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하는 일이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극한적으로 되풀이 하고, 국회에서는 소수의견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의정단상을 점거하고 폭력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고....".
뿐만아니라 김대중은 미국 정계를 돌며 당시 대한민국 재기의 생명줄과 같은 원조를 끊으라며 로비하고 다녔고, 심지어 북괴와 만나 반역모의까지 서슴치 않는 등 국가혼란이 극에 달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우려가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 탄생한게 바로 유신헌법이었다.
유신헌법은 국민들의 압도적 찬성으로 제정되었으며, 2년뒤 재신임 투표에서도 약 80%의 투표율에 73%의 압도적 지지로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지금 대통령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결과이다. 지금 삐딱한 사람들이 흔히들 헐뜯는 내용상의 몇가지가 당시로서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혹 처음 제정투표는 국민들이 박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적 신임으로 얻어진 감성적 판단에 의한 결과라면, 나중 재신임 투표는 충분한 시간과 검증을 거친후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확실한 결과였다. 절차상 이보다 완벽한 헌법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김일성도 어느 의미에서는 국민통합을 이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인민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려 속인 결과였고, 그 동기가 사랑이 아니었다는데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대통령 될 가능성이 커지자 북괴 고위 간부가 김대중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대통령 되면 우리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협박편지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동안 김대중이 북괴와 접촉하며 무슨짓들을 꾸미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내용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김대중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 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 하니 선생과 협력해오던 지난 날이 회억 되면서 감개무량 함을 금할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 하던 때가 엊 그제 같은데 벌써 2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요즘 텔레비죤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쟈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 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 하였습니다.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 지금도 괴롭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 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이 어느 회합에서 말씀 하셨지만 조국 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지금에야 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 정권이 서야 북과 남이 민족 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 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선생과의 상봉을 확약 하면서 옥체 만강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주체 86 (1997년)12월 5일 평양에서 조선 사회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김대중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후 미국과 일본을 돌아다니며 반정부 활동 중이던 김대중은 조총련계 북한 공작원들과 합세하여 “한민통”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김대중은 이 단체의 의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잡혀왔다. 언론에서는 이유불문 "납치"로 표현하지만 사실은 이렇듯 이적질 하다 국가정보기관에 들켜 잡혀 온 것이다.
지금 문재인 후보가 이 자의 무덤을 찾아 이 자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입술을 앙다물고 다짐했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자를 대통령으로 앉혀도 되는 것인가? 언론의 무책임한 "진보" 논리에 부화뇌동 할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은 경각심을 갖고 각자 슬기로운 판단을 해야하는 엄중한 현실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