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깸과 동시에 욕설이 튀어나온다. 눈을 뜨지도 못할 만큼 지독한 두통이 머리통을 쪼개버린다. 헉, 들이킨 숨을 꾹 참고 인상을 찌뿌렸다. 후우... 긴 숨을 내쉬니 술냄새가 화악 코로 들이켜진다. 지난 밤의 쿵쿵 울리던 음악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깔깔대던 기지배들의 웃음소리와 술에 취해 떠들어대던 새끼들이 잡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난 귓가에 맴돌며 여전히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와는 달리 내가 누워있는 곳이 유난히도 조용하단 걸 깨달았다. 안 떠지는 눈을 가늘게 뜸과 동시에 귓가에 맴돌던 소리들이 사라진다. 동시에 지나치게 조용한 무음(無音)이 들려온다.
여긴 어디야. 두리번 거리며 몸을 일으키니 이미 쪼개진 머리가 또 빠지직 갈라진다. 씹.. 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꽉 감았던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결코 넓지 않은, 내 방보다도 작은 거실에 온화한 베이지 톤의 벽지가 발라져 있다. 장식장 위에 놓여진 평면 TV와 미니 오디오, 내가 누워있는 연한 갈색의 페브릭 소파와 유리 탁자, 젖혀져있는 진주색 커튼. 열려있는 커튼 사이 커다란 유리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아프게 한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난 와 본 기억이 없는 것을 둘러보다 인상을 찌뿌렸다. 역시 이런 일에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어쨌거나 아는 놈 집이니까 있겠지.
난 내게 덮혀진 이불을 제치며 누워있던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내가 벗었는지, 날 데리고 온 누군가가 벗겼는지 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뻘겋고 퍼렇게, 여기저기 울긋불긋하게 나있는 멍든 자욱들과 크고 작은 상처들. 이건 또 뭐야? 상처 위엔 약이 발라져 있거나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아, 시큼하던 냄새가 파스 냄새였군.
이 상처들이 언제 생긴 것들인지 떠올리려하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새끼들. 내 눈에 띠면 죽었어.
소파에서 일어나자 다리가 휘청인다. 얼른 벽을 짚었다.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다.
난 숨을 크게 들이키며 눈을 감았다. 이마가 유난히도 아프다 싶어 손을 댔더니 끈적한 것이 묻어난다. 인상을 쓰며 손에 묻어난 것을 보니 연고인 듯 싶다.
아. 그 새끼들. 씹.
난 집을 잠시 두리번 거리다 방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었다. 침대가 놓여져 있는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하나의 방문을 열었다. 옷방인 듯 옷이 반절이 차 있는 방에도 아무도 없다.
목이 바짝 타들어가 주방으로 보이는 곳을 두리번 거리니 식탁 위에 놓인 두 개의 생수통이 보인다.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마시니 입가로 물이 흘러내린다. 손으로 쓰윽 닦고 집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생수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누워있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옷방에 가득한 여자옷들을 보니 여자 집인 것 같다. 얼핏 본 옷들이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고. 어떤 기지밴지 기지배를 따라온 것 같다. 따라 왔는지, 그 기지배가 날 끌고 왔는지 역시 기억에 없다. 내가 아는 기지밴지, 모르는 기지밴지도. 어제 그 기지배를 뻑이 가게 죽여놨는지, 눈 앞에 떡처럼 그 기지배 앞에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는지도.
쿡쿡 쑤셔오는 두통에 소파에 털썩 누웠다. 잠시 학교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니 1시 20분. 어제밤 그 곳에서 나온지 12시간 가량이 흘렀지만 내겐 그 12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잃어버린 시간.
눈을 감으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다시 술 냄새가 풍겨나온다. 팔을 이마 위로 올리다 건드려진 이마의 상처에 욕설이 새어나온다.
"팔자가 늘어졌네. 야."
난 내 잠을 깨우며 날 흔드는 누군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딱 붙은 눈을 뜨니 좀 전 일어났을 때보단 덜한 두통이 머리를 두드린다. 가늘게 뜬 눈에 웬 여자가 보인다. 저 여자의 집인가 보군.
정신 없는 와중에도 얼굴을 따지긴 했나보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에 몸매도 괜찮다. 다만. 내가 저런 나이 많은 여자를 따라 왔다는 게 의외긴 하지만.
