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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 때 수십 명 일가가 집단 망명한 이회영 어른네는 만주에 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농토를 개간할 때 왕년의 노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마님들이 밥 지어 날랐다고 한다. 이것이 혁명이고 진보다"(391)
『세 여자1』을 통해 20세기 한반도에서 급속도록 번진 공산주의 활동가들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 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 또한 독립 운동가들처럼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싸운 점은 같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갈망했던 것은 계급 해방이었고 무산자계급 주도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었다. 제국주의가 판 치고 있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메시아와 같은 단비였다. 더구나 레닌이 조선해방을 위해 거금 2백만 루블을 지원하겠다고 하니 젊은이들이 모스크바로 마음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주세죽의 남편 박헌영,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고명자의 애인 김단야의 목숨을 건 활동 이력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주인공 세 여자가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고자 노력했던 점 등을 구체적으로 담아 놓은 보기드문 책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을 위해 소설 형식을 빌려 들려 주고자 시도한 점이 참신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시대와 동떨어진 사건들이라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 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공산주의를 택했을까?
지주에 의해 폭압을 받았던 왕조시대를 넘어 이제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숨 죽이고 살아가야 하는 많은 소작농들과 입에 풀칠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도록 번진 것은 당연한 시대적 분위기였다. 5백년 이상 봉건주의 문화 속에 살아왔던 여성들에게도 새로운 가치관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당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 운동이 국내외 안팎에서 끊이지 않고 풀꽃처럼 일어났다. 독립 운동의 노선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를 일제만큼 싫어한 김구가 맨 오른쪽, 독립투쟁을 하자면 공산주의자와도 손잡아야 한다는 안창호가 가운데라면 러시아혁명에 기대를 거는 여운형이나 안병찬, 이동휘는 왼편이었고 맨 왼족엔 김만겸 같은 소련 태생의 정통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46)
세 여자 주세죽은 박헌영의 아내였고, 허정숙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무수한 소문을 달고 살 정도로 몇 명의 남편을 두었지만 분명한 것은 막내 고명자와 함께 공산주의 활동가였다는 점이다. 독립운동가보다 더 혐오스럽게 생각한 일본 경찰은 공산주의 활동가들을 무차별 잡아 들이는데 고삐를 쥐었다. 세 여자와 함께 지냈던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김태연) 모두 감옥살이를 피해갈 수 없었고 김단야는 소련에서 일본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주세죽은 유형지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했다. 스탈린은 독재 정권을 탄탄히 하고자 지식인들과 일본의 밀정으로 사용될 염려가 있는 조선인들을 황무지 개간이라는 빌미로 중앙아시아로 무차별 끌고 간다. 가슴 아프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들이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 모두 독립을 위해,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던 이들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사가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주류였다면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와 같은 시대를 넘어 앞서 근대적 여성 운동을 목숨 걸고 한 여성들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책들이 독자들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소개되었으면 한다. 여성이라는 한계점을 뛰어넘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가치관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간 세 여성의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귀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