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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비전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라!"
+ 본 문 : 여호수아 3장 14절 - 17절 (구약성경 323쪽)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아멘!
+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인사합시다. /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권능이, 당신 안에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산 것은 아닙니다만, 세 번째 방문하는 동안 한인교회 목사님들과 성도들의,
미국생활에 대한 간증과 세미나 강의를 듣고, 또 대화를 통해서 저 나름대로,
’이 사람들은 두 세계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살다가 이민을 간 이민 1세대들은 미국에 살고 있기에 미국 문화와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국 문화, 한국 식생활, 한국 언어, 철저하게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민 1세대 어른들과는 달리, 이민 2세대 아이들은 미국 문화와 언어속에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한인 어른들과,
아이들은 철저하게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그 신앙생활의 패턴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지는 비전과 기회보다, 미국에서 가질 수 있는 비전과 기회는 훨씬 더 큽니다.
문제는 그 문화와 환경을 얼마만큼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사실은 그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화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 성공한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위치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바라보는 믿음의 눈입니다.
어린 시절 읽어보셨던 재미있는 만화 ‘늑대소년’ 의 주인공 ‘모글리’ 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인도에서 사역하시던 선교사님이 사냥을 나갔다가 짐승이 아닌,
짐승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히 사람은 사람인데, 네 발로 언덕을 쏜살같이 뛰어 다니는 짐승 같은,
어린아이 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총을 쏠 수가 없어서 그물로 포위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짐승이 아닌 분명 사람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두 아이들은 늑대의 품에서,
젖을 먹고 자랐으며, 늑대의 소리를 내며 늑대처럼 네 발로 다닌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이 두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말을 가르치고, 사람의 문화를 가르쳤는데, 큰 아이는 빨리 죽고,
작은 아이도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지능만큼 되었을 때에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환경을 가르칠 때면, 이 "늑대소년" 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일반 교육학에서는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 고 믿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절 근처에서,
시장 근처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환경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교육학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을 가진, 믿음의 사람만이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환경 - 그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디즈레일리도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환경을 만들어 간다." 고 했습니다.
동물들은 환경에 적응하고 그냥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은 환경을 바꾸고 창조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눈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관한 얘기는 수많은 예를 들어 말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신발을 팔기 위해서 두 세일즈맨이 갔더랍니다.
한 사람은 그 곳에 도착해 아프리카를 쭉 둘러보니까, 신발을 신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즉시 이렇게 전보를 치고 본사로 돌아왔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신발을 신은 사람이 아무도 없음.
그래서 신발 파는 일은 불가능함."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본사에 많은 신발을 주문하면서 이런 전보를 쳤습니다.
"아프리카에 도착해 보니 신발 신은 사람이 아무도 없음. 그래서 누구에게나 신발을 팔 수 있음."
그들이 본 상황은 꼭 같았지만, 한 사람은 부정적으로, 한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이 다릅니다.
한 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은 집신 장사를 했고, 한 아들은 우산장수를 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항상 울상입니다. 비가 오면 집신 장사하는 아들 때문에 울상이고,
햇빛이 나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 때문에 울상입니다. 이래저래 항상 울상입니다.
한 지혜자가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의 우산이 잘 팔리겠구나 생각하고,
웃으시고 햇빛이 나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의 짚신이 잘 팔리겠구나 생각하고 웃으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만나 둘이 협동해서 햇빛 나면 짚신을 팔고, 비가 오면 우산을 팔라고 권합니다.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하다가 두 사람이 물 한 컵씩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조금 마셨더니, 물 반 컵이 남았습니다.
한 사람은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면서 투덜거리기를 "야 물이 반 컵 밖에 안 남았네.
이 험한 사막을 갈려면 아직 멀었는데, 물이 반 컵 밖에 남지 않다니, 미치겠네. 죽겠네. 환장하겠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목이 말라 반 컵 마셨는데,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았네.“ 하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물 반 컵을 보고도 ‘미치겠네. 죽겠네. 환장하겠네.’ 불평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 아직도 물이 반 컵이나 남아 있네.‘ 하고 기뻐하며 좋아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야기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위치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바라보는 믿음의 눈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열 정탐꾼은 "정복할 수 없다. 그 땅은 쓸모없는 땅"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믿음의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 땅은 아름다운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우리는 정복할 수 있다." 고 선포합니다.
문제는 믿음의 눈입니다. 인생을 불평 불만이나 늘어놓으면서 부정적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비전과,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긍정적으로 살 것인가? 하는 믿음의 눈입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바베스 랜던은 "절망과 희망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너무나도 가깝다.
