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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어르신 사찰로 보낼 순 없잖아요!” | ||||||||||||
양양의 작은 어촌교회 … “요양원 건립으로 지역노인 돌보며 예수 향기 전하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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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목사가 도시 목회를 접고 어촌지역인 양양군 남애리에 들어오게 된 것은 지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와 형님이 목사인 감리교 목회자 가정이기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지만,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도시에서 개척을 해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곳으로 임지를 옮기게 됐고, 적지 않은 고민을 하게 됐다. 도시목회와 어촌지역 목회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농촌지역과 같이 어촌지역인 이곳에서 부임 후에 교인들이 줄어가는 모습을 보며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렇게 5년 정도 마음을 잡지 못한채 목회를 해오고 있었다. 허탈감이 밀려오는데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단다. 그러던 중 우연히 홀로된 노인의 집을 방문하게 됐다. 혼자 사는 노인은 방안을 기어 다니며 생활했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를 음식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모습은 김 목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근지역에 위치한 유명사찰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에라도 들어가게 하면 좋겠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을 절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모시기란 목사로서 차마 힘든 결정이었다. 양양지역은 불교의 강세로 알게 모르게 교인들 가운데서도 절에서 운영하는 시설을 보며 부러워 하기도 한단다. 또한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힘이 있어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김 목사는 고민에 빠졌다. 요양원은 양로원과 달리 노인성질환 1,2,3급의 중증질환자와 치매 환자까지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김진 목사는 요양원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런 과정가운데에서 교인들의 헌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로들은 땅과 집을 담보로 제공했고, 무엇보다 교인들의 헌금은 귀하기만 했다. 물론 아픔도 있었다. 교인들 가운데 몇 가정은 떠나기도 하고 금전적인 문제로 오해하기도 했단다. 이렇게 시작한 일은 지난 2008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설치운영승인과 건축허가를 받게 되었고 같은 해 6월 기공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순로좁게 진행 될 것만 같았던 건축에 먹구름이 끼었다. 갑자기 건축단가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국고 보조비로는 430평의 요양원 건물을 짓는 것은 불가능 할 정도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 하던 김진 목사는 기도했고, 다행스럽게도 지난 2009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현 건축회사를 만나게 돼 지금은 건축 마무리 단계에 이르게 됐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정말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김진 목사는 고백했다. 그러던 중 김영학 목사가 사회복지주일예배를 드리고 공사장에 먼저 가 기도회 준비를 해 놓겠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소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가해자는 동네 사람이었다. 이 일을 겪으며 가해자가 진심을 몰라줘 마음에 많은 상처도 입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가해자를 용서할 마음을 주셨고, 조의금 전액을 요양원 건축헌금으로 드리도록 하셨다. 사건이 수습되고 마을 사람을 교회에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며 마을을 마음에 품는 일을 시작했다. 어촌은 미신과 고유의 풍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한 명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할 수 없다. ‘사회복지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복지재단 노인전문요양원 성산사랑마을’이 문을 열면 본격적으로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한다는 것이 김 목사의 계획이다. 이제 곧 더 많은 사람을 섬겨야 하는 김 목사는 기도제목으로 ▲공사가 안전하게 마무리 되게 ▲첫 마음이 변치 않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세 가지 내용을 내 놓았다.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께서 꿈을 멋지게 이루어 주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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