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일제 강점기 시절 부터 선교사를 중심으로 조선땅에 들어 온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의아한
표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이 임야가 70%를 넘는 나라에서 하필이면 주거지를 농토가 부족한 평지에
짓는냐는 것이다. 물론 one two have yes 다. 다시 말해 일리가 있는 말 이지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고래로 부터 평지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산동네 즉
달이 가장 가깝게 보인다는 달동네는 당연 무허가 판자촌으로 극빈자들의 삶터가 되는데 육이오 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벌어 진다.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성남시는 서울의 달동네
판자촌을 철거 하면서 이주 단지로 채택되어 마구제비로 급거 조성된 도시라 현재도 제반 인프라가
열악하기 그지 없다. 쉽게 말해 버려진 땅이였지만 흐 흐 세상만사 상전벽해라고 하더니만 분당은
현재 천당 아래 금당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평지에
주택을 지은 연유는 여럿 있겠지만 농업이 본업인 나라에서 자신의 일터인 농토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일을 하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요즘 말하는 직주 근접 즉 직장과 주택이 가까워야 한다는
그런 개념인데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 온 외국인들이 풍토병을 막고 더위도 피할 겸 해서 휴 린튼 이라는 선교사가
지리산 왕시루봉 해발 1,000 고지에 별장을 만들었고 휴 린튼의 아드님이신 한국사람 보다 한국말이
더 유창한 인 요한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는 별장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영구 보존을 하자고 주장하고
그 아래에 사찰이 있는 불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는 철거를 주장하며 팽팽히 맞선 것이 근자의 일인데
우리 어릴 적만 해도 그 높은 지리산에 양코배기 들이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얘기를 들을 땐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일 이지만 오늘 해발 1,300 고지의 태백 매봉산(천의산)을 오르며 그 깊은
속내를 늦게나마 알게 된다.
산행 들머리인 두문동재에 당도하여 하차를 하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안개가 자욱 깔리면서 서늘한
기운이 엄습 하는데, 노란색 바람막이 졈퍼를 입은 초로의 영감님이 어디서 오셨냐며 인사를 건넨다.
높은 산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니길래 연유를 물어 보니 우리 바로 옆에 파킹해 둔 캠핑카를 가르치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인데 올 여름 내내 이곳에서 살고 있으며 아래 평지땅의 낮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 지기 전엔 하산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분을 보고 하는 말이
오뉴월 싸리나무 울타리 아래서 부달 처억 늘어 뜨리고 개껌 씹으면서 곤히 잠 들어 개꿈을 꾸는
똥개팔자라고 한다.
금대봉을 경유하여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있는 비단봉을 지나 매봉산에 오르니 힘차게 날개짓 하는
위풍당당한 풍력발전기와 그 아래로 끝간데 없이 펼쳐 지는 배추밭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너무도
낯 설게 다가 온다.
저지대 평지에 익숙하였던 우리들은 매봉산 같은 강원도 깊은 산중 고지대는 버려 두었던 땅이였지만
옆에 계시는 해운님의 말씀에 의하면 마트에서 배추 한포기에 물경 육천원이나 한다고 하니 2.5톤
도라꾸로 한 트럭만 싣고 가락동 농수산시장에 갔다 오면 흐미 일년 년봉은 낙낙하게 떨어 지겠네요.
강원도는 본시 산악지대라 논이 없어 처녀들이 시집을 갈 때 꺼증 밥 한그릇 넉넉히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며 더 더욱이 감자나 깡냉이 농사를 지을 적엔 급경사 밭에서 한쪽 발은 높게 다른 한쪽 발은 낮은
위치에 두고 긴 고랑을 호미질 하며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에 시집을 가서도 서방놈 한티 첫날밤 부터
괄시를 받는다. 여성의 주요부위의 좌우가 대칭이 맞질 않아 한쪽은 높고 한쪽은 푹 꺼져서 찐짜가 났기
때문에 재미가 없대나 머나 하면서 지랄을 뻐든다는 것인데 강원도 감자바우라고 놀려 대지만 구래도
강원도는 먹거리가 그리 부족하지는 않아 거의 대부분의 생필품을 자급자족하며 나름 풍족하게 살았지만
딱 한가지 자체 해결이 않되는 것이 소금 조달 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강원도 산간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도 달밤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을 마치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다는 표현을 했는데 이와 환경이 다른 남녘땅에선 깨를 뒤집어 씌운 듯 하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
지리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이 총격으로 죽으면 시신의 체온이 급감하고 이어서 옷 속에 들어 있던
이(서캐)들이 기어 나와서 옷을 깨를 뒤집어 놓은 듯이 하얗게 덮는다고 한다.
이 효석님도 강원도 분이신지라 귀한 소금이 우선 머리에 떠 올랐던 것인가?
