이단을 배척하여 선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문장을 좋아하고 학문을 하는 자 누군들 이단의 글을 읽어서 보고 들음이 없지 않습니다만 허균이 불경을 외는 것은 이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식경을 외고. 작은 부처를 늘 곁에 두고 새벽에는 꼭꼭 절하며 먹물 옷을 걸치고 염주를 들고서 절하고 염불하면서 스스로 부처를 받드는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니 꼭 덧붙여 전할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구차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하나 관계되는 일은 가볍지 않으니 지금 선비의 이런 버릇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급히 벼슬자리에서 쫓아내소서"
결국 삼척부사에서 쫓겨난 허균은 벗 최분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제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음에는 조금도 걸림이 없습니다......불경을 읽지 않았더라면 거의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늘 말하였습니다.
거듭 연구하여 그 숨은 뜻을 살펴보니 심정이 저절로 밝혀져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하였습니다. 그때에 내가 배운 정자나 주자의 학설을 조금 취하여 그들의 학설 중에서 심성에 관해 그 같고 다른 점을 견주어 참과 거짓을 헤아려서 분석하고 논증하였더니 자못 저절로 얻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글을 지어 그 뜻을 밝혔는데 부처를 믿었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듯합니다. 제가 오늘날 미움을 받아서 여러 번 명예를 더럽혔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한 점의 동요도 없습니다.
어찌 그것으로 즐겨 내 정신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허균이 불교에 둔 관심은 상당히 깊었으며 관심의 대상으로만이 아닌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능가경을 읽은 후 송운대사에게 출판하여 착한 인연을 짓도록 권고한 사실과 또 해안과 자신은 같은 석가모니의 무리라고 할 정도로 모두가 대자대비를 생명으로 여기는 석가의 무리임을 밝힌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허균은 위로는 유학을 높여서 선비의 습속을 밝게 하면서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은 다 같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불교를 접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라는 전제 위에서 접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3) 도학
허균의 도학에 대한 태도는 불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해서 더욱 깊이 도학에 접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어릴 때는 그냥 읽었으나 성장함에 따라 도의 깊이를 체득하게 되었으며 그 큰 도를 논한 것에 이르러서는 현묘하고도 어지럽게 얽혀서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주역과 중용에서는 밝히지 못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그의 도학에 대한 깊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민중의 생활 속에 그대로 배어 있던 신비적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도가에서 행하고 있는 방술은 노자의 상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허균은
"다른 사물에 견주어 죽고 사는 것도 한결같고, 얻고 잃는 것도 매한가지라는 뜻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은 귀중한 갈파“
라고 하면서
"욕심없음과 맑고 고요함, 부귀와 침묵은 불교와 같다“
라고 하여 불교에서 느꼈던 그윽한 깊이를 도교에서도 꼭 같이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선사상은 허균에게 있어 천상보다는 이 현실에서 신선의 땅을 이룩하는 데로 발전되고 있음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 현실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지는 현실 개혁사상은 그 뿌리가 여기도 있는 것이다. 손곡 이달과 형·누나의 삶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싹이 튼 현실개혁사상은 그가 유학·불교·도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점차로 증폭되었고 하나하나 구체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4) 천주학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허균으로 얘기되고 있다. 우선 유몽인의 어유야담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동남쪽의 여러 오랑캐들에게는 이미 행하여져서…… 우리나라만이 알지 못하였는데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이십장을 얻어가지고 왔다."
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정복은 천학고에서,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허균이 천주교를 맨 처음 소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믿고 따랐다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허균이 맨 처음으로 천주교의 책을 가지고 왔고 또 신앙인으로서 천주교를 믿고 따랐다면 앞서 지적했듯이 불교와 도교를 접할 때와 마찬가지의 자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즉 학문적 탐구열과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해서 새로운 세계로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리라.
특히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하여 남존여비의 차별적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도 남자와 같은 동등한 사람의 자리까지 끌어올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이 천주교의 평등과 박애정신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물론 그는 보다 완전한 남녀평등으로까지 삶을 끌어올렸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고답적인 유교질서의 폐단으로 억압받고 있던 여자의 삶을 아꼈던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허균은 민간신앙 자체에도 경멸보다는 깊은 관심을 갖고 인정하는 자리에서 결국 하늘을 공경하는 길은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는데 있고 또 사람다운 도리를 다한다면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보다 사람 중심으로, 사람을 바탕으로 하는 즉 사람이 하늘이라는 우리 민족의 뿌리정신인 단군생각에도 깊이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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