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보성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눈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지금 눈을 붙여야 내일 제대로 돌아다닐텐데...
설상가상으로 옆에는 술먹은 아저씨가 술냄새를 풍기며 코까지 골면서 잠을 자는 바람에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
그래도 어리버리 눈을 붙이고 보성역에 도착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 시간에 숙소를 잡는다는 건 여행자에겐 낭비일 뿐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지만 옷을 두텁게 입고 보성역에서 날이 밝을때까지 잠을 청하기로 했다.
양말을 벗고 베개를 만들어 잠을 청한다.
다행스럽게도 의자가 푹신푹신해서 한결 따뜻하고 편해서 좋다.
난 운이 좋은 여행자다.
잠을 조금 자고 있으려니까 웬 아저씨가 며칠은 안 씻은 모습으로 나타나 내 옆에 눕는다.
이 곳에도 노숙자분이 계시나?
나야 알 바 아니어서 계속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그 아저씬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얇아서 추우신 모양이다.
몇 분후에 나가서 커튼을 뜯어서 덮고 주무신다.
뒤척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내면서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고 있다.
나야 여행하는 사람이라 사서 고생을 하지만 그 아저씬 몸 누일 곳이 없어 이 추운곳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든다.
아침 6시에 눈을 떠 화장실에서 대충 얼굴과 이빨을 닦고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추웠는지 온 몸이 으실으실하다.
날씨가 비온후라 많이 쌀쌀해졌다.
대한다원으로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 서둘렀지만 차시간을 알지 못해 아깝게 몇분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다시 보성역으로 돌아가는 게 싫어 걸어서 대한다원을 가기로 결정했다.
빨리가면 1시간 30분정도 걸릴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어제 옆에서 주무신 그 아저씨 생각이 난다.
따뜻한 해장국이라도 사드리는 건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터벅터벅 보성시내를 빠져나가 대한다원을 향해 걷는다.
멀리서 동쪽엔 태양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려고 한다.
가는 도중에 대한다원 근처에서 다원을 운여하시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한다원을 빨리 도착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는 대한다원 뿐만 아니라 많은 다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 CF나 드라마때문에 대한다원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입구의 삼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한번 꼭 와보고 싶었던 대한다원의 녹차밭이 보인다.
비구승과 수녀님의 CF한장면이 떠오르고 여름향기의 한장면도 떠오른다.
화면에서 본 녹차밭의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환상적이었는데 실제로 보면 조금 반감되는 것 같다.
태양이 녹차밭을 비추며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난 온몸을 태양을 향하고 태양은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고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적신다.
이 기분... 뭐라 말해야 하나?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아 1시간 이상 녹차밭에 머뭇거린다.
가을을 더 느끼고 싶어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듣다.
눈으로 보면 몇분이면 되지만 온 몸으로 느끼려면 조금의 인내가 필요한 것 같다.
눈으로 느끼면 이 모습은 금새 잊혀지지만 몸으로 느끼면 추억이 되어 내 기억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냥 이 모습을 보며 가을 햇볕을 맞으며 한없이 상상에 젖어들고 싶었지만 이미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러서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다.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보지만 내 눈에서 조금씩 멀어져 간다.
이제 장흥을 거쳐 강진, 해남을 향해 가려한다.
보성으로 돌아가 장흥으로 가면 빠를 것 같았지만 다시 온 길을 되돌아 가기가 싫어 지도를 보니 율포해수욕장을 거쳐 장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차가 없으면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남도의 바다를 만끽하면 되니까 나한테는 이래나 저래나 다 좋은 선택이다.
대한다원에서 율포해수욕장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밖 풍경을 보니
고개너머에 녹차밭이 산에 널려있다.
율포해수역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본 녹차밭풍경도 꼭 보아주세요...
율포해수욕장에서 바로 장흥가는 버스는 없고 음치나 군학리로 이동해서 장흥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는 정보를 얻어 해변을 따라 걷는다.
( 율표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중에 군학리나 음치까지 가는 버스도 있다고 함)
가는 도중에 이쁜 해변이 있어 그곳에 배낭을 내려 놓고 벤치에서 잠시 몸을 누인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이런 낭만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꽉 짜여진 일정표를 가진 여행이라면 이런 호젓함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가는길에 경운기를 몰고 가는 할아버지가 가는 길까지 태워다 주신다.
회령시장에서 장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바다를 끼고 달리기 때문에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장흥에 도착해서 혹시 볼 게 있나해서 시내를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곳이 없어 강진으로 향한다.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강진.
시내를 잠시 둘러보고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백반을 시켰다.
반찬이 15가지 나왔는데 하나같이 맛이 있어 두그릇의 공기밥을 뚝딱 비웠다.
전라도의 음식은 역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근처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지나쳐가기로 했다.
강진에서 해남으로 왔다.
해남에서 보길도로 오늘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고민을 하다가 우향리의 공룡유적지를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잘하면 철새들의 모습도 기대했지만 철새는 보이지 않는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남도를 느껴보고 싶었기때문에 크게 볼것이 없는데도 불만은 없다.
오가는 버스안에서 창밖의 풍경에 만족한다.
난 버스에서 창밖의 풍경을 보며 꼭 주의깊게 보는게 있다.
마을의 입구나 마을의 중앙에 있는 큰나무밑의 정자나 평상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이런 정자나 평상을 보면 꼭 쉬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양말을 벗고 맨발로 큰 대자로 누워 잠깐이라도 쉬어가고픈 충동...
특히 전라남도엔 더 눈에 띄는 것 같다.
여행하면서 유명한 유적지를 보는 것도 좋지만 이런 모습을 보는것도 내겐 큰 기쁨이 되곤한다.
저녁에는 피곤해서 근처의 여관에서 잠을 청한다.
찜질방도 몇개 눈에 띄었지만 오늘은 편히자고 싶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밀렸던 빨래를 하고 정신없이 잠에 취했다.
해남의 저녁을 느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안듣는다.
첫댓글 녹차아이스크림 맛있죠? 녹차밭에 실망하다가 녹차아이스크림에 기분 업 되었지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