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어릴 때 첫째에게 예배 인도를 맡겼다. 그런데, 난리가 났다.
형 : 오늘은 저 혼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동생 : 형아, 나도 시켜줘. 나도 할래.
형 : 안 돼, 형이 인도할 때 끼어들지 좀 마!
동생 : “형아~~ (에잇)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형 : “너 자꾸 그러면 다음에 안 시킬 거야.”
나는 서로 예배를 인도하겠다고 싸우고 삐치는 아이들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을 중재하고 조율하며, 예배의 질서를 하나씩 가르쳤다.
즐거움과 장난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할 때는, 예배 인도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자숙의 기간을 갖게 했다.
어떤 날은 멋진 예배자로, 어떤 날은 무법자로 예배를 방해하는 아이들의 장단에 맞추느라 요동치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의 변화는 더디고, 내 인내가 바닥을 치면 노여움의 싹이 자라났다.
“똑바로 앉아, 너희들 장난치지 말고 돌아다니지 좀 마! 얘들아, 싸우지 마, 딴짓하지 말고 예배에 집중하자!”
끊임없이 요구사항을 늘어놓으며, 잔소리를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죄의 칼로 삼아 아이들에게 날을 세웠다. 예배 훈련을 빙자해 하나님께서 이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임을 가르치며, 그분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내가 무법자였고 방해자였다.
마치 예배의 주인이 부모인 것처럼 그 시간을 훈육과 훈계로 가로채는 죄인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예배 태도가 좋아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예배자가 되기로 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엄마인 나를 먼저 예배자로 세워가셨다.
아이들의 상태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믿음의 예배자로 서기 위해 연단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예배자로 서지 못 하면 아이들의 행동이 보였고,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주인인 예배인지 늘 겸손하게 돌아봐야 했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예배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이들도 예배자의 태도를 하나씩 배워갔다.
모든 신앙 훈련이 그렇듯 예배 훈련도 부모가 먼저 변화의 자리에 서야 한다. 자녀는 부모가 예배하는 자세를 보고 배우며 또 한 명의 예배자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링컨이 이런 말을 했다.
“아이는 당신이 시작한 것을 실천에 옮기게 될 사람이다. 그는 당신이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당신이 가고나면,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돌아볼 것이다.”
가정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지금 어디에 앉아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 자리와 가치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수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한없이 연약한 모습에 부끄럽고 안타깝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오늘을 후회로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
지난날을 발판삼아, 주님이 주인이신 예배의 자리를 지켜나가려 노력한다.
-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 백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