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연인,형제,친구등 인간간의 관계에 못지 않게 흥미로운 것이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이다. 전자가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감정을 매개로 한 지극히 "인간적"이고 수백세기를 거쳐 검증된 보편적이며 안정적인 관계인 반면, 후자의 경우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나 영원히 인간에게 속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심지어 위협까지 될 수 있는 비보편적이며 불안정한 관계이다.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에 대한 예견은 SF작가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되어 왔는데 필립 K.딕,아이작 아시모프등을 위시한 SF작가들은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사고하게 되며 그것이 종국에는 인간 생존에 크나큰 위협이 되리라는 경고를 그들의 작품속에서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대한 예견은 테크놀로지 발전에 선두에 서있는 과학자들이 희망적인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반면 약간의 과학적 지식와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SF작가들은 대부분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제시했다.
비록 SF작가들의 파급력은 과학자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나 결국 과학의 발전을 먼저 제시했던(우주선의 기본원리나 핸드폰의 상용화를 예견한 것 등등을 말함) 그들 작품대로 과학 발전이 이루어져 왔던 것을 상기하면 그들이 제시하는 디스토피아를 묵과하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SF작가들은 과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미래에 관한 정확한 예언자이다. 심지어 필립 K.딕은 자신의 작품 <물거미>(수록:<<마이너리포트>>)에서 타임 머신의 오류 수정을 위해 과학자 대신 과거의 SF 작가들을 "예언자"라고 부르며 데려오는 등 과학자 이상의 위상을 보여주려 했다.)
영화는 소설보다 늦었지만(소설보다 영화의 탄생이 늦으므로 당연하다.)테크놀로지에서 탄생한 예술답게 보다 근원적인 고찰,즉 영상을 통한 인간과 기계와의 현재와 미래를 제시했다.
수많은 영화들이 유토피아,혹은 디스토피아를 보여주었지만 그 중 나에게 있어 가장 흥미로운 영화는 <모던타임즈/1936/찰리채플린> <블레이드 러너/1986/리들리스콧>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매트릭스/1999/워쇼스키 형제> 등 4편이었다.
우선 <모던 타임즈와>와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란 점에 있어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모던 타임즈>에서 방랑자 찰리는 공장에 취직해 나사 조이는 일을 하게 되는데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기계속에 빨려 들어가 버리기에 1초의 빈틈없는 기계적 정확성이 요구된다.그리고 식사 시간에도 일을 시키려는 고용주들의 아이디어로 음식 먹이는 기계의 실험 대상이 된다.(일하면서 입으로 씹어 삼키기만 하는 기계적 행동의 연속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로 오히려 인간적 면모가 배제된 기계적 인간이 생산의 증대와 일의 효율성에 더 많은 기여를 하게 됨으로써 결국 스스로 인간성을 주장할 수 없는 서글픔에 봉착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 서글픈 일은 <모던 타임즈>이후 7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영화의 예언이 현실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은 거대한 집단의 기계 부속품으로써 위치가 공고해졌고 고도 사회로 갈수록 이런 현상들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반해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간이 만든 리플리컨트들이 자신이 기계임을 잊거나 끊임없이 인간이 되기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플리컨트들은 자신들을 없애려는 인간들보다 치열한 삶의 욕구와 섬세한 감성을 보여줌으로써 <모던 타임즈>와는 다른 인간과 기계의 모호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계의 인간화 관점으로 불분명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어떤 위험도 불사하는 리플리컨트들과 비교해 리플리컨트를 단지 자신의 편리함만을 위해 탄생과 죽음을 조정하는 인간이야말로 생명의 존엄성을 모르는 비인간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인간들은 오히려 <매트릭스>의 탐욕스런 기계와 닮아 있다.)
본격적으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매트릭스>로 들어가자면 두 영화에서 보여진 인간과 기계와의 미래는<스페이스..>에서 보여준 태초의 모습을 <매트릭스>가 마무리 짓는 형태가 된다.
우선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SF고전으로 불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간략히 살펴보자면 오프닝 장면인 인류의 조상이 던진 뼈다귀가 순식간에 2001년의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을 통해 인류의 진화 속도보다 테크놀로지 발전 속도가 훨씬 빨랐음을 간접 시사해주고
이어 요한 스트라우스의 음악을 배경으로 우주선 안에서의 아름다운 공중발레를 하는 인간들을 보여줌으로써 완벽한 기계 세계 진입 직전의 인간들의 살아있는 심성을 나타내려 한다.
(이 공중 발레 장면은 브라이언 드팔마 감독의 <Mission To Mars>를 통해 오마쥬한 바 있다. <Mission To Mars>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발표 당시 지루할 정도로 느리다는 혹평이 많았으나 <스페이스..>가 그렇듯이 SF영화의 느림의 미학을 적절히 보여준 좋은 예의 하나다.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을 위시해 알프레드 히치콕 그외 고전 감독들의 오마쥬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사건은 프로그램한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혹은 자만했던) 컴퓨터 시스템 “HAL”이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서 이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인간들은 “HAL”을 없애려고 하면서 일어난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HAL”이 자신의 존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을 제거하기로 스스로 결정하면서 인간은 더욱 큰 위험에 빠진다.
“HAL”은 어떻게 자신과 인간을 동시에 위험에 빠뜨리는 자율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테크놀로지의 발전 때문이었고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편리를 위해 “HAL”에게 부여한 지식이 결국 정보를 종합하는 능력이 있었을 뿐인 “HAL”을 사고하게 하고 자신의 위험을 인식하며 방어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것은 악순환의 한 형태이다.
