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강론 (이근상 신부)
부활성야미사 강론 서강에서
복음이 참 가난합니다. 부활 전례의 장엄함과 부활이라는 이 특별한 사건에 비해서 복음이 전하고 있는 부활사건은 빈무덤일 뿐입니다. 부활이 전해지는 최초의 순간, 부활하신 예수의 부재, 그저 빈무덤만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의 배짱에는 잘난체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음.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하는 단순한 이의 마음이 담담하고 단단합니다.
가장 오래된 성서사본들, 코덱스라고 하지요.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 등은 더군다나 오늘 복음에 딱 한 절을 더하고는 끝을 내고 있습니다. 9절부터 20절까지의 이야기도 부활의 환호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갑작스러운 끝은 우리를 더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마르코 16,8
교회는 부활을 이렇게 체험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더 확고하게,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수 천 년이 지나도 의심할 수 없게 전하고 싶었지만, 교회가 만난 부활은 이렇게 허술하고 가난했습니다. 부활은 섭섭하지만 전언이었습니다. 낯선 청년으로부터의 전언, 증언 능력도 없는 여인으로부터의 전언, 아무개 아무개가 만났다고 하지만, 아무 징표를 가져오지 못한, 부활한 예수의 주소를 알아오지 못한 꿈같은 만남들.
부활은 시작부터 뭔가 좀 부족한데, 사실 부활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결국, 곧 우릴 떠나버립니다. 승천이라 또 장대하게 치장을 하여 말하지만, 그가 우리를 남겨놓고 떠났다는게 부활의 빈무덤처럼 승천이 우리에게 남겨준 팩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참으로 가난하게, 너무 약하게 와서, 끝내 우리의 믿음, 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하는 마음에 남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부활을 축하해야 하는지 아니면 난감해해야 하는지 우리는 갈피를 잡기 힘든 상태입니다. 우린 모두 각자의 바람과 아쉬움과 약함이 있어, 조금 더 힘을 주실 당신께 기대고 있는데, 작게라도 힘을 보태야 할 그 분이 이토록 가난하다니, 아무짝에 쓸모 없는 내 마음 따위에 모든 희망을 두고 부활하셨다니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서 우리가 참으로 부활을 진정으로 만나려 한다면 먼저 부활의 당혹스러움, 빈무덤 뿐 아무 것도 쥘 수 없는 난감함을 먼저 받아들여야겠습니다. 기쁨을 쥐어짜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사실 좀 홀가분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선택에 진지하게 서야겠습니다. 내 마음에 깃들이신 이 가난한 분의 살아있음, 곧 부활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기 없다해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분의 현존과 무관하게 돌아가는 듯하니 외려 가시처럼 걸리적거리는 삶대신 세상에 충실하게, 그 흐름에 맞추어 신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 있음을 믿는다면, 세상의 비웃음, 때로 우리 자신의 비웃음까지 감내해야겠지만, 이 바보같은 믿음을 선택한다면 아마도 우리에겐 하나의 위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혼자가 아니리라는 위로의 나무. 죽음조차 이기신 그 분이 나와 함께 하기에 내 죽음조차 나를 홀로 두지 않으리라는 잔잔한 기쁨의 나무.
그리고 그 기쁨은 혼자만의 기쁨으로 박제된 나만의 추억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이들, 크고 작은 죽음을 견디고 있는 이들, 좌절한 이들, 실패한 이들, 무너져 내린 이들, 홀로 있는 이들, 길을 잃은 이들이 보이는 안경같은 나무입니다. 작은 이들 곁, 아주 가까이에 죽음을 이기신 그 분이, 좌절하였던 그 분이, 철저하게 버려졌던 그분이 함께 하고 있다는 발견의 기쁨이 있습니다. 어디서나 그 분을 보고, 언제나 그 분을 믿는 기쁨. 세상의 웅크린 등짝을 두드려줄 수 있는 큰 손. 너그러운 그러나 지칠 수 없는 희망을 가집니다.
해서 오늘 우리 부활의 인사는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입니다. 크고 뚱뚱한 야심, 밝게 빛나는 성취의 기쁨 뒤 그림자 속 작은 사람들의 연대입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지금 좀 외롭다면, 축하합니다. 주님이 아주 가까이에서 외로움을 아는, 그렇게 버려졌던 그 분이 곁에 있습니다. 지금 두렵고 무섭다면 축하합니다. 두렵고 무서웠으며 절규하였던 예수가 이제 그대의 두려움 곁에서 힘내라 말이 되었습니다. 지금 잠들 수 없는 괴로움, 상처가 그대를 사로잡고 있다면 축하합니다. 상처가 고스란히 깊은 그가 무너지지 않고, 당신의 불면에, 당신의 실패, 당신의 작고 큰 죽음을 이기고 그대 곁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밤에, 우리 곁을 지키러 오셨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2ryDm1zKd8j2mks6FYufUh2b1nHbRdRuTa16ETEwauseQRpvraRvSAnvPvbRzHakG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