난 여자를 흘낏 보곤 목의 힘을 풀어 고개를 털썩 떨궜다.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다.
"야, 자려면 너네 집 가서 자."
이 여자가. 난 내 등을 발로 쿡쿡 쑤시는 여자에게 화를 내려다 참으며 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면 잠이 깰 테니까.
"씨끄러우니까 닥쳐."
난 좀 더 자야겠..
-퍼억!
갑자기 내 등을 후려차는 여자의 발길질에 눈이 번쩍 떠진다. 이게 미쳤나!
"야!"
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팔짱을 끼고 날 내려다보며 서있는 여자가 보인다. 놀랐는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보며 굳어있다. 싶은 여자의 미간이 확 일그러짐과 동시에 여자의 발이 치켜올라간다.
-퍼억!
"야. 술이 덜 깼냐?"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여자가 별안간 내 어깨를 걷어찬다. 난 반사적으로 맞은 어깨를 감싸잡고 날 걷어찬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를 보는 내 눈에 얼이 빠진다. 그거야 아직 여자한테 이렇게 맞아 본 적은 없거든. 또 내가 맞아야할 이유도 모르겠고.
"길가에 쓰러져 있던 놈 데려와서 약 발라주고 재워줬더니, 뭐? 닥쳐?"
-퍼억!
이 여자가, 정말! 진짜 미쳤나!
난 여자가 후려친 뒤통수로 손을 가져갔다. 황당하고 기가막히니 눈만 둥그렇게 떠질 뿐 말문이 터억 막힌다.
"이 자식아. 고등 학생이면 고등 학생 답게 열공이나 할 것이지, 술 처먹고 쌈질하다 길에 퍼져 잠이 오냐?"
"열공? 참나. 노땅 아니랄까봐. 누가 요즘 그딴 말을 쓴다고."
"이게 누구보고 노땅이래!"
-퍼억!
얼씨구?
난 여자에게 맞은 뒤통수를 만질 생각도 못하고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야! 너 미쳤어?"
"너 나 아니?"
이건 또 뭐야. 눈을 크게 뜨고 미친년처럼 겁도 없이 날 때려대던 여자가 갑자기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눈까지 깜빡거리며.
하! 기가 막혀서. 뭐, 이딴 여자가 다 있어!
"야! 아줌마!
너 정신 나갔어?"
"뭐어? 아줌마?"
"에이 씹. 내가 지금 졸립거든? 좋게 말로 할 때 꺼.."
- 화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끌어당겨 어깨를 덮는 이불이 내 손안에서 홱 빠져 나간다.
"야!!"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불을 확 끌어당겨 뺏어낸 여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
-퍼억!
"이 자식이 뭐가 어째? 아줌마?"
"에이씨, 너 정말 뭐야!"
-퍼억!
이게 진짜!
난 이미 헝클어져 있지만 여자에게 맞아 더욱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질 생각도 없이 화가 치민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야!!"
"이 자식이 은혜도 모르고 뭐?"
날 아는 여잔지 아닌지 또 손이 치켜올라간다. 겁도 없이 날 쳐? 이게!
난 날 향해 휘익 내려오는 여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힘으론 남자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여자를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머리채라도 잡고 경고라도 뱉어줄 요량으로.
어? 뭐야!
- 콰당탕탕.
- 우당탕.
얼굴이 거실 바닥에 짓이겨진다.
-퍼억!
여자의 손바닥이 뒷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아직 술이 덜 깼나.
"이 자식 이거 웃긴 놈이네? 어쭈? 물에 빠져 놓은 놈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냐.
적반하장. 엉?"
-퍼억!
"이 자식아. 여긴 내 집이란 말이다. 즉, 니가 바짝 기어야 되는 곳이다~, 이 말씀이야~!"
난 여자에게 뒤통수를 연신 맞아가며 황당함에 커진 눈을 굴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히 내가 여자를 확 끌어당겼는데 어떻게 내가 이 여자 밑에 깔려서 뒤통수를 맞아야 하는지. 내가 여자의 손목을 낚아챔과 동시에 여자가 그 반동으로 날 밀쳐 소파에서 떨어뜨림과 동시에 내게 잡혔던 팔목을 휘돌려 되려 내 팔을 꺽어 등에 올려 붙였다. 그리고 날 바닥에 깔고 내 등에 올라탄게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씨, 야! 아아악!"