(1) 편리를 위해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킨다.
(2) 그것의 편리성에 익숙해진다.
(3) 금방 낡은 것이 되어 버리는 테크놀로지의 조그마한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혹은 더 큰 호기심으로)위험이 예고되지만 편리하고 경제적인 기술을 발전시킨다.
(4)테크놀로지는 조금씩 인간 생활 전반을 차지하고 지배하게 되면서 종국에 인간은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아니라고 주장하긴 힘들다. 이미 현 세대에서 (3)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4)와 같은 결과에 봉착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함께 이 디스토피아적 예견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형태가 <매트릭스>다.
<매트릭스>는 기계와의 전쟁에 패한 인간들이 기계 동력의 배터리가 되는 그야말로 역전된 두 집단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만함으로 지구를 지배했던 인류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겠고, 인류 이후 지구의 지배자가 테크놀로지가 될 수 있다는 간접적인 예언이기도 하다. 혹자는 유기적 생명체가 아닌 무생명체라는 기계가 어떻게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겠느냐 의문을 제기하겠지만 이 의문을 뒤집으면 기계는 먹지 않아도 되고 기후에 적응할 필요도 없는 만큼 인간보다 더 뛰어난 적응력을 가질 수도 있다. 게다가 정신적인 기계,즉 마음을 가진 테크놀로지가 탄생한다면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라는 위치에서 자만할 수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과학의 발전 속도로 보아 정신적 기계의 탄생은 늦어도 100년안에 가능할 듯 하다.
그럼,인간이 바보라서 위험을 초래하는 기계 및 과학 발전을 보고만 있겠는가,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기보다 걸지 못한다고 답해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최근에 각광 받고 있는 유전자 공학, *나노공학은 인간에게 물질적 풍족과 편리를 약속하지만 악용될 경우 인류 존속 자체에 위협을 가하는 양날의 칼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이 기술들이 발전의 긍정적인 면만 제시하며 유토피아적 환상을 유도한다는 점이고 게다가 앞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익숙함과 의존성에 친근하다.
이는 아래 인용문에 잘 나타난다.
(인류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시나리오에 대한 관심을 왜 갖지 못했는가? 에 답하면서)
새로운 것에 쉽게 친숙해지고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성향 때문인 것이다. 새로운 과학 발전이 일상화 된 삶에 익숙해진 나머지 21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과학 기술들, 즉 로봇공학 유전자 공학,나노 기술이 지금까지의 과학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위협을 가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봇과 인공유기체와 나노로봇은 위험을 더욱 확대시킬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자기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탄 1개는 오직 한 차례만 폭발한다. 그러나 하나의 로봇은 여러 개의 로봇으로 복제되면서 순식간에 통제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빌조이,<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우리는 매트릭스안에 살고 있나>> p 284
예고는 예고일 뿐이라고?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주위를 살펴보라. 벌써 과학 기술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고 그 폐해의 강도는 점점 파괴성을 띠어가는 것을 바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며 현재를 반추해 미래의 시뮬레이션을 그려본다면 이는 결코 위험한 경고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인류는 이제부터라도 **네오러다이트를 통해 테크놀로지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하지만 아쉽게도 인류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인간 자체가 익숙한 편리함을 내던질 정도로 참을성 있는 존재가 못 된다. 게다가 산업 혁명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사회구조를 기계에 어느 정도 의존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할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기계 문명을 버리는 것보다 현명한 인류의 선택은 결국 교과서적인 것이다. 우선 영원한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른 겸허함을 획득하고 인류 존속과 지구에 위협의 초석이 되는 위험한 과학 기술은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인간을 돈벌이로 생각하며 도덕성을 버리고 이득만을 추구하는 수 많은 인간 위의 지배적 인간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일이다.
여지껏 그래왔지만 달라진 게 뭐가 있냐고?
긴말은 필요 없다. 존속이냐,멸망이냐. 우리의 손 안에 쥐어진 칼이다.
만약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하고 갈 데까지 가서 결국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가장 현명한 결론은 <매트릭스:레볼루션>에서 보여줬듯이 기계와의 평화적 공존이다.
하지만 더욱 절실히 원하는 것은 거기까지 가지 않을 만큼의 인류의 위대한 지혜이다.
(덧붙임: <매트릭스:레볼루션>의 결론에 대한 찬반이 분분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멸망하는 것보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공존하는 게 낫지!)
*나노공학:원자나 분자 개념의 초미립자를 이용한 기술력으로 저렴하고 빠르게 인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으나 핵기술처럼 무기로 이용되거나 기업들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될 경우(당연히 그러리라 생각되지만) 그 영향력과 파괴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라고 한다. 실제 나노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남동생에 따르면 윤리 의식을 버리고 돈벌이에만 치중한다면나노공학만큼 합법적이며 확실한,매력적인 돈벌이는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네오러다이트 (Neo Luddite) :러다이트(Luddite)는 19C초 증기 기관등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영국 노동자들이 벌였던 기계파괴운동을 일컫는 말이다.이후 첨단 기술의 수용을 거부하는 반기계주의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네오러다이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첨단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것으로 보고있다. 기술지상주의만을 추종하는 사회는 결국 파국을 맞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첨단문명을 거부하고 외딴 곳으로 은둔하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폭력적인 방법으로 기계문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년전 유나바머란 이름으로 연구소,공항등에 폭탄테러를 저지르다 체포된 미국인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