소금 가마니는 보부상 중에서 등짐을 주로 지는 사람들이 지게에 지고 강원도 산간마을로 올라 오는데
생업 이라고는 하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여서 외진 마을은 피하기 마련 이지만 보부상이 기를 쓰고
찾아 드는 마을은 따로 있다고 한다. 어느
동네나 마을 입구에는 정자나무와 서낭당이 있게 마련이고 가까운 곳에 동네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한편으론 의료행위를 하던 무녀가 살기 마련이데 이 무녀가 살고 있는 집이 요즘의 여인숙 이라고 보면
되고 소금장수가 이 여인숙에 투숙을 하면 무녀가 지친 나그네를 위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온몸으로
써비스를 하는데 이 무녀의 아랫도리는 비탈이 져서 도무지 재미가 없다는 강원도 처녀들의 찐짜와는 차원이
완조니 다르다고 한다. 아슬 아슬한 작두 위에서 공중제비를 돌면서 날춤을 추었던 무녀의 절구방아는 완벽한
근육질로 형성이 되어 나무로 만든 공이는 잘못 들어 가면 나올 적에 뚝 뚝 부러져서 나온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특히 김장철이나 장을 담굴 때가 되면 소금장수를 유인키 위해 절구방아가 튼실한 무녀를
초빙키 위해 노심초사 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사실에 근거한 진짜 입니다.
우리는 서해안 천일염 그 중에서 바닥을 비닐로 만든 장판재로 깔은 장판염이 아닌 진흙으로 깔은 토판염을
우리의 고유의 제조소금으로 알고 선호들을 하지만 우리 원래의 전통 소금제조 방식은 자염 즉 가마솥에
바닷물을 퍼 넣고 펄펄 끓여서 만드는 방식 이였다고 합니다. 이 자염 제조법은
불을 때야 하므로 나무의 소비가 너무 많은 문제점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사람들이 자유중국 즉
대만에 가서 그 제조법을 배워 와서 인천에 있는 주안에서 맨처음으로 천일염을 생산 하였고 이로 인해
사람이 아주 짜게 놀면 저 놈 인천 짠물 이라는 말이 생겨 났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란 말 처럼 소금은
사람에게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중요한 것 이므로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엔 국가에서 전매를 하였다고 하며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 사람들도 마하트마 깐디의 영향으로 무저항을 주장하다 영국놈들이 인도 사람들을
더욱 조이고 압박하기 위해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영국이 일원화 하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만부득 들고
일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자
약이 바짝 오른 아랫도리를 뻔디기로 맹그는데는 찬물이 가장 약발이 잘 받고 고랭지 배추 부드럽게 절임
하는 데는 소금 이상의 명약이 업져.
해발 천삼백 고지의 구름길 같은 등산로를 걷고 또 걸어 삼수령 피재에 당도하니 워낙이 밀려 드는 차량들
덕분에 태백시에서 임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여러 분의 차량 통제 요원들이 정신 없이 호각을
불어 대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당도한 느림보 리무진에 황급히 올라
20만평의 해바라기 축제장으로 예정에 따라 내려 왔으나 대형버스는 주차를 거부 하거니와 일인당
입장료가 물경 오천원 이라는 소리를 들은 대부분의 느림보님들은 그냥 패스를 하자고 하여 듬성 듬성
솟아 오른 입구의 몇송이 해바라기만 눈팅을 하곤 이내 차에 탑승 한다.
해바라기는 그 강렬한 색상과 함께 모양새가 작렬하는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에 특히나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가 즐겨 화폭에 담았는데 그림의 문외한인 우리가 보기에도 너무도 잘 어울려 보인다.
해바리기 축제장을 느림보 리무진을 탄 채로 스쳐 지나 가노라니 해바라기 숲 속에서 연인과 사진을 찍으며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 청춘들을 보노라니 이제는 돈 오천원도 아까워서 구경거리를 포기하는
내 속물근성이 원망 스러워, 혹성 탈출 이라는 영화에서 해변을 말을 타고 달리다 자유의 여신상의 잔재를
발견하곤 배호의 영시 처럼 원점으로 돌아 온 자신을 돌아 보며 대성통곡을 하던 찰톤 헤스톤의 허망을
떠 올리며 애써 귀가길을 서둘러 본다.
컴컴한 쥐구녕에도 언젠가는 딱 한번 볕이 들래나?
분당 탄천변의 큰애(왕잠자리의 안동식 표현) 돌삐 인사드립니다.
첫댓글 장문의글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대단하시고, 존경스럽습니다^^
매봉산을 오르면서
이번에는 돌삐님께서 어떤 스토리로 글을 쓰실까..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장문의 글을 쓰시려면 머릿속에 대강의 줄거리는 잡아놔야되겠지요?..매봉산 배추밭을 지나며
요즘 금값으로 등극하신 배추밭이 노다지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ㅎ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배추와 소금..
태백의 그 높은 고원에 배추를 심을 생각을 최초에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참으로 머리 좋고 아이디어가 기발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산 아래 비닐하우스 작물은 말라죽거나..떠 죽거나..
그러나 태백 고원의 배추밭은 싱싱하게 자라나 장미꽃을 바라보듯 이뻤습니다.
푸른 배추밭과 하얀 풍력발전기가 만들어내는 이색적인 풍경이 멋졌습니다.
가슴이 답답한 사람들은 매봉산 바람의 언덕으로 가서
시원한 바람 쐬고 오면 답답증이 확 사라질것같습니다.
언제나 빈 손으로 보내지 않는 글.....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