언제나 절망이란 놈은 희망 바로 뒤에 따라 온다." 절망과 희망은 붙어 다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절망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늘 절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희망을 보는 사람은,
늘 희망 가운데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성공과 실패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붙어 있습니다. 문제는 바라보는 눈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희망을 바라보고, 성공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을 창조적인 소수자’ 라고 불렀습니다. 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은 어두움 속에서도 빛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의 대열에서 버림받습니다. 믿음생활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대열에서 버림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는 믿음이 없었고,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식에서 하나님 빼고 믿음을 빼고 나면 “불가능, 할 수 없다.” 는 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우리가 말을 할 때에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 다음에 믿음 생활에,
승리하는 비결은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가지며, 주님의 시각을 가지고 신앙을 보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말을 해야 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해야 됩니다. 믿음의 말을 해야 됩니다.
성령님과 함께 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믿음생활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시하는 그것이 문제다."
어차피 세상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공동묘지에 있는 사람뿐입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다리가 부러져도 아픈 줄 모르고, 그대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다리를 못 쓰고 말 것입니다. 맹장이 터지게 생겼는데도 아프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고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성공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고, 성공의 길 안내자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회사에서 판매실적이 아주 부진해지고, 하도 불평을 많이 해서 판매 책임자가,
사원들에게 그렇게 했답니다. 흰 종이를 걸어놓고 만년필을 뽑아서 그 종이에 뿌렸습니다.
그랬더니 잉크가 두 방울 튀기면서 얼룩이 졌습니다. 책임자가 "여러분 여기 무엇이 보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얼룩이 봅니다. 그리고 까만 점이 봅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판매 책임자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왜 여러분의 눈에 왜 얼룩과 까만 점만 눈에 보입니까?
까만 점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할 뿐, 아직도 많은 부분이 흰 부분이고, 깨끗합니다.“
안된다고만 생각하고 사셨던 분들에게 선포합니다. 아직도 많은 가능성이 여러분 앞에 남아 있습니다.
불행하다고 눈물 흘리신 분들에게 선포합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삶이 의미가 없다고 자학하는 분들에게 선포합니다. 가치 있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이 있음을 아십시오.
왜 기도하는 분들은 보지 못합니까? 왜 많은 흰 부분은 보지 않고, 까만 점만 보고 불평하십니까?
햇빛이 나면 죽은 나무는 더 바짝 마릅니다. 그러나 산 나무는 더 싱싱하게 살아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 그의 영성과 삶이 점점 더 말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문제가 햇빛 때문에,
더 싱싱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리가 오면 약한 풀들은 죽지만 들국화는 더 진한 향기를 발합니다.
여러분에게 닥치는 여러 문제는, 인생의 정지 표시가 아니라 방향 표시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새 역사의 대열에서 버림받은 사람의 문제점 무엇입니까? 무한한 가능성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시인이 쓴 시가 진한 감동을 줍니다. 제가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보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생명이라 부르면서 소유하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지혜라 부르면서 열망하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부요하다고 하면서 바라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영원하다고 부르면서 바라보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신실하다고 부르면서 신뢰하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아니하고,
너는 나를 영광되다고 부르면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공의롭다고 말하면서,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니, 내가 너를 정죄하거든 나를 비난하지 말아라."
여러분! 언제나 그렇습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을 빼버리고, 나와 함께 하는 성령님을 제외하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제외하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로(O) 불가능!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왜 믿지 않습니까?
그분을 나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열두 정탐꾼 중, 열 사람이 절망하고 있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 열 사람이 악평할 때에,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아름다운 땅" 이라고 외쳤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 열 사람이 우리는 이제 망했다고 울 때에도,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저 땅을 능히 정복할 수 있다." 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가슴에 품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확신에 찬 외침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망입니까? 이 얼마나 상황을 역전시키는,
위대한 힘입니까? 무엇이 이 두 사람을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은 영원한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겐 불가능은 없습니다. 능치 못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점탐꾼 열 사람과 달랐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갈렙과 같은 말을 하고, 여호수아와 같은 생각을 할 때에 세상살이가 참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입으로 다른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입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고, 나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분들을 칭찬하고 격려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내를 여러분의 남편을,
칭찬하고 격려해 보세요. 갑자기 그분의 얼굴에 생기가 살아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칭찬 거리가 없다고요? 그 사람의 칭찬 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칭찬할 내 마음이 없는 겁니다.