몸을 돌리려 힘을 줌과 동시에 꺽어진 팔이 더욱 뒤틀린다. 내 등에 올라탄 여자는 도대체 뭐하는 여잔지 약한 관절을 잘도 찾아 비틀어대며 또 뒤통수를 때린다.
"이 자식이. 고등학생 주제에 겁도 없이."
"너 뭐야. 뭐 하는 여자야!"
"어머~? 몰라서 묻는 거야?"
여자가 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야. 아는 여잔가?
난 여자에게 깔려 팔이 꺾인 채로 인상을 찌뿌렸다. 과히 미쳤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은 저런 성격을 갖고있는 여자를 내가 알던가,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기억에 없는 여자다.
"아잉~ 몰라, 몰라~
우린 밤을 함께 보낸 사이잖아~ 기억 안 나~?"
"뭐?"
하! 기가 막혀서. 내가 저런 정신나간 여자 하고?
"내가. 너랑 같이 잤다고?"
"응."
여자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뭐야, 이 여자. 완전 이중성격 아냐? 금세 웃었다가 화냈다가.
"웃기고 있네."
난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취해있었다고하지만 저런 정신 나간 여자하고 잤다니, 내가 확실히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럼~ 같이 잤지."
여자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인다. 오른쪽 눈을 가늘게 뜨는 여자의 날 보는 눈이 가늘어진다. 여자의 오른쪽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픽 웃는다.
"난 내방에서, 넌 거실에서.
내가 누군가한테 짓밟혀 길에 쓰러져 있는 놈 데려다가 재워줬지. 꽤나 무거웠어."
"누가 재워달라 그랬어?"
"말이 참 짧구나, 박이운."
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여자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당황함이 스쳐지나간 내 눈을 본 여자가 가소롭단 표정으로 픽 하고 웃는다.
"니 지갑 좀 실례했다. 어쨌거나 어떤 놈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한태고등학교 학생이더만? 고 3 주제에 술퍼마시고 길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박이운 군.
나한테 가슴 깊숙히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걸 이제 알겠지?"
아마 이게 이 여자의 본성일 듯 싶다. 어이 없는 눈으로 여자를 보는 내게 냉소밖에 남지 않은 오른쪽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지금까지 날 놀렸음이 확실한, 장난기 가신 싸늘한 눈으로 날보고 픽 웃은 여자가 일어선다.
"너 줄 술은 없으니까 곱게 집에 가라~"
저거, 진짜 뭐하는 여자야? 잘 자다 말고 한바탕 소나기 같은 일은 겪은 난 일그러진 얼굴로 여자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여자는 직장에서 지금 돌아왔는지 입고 있던 트렌치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혹시 내가 아는 여자가 아닌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부치며 걷는 여자를 보며 다시 한 번 곰곰히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직장인인 것 같으니 못해도 나이는 24, 5살은 됐겠고, 170cm의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진 머리칼. 늘씬하게 쭉 뻗은 몸매에 까칠한 성깔. 혹시 친척 중에 저런 여자가 있던가? 아니면 클럽에서 놀다 스친 여자? 난 소파에서 굴러 떨어진 채 바닥에 누워 주방에서 냉장고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여자를 보며 눈썹을 찌뿌렸다. 냉장고 문을 잡고 안을 들여다보는 여자의 숙인 허리의 굴곡이 제법 볼륨감 있는 힙에서 치마 밑으로 드러난 종아리로 늘씬하게 쭉 뻗어 떨어진다. 흐음. 제법인데?
"냉장고를 한강에 갖다 처박아 버리든지 해야지, 원. 여기가 균배양 연구실이라도 돼?
어후~ 곰팡이 냄새. 썩네, 썩어. 쓰레기통이 더 깨끗하겠다."
코를 막고 있는지 냉장고 안의 무언가를 달그락 거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던 여자가 냉장고에 밖고있던 얼굴을 빼내며 얼굴을 잔뜩 찌뿌린다. 무엇도 꺼내지 않고 냉장고문을 쾅 닫는다. 그러더니 코 앞에 부채질을 해대며 부엌을 휘휘 둘러본다.