전도하는 것도 다른 것 아닙니다. 칭찬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랑하는 겁니다. 교회 자랑하는 겁니다.
교회 교역자들을 자랑하는 겁니다. 성도님들을 자랑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 행복을 깨는 것,
여러분의 자녀들을 망치는 것 간단합니다.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교회 욕하고, 목사 욕하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욕하고, 성도님들 욕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해 지는 것,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되는 비결도 간단합니다.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여러분의 교회 칭찬하고,
여러분의 목사님을 칭찬하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 자주자주 칭찬하면 잘 됩니다.
버스 운전수가 시동을 걸어놓고 출발하지 않자 한 승객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저씨 이 똥차 언제가요?" 그랬더니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며 그러더랍니다. "똥이 차야 가지요!"
여러분! 내가 몸담고 있는 주님의 교회를 함부로 얘기하면서 살아가는 것,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 와서 큰일 못해도 얼굴 밝게 하는 것, 이거 하나만 가지고도 교회에서 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웃고 다니세요. 왜 교회 와서 찡그리고 다닙니까? 교회 와서는 그냥 웃고 다녀야 됩니다.
시계 광고를 보면, 시계바늘이 7시 25분을 가리키는 광고는 없다고 합니다.
7시 25분을 가리키는 시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런 시계를 누가 사겠습니까? 아무도,
그 시계를 안 산답니다. 시계는 한결같이 10시 10분을 가르킨데요. 그래야 시계가 팔린답니다.
여러분 시계도 웃고 있어야 사람이 사는데, 하나님이 쓰는 사람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밝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밝게 볼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위해서 해주시다는 말이 그래요. "목사님 많이 힘드시지요."
그러면 갑자기 제가 힘이 들어요. “목사님 바쁘지요.” 그러면 제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냥 기분이 좋아서 심방을 갔는데 “아이고 목사님 환영합니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오시니까,
우리 집이 너무 환해집니다. 축복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 기분이 너무 너무 좋아집니다.
그런데 문열어 주면서 “목사님 피곤하시지요.” 그러면 말씀을 전할 때도, 기도할 때도 피곤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목사님, 요즘 재미있는 일이 많은가 봅니다. 교회에 좋은 일이 많은가 봅니다.
얼굴에 생기가 넘칩니다.“ 하고 말해 주십시오. 그래야 말씀 전할 때도 기도할 때도 힘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한길이 막혔다고 주저앉지 마세요. 다른 길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희망이 없습니다. 요즘 어른들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믿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자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입만 벌리면 불평하는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영혼은,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우리교회 부흥의 비결은 희망적인 사람,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런 창조적인 소수자들, 꿈을 꾸는 사람들,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60년대, 우리나라가 산업사회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를 살린 사람들은 공단에서 노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제품을 만들던 공원들에 의해서,
산업이 발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70년대 80년대 우리나라는 가방에 샘플 하나 들고,
전 세계를 누볐던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정보사회인 90년대 2000년대 와서는,
전자상거래, 곧 인터넷상에서 제품을 사고파는 지식 정보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10대 재벌 열 명을 뽑아내면, 정보회사의 임원 4사람이 5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배고파 가며,
그냥 뛰어 다녔던 맨발의 목회자들에 의하여 교회는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다 제품 샘플 들고,
가방 들고 다니듯이 목회자들이 심방 열심히 하고, 성도님들이 열심히 전도하면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열심만 가지고 안 됩니다. 맑은 영성을 가지고 하늘 정보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 정보인 영성을 가지고, 이 세상 지식에 대항하여 싸우고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영성을 날카롭게 해야 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맑은 영성을 가지고 믿음을 갈고 닦으면, 하나님 앞에 정말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안고,
기도하므로 우리의 영성을 날카롭게 가다듬고 “하나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시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 외치며,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순종하는,
순종의 제물이 될 때, 우리교회가 쓰임 받게 되고, 저와 여러분들이 쓰임 받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슴에 뜨겁게 품는 비전과 꿈이 있었습니다.
그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문제의 요단강을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모든 적들과 견고한 성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무너뜨리고 정복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에 뜨겁게 품고 있는 주님이 약속하신 비전과 꿈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품고 있는 그 비전과 꿈을 가로막는 문제의 요단강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약속하신 비전과 꿈을 가슴 뜨겁게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비전과 꿈을 가로막는 문제의 요단강을 맑은 영성과 믿음으로 건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운 모든 적들과 견고한 성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무너뜨리고 정복하십시오.
+ 찬양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