말을 말아야지. 아.. 머리야.
난 아직 가시지 않은 두통에 인상을 찌뿌렸다. 관자놀이를 꾸욱 눌러보아도 취기가 가신 빈자리에 몰려드는 두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꼴같지도 않은 난리를 겪었으니. 저걸 확.
난 지금이라도 저 여자의 머리채를 소파에 처밖아 버리고 싶은 것을 애써 이성을 찾아 참으며 일어나 거실을 둘러보곤 내가 덮고 자던 이불을 허리춤에 둘러 감았다. 옷을 입을래도 내 옷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신 입을 만한 옷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어기적 거리며 걸어 주방으로 들어서니 제 입술을 톡톡 치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던 여자가 날 돌아본다. 난 날 보는 여자를 쳐다도 안 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목이 마르다. 생수가 아닌 술이 마시고 싶다. 맥주든 소주든.
"야, 잠깐!"
냉장고를 염과 동시에 화들짝 놀란 여자가 두 손을 뻗는다. 일그러진 얼굴이 여자에게 돌아감과 동시에 화악 풍겨오는 냄새란..
"우윽. 이게 무슨 냄새야."
"거 봐, 내가 열지 말랬잖아."
여자가 잽싸게 한 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썩어가는 시궁창 냄새 비슷한 정체 모를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와 냉장고 사이를 가로막아 선다. 멋적은 표정으로 실쭉 웃는 여자 뒤로 얼핏 파랗다 못해 까맣게 곰팡이가 피어난 식빵 한 봉지, 하얀 솜털로 가득히 덮힌 버섯인 듯한 것이 두어 봉지, 무어라 색깔을 단정짓기 모호한 울긋불긋한 몇 개의 반창통들.
혹시나 맥주라도 있을까 싶어 훑어본 문짝에 파란 음료수통이 하나 보인다. 제주 감귤? 그런데 왜 파란.. 썩을. 오렌지 쥬스 페트병이 파란 곰팡이에 뒤덮여있다.
"무, 물? 물 찾아? 물 저기 식탁 위에 있는데. 그, 그리고 아까 보니 거실 탁자 위에도 있더라. 하하.
이 문은 닫자."
여자가 잽싸게 내가 잡고 있던 냉장고 문을 닫고 여전히 코를 잡고 있는 날 보며 씨익 웃는다.
도대체 무슨 여자가! 보다보다 이런 여자는 처음이다. 절로 눈이 꾸욱 감긴다. 화를 낼 어이도 없다. 그저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옴과 동시에 한숨이 나올 뿐이다.
"화생방 훈련하냐."
"화생방? 아하하, 화생방은 무슨, 얘는."
내 팔을 툭치며 어색하게도 웃던 여자가 말끝을 흐린다.
"배, 배고프지? 밥 먹자, 밥.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얼른 차려줄게."
나가랄 땐 언제고 꼴에 지도 여자라고 썩어가는 냉장고가 부끄럽긴 한가보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아하하."
어색하게 내 눈치를 보며 웃은 여자가 싱크대를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어? 어디 갔지? 냄비가.."
"니집 맞냐."
"그럼~! 내 집이지~! 내가 분명 이주일 전에 냄비를 여기에 넣어 뒀는데? 거 참 이상하네.
아, 여깄구나?
아이그 자식. 언제 옆집으로 도망갔어~? 하하"
싱크대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대던 여자가 찾은 냄비를 내게 보여주며 하하 웃는다.
"그거 씻긴 한 거냐?"
"그럼! 내가 라면 국물 말라붙은 거 얼마나 빡빡 씻어서 넣어뒀는데~?"
"라면 국물.."
이 말라붙..
냄비에 물을 받던 여자가 자신있게 턱을 치켜들고 얘기하다 확 찌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더니 슬며시 냄비에 받아놓은 물을 버리고 냄비를 헹군다.
"됐다. 너나 실컷 먹어."
"야, 야~! 깨끗해, 이거. 봐봐~! 반짝반짝하잖아."
여자가 수돗물에 헹군 냄비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인다. 냄비가 깨끗해 보이긴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은 찝찝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팔짱을 끼고 서서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여자를 보는 내내 팔에 돋힌 닭살이 가라앉지 않는다.
주방에서 나오며 흘끗 냉장고가 눈에 들어온 순간 뒷통수가 찌릿해진다. 젠장.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방에서 탈출했다.
"야, 밥 먹어."
시계를 흘끗 보니 소파에 누워 TV를 본지 5분 가량이 지나있었다. 끓인 물에 밥이나 말아 먹으라는 건지.
"안 먹어."
뭘 해 놓고 먹으라는 건지 심히 의심스럽다. 무언가 냄새가 풍겨오긴 하지만 저 냉장고에 있던 무언가가 들어간 것이라면 절대 먹고 싶지 않다.
"다 차렸으니까 빨리 와."
"너나 실컷 드세요."
난 날 부르러 온 여자를 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말하며 TV에 눈을 두었다.
"그럼 이리로 갖고 올까? 잠깐만."
"야, 야."
난 주방으로 후다닥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불러봤지만 여자는 아랑곳 않고 국그릇 두 개를 들고 나타나 거실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뭐야. 육개장? 여자가 가져온 수저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국그릇 안에 담긴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날 보며 생긋이도 웃는다.
"해장 해야지. 얼큰한 거 먹고 속 확 풀어지라고. 아, 밥."
손뼉을 탁 친 여자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난 수저를 들고 국을 뒤적여 보았다. 바퀴벌레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 닭살이 두두룩 돋으며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뻣뻣해진 뒷목을 고개를 돌리며 풀고 있는데 여자가 다가오더니 탁자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햇..반..
"많이 먹어, 밥 많아. 하나 더 갖다 줄까?"
"아니.. 됐다."
"그래, 먹고 더 먹어."
이 여자.. 아랑곳 않고 햇반의 포장을 뜯는다. 이것도 밥이라도 눈을 빛내는 여자가 순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잘도 저런 플라스틱을 입에 넣고 씹어 먹는 구나. 난 한번도 이렇게 생겨먹은 싸구려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분명 플라스틱 씹는 맛이 날 거야.
포장 용기에 담긴 밥을 떠 먹은 여자가 국그릇에 숟가락을 푹 찔러 넣자 나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놀란다. 저걸 퍼서.. 입으로..
"음~ 맛있다. 뭐해, 안 먹고?"
여자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어서 먹으라 눈짓을 한다. 난 이것들이 과연 먹을 수 있는 것들인지 여전히 의심이 남았지만 밥과 국을 퍼먹는 여자를 보며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어제 저녁부터 굶은 것만 아니었으면 이따위 건 안 먹어. 알아?"
"뭘. 맛만 좋구만."
소파에 앉은 내 반대편 거실 바닥에 앉은 여자가 날 흘끔 올려다보더니 국국물을 떠먹는다. 히야~ 얼큰한 게 좋다~ 라고 감탄까지 해대며.
난 포장용기 안에 담긴 밥에 숟가락을 찔러 넣었다. 이건 분명히 플라스틱일 거야. 밥을 뜨는 순간 알알이 따로 노는 밥알의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입에 들어간 밥알들이 역시 플라스틱이다. 밥알에 배어든 특유의 냄새가 있지도 않은 식욕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떠먹어본 육개장은..
"이 것도 파는 거냐."
"응. 3분에 O.K. 먹을만 하지?"
"먹을만.. 넌 이딴 게 먹을만 하냐?"
"굶는 것 보단 낫잖아."
당연하다는 얼굴의 여자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같아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그런데 왜 반찬이 하나도 없어. 달랑 밥 하나, 국 하나."
이따위 걸 어떻게 참고 먹으라는 소린지 여자를 보자 여자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난 괜찮은데.
갖다 줄까? 냉장고에 몇 개 있긴 한데.."
여자가 주방 쪽을 흘끗 돌아본다.
- 탱그랑!
난 탁자 위에 숟가락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우욱. 식욕은 커녕 한 숟가락 먹은 밥과 국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난 탁자 위에 놓여진 밥과 국을 외면하며 소파에 묻은 머리를 벅벅 머리를 긁었다. 세차게. 아주 벅벅.
첫댓글 ㅎㅎ 잼있네요,.^-^ 여자가 당찬?? 님도 비조심하세욤>_<
재밌어요. ^ㅡ^ 분량도 많구.ㅋ 다음편을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