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Ⅰ
소가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면서 밭갈이를 한다. 밭갈이를 완성하기까지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멍에는 구속이며 고통이다. 쇠가 정을 맞으면 단단해지듯 사랑의 열병에 갇혀 사랑을 배운다. 노랫말에도 ‘멍에’가 있다. 사랑과 이별의 아픔과 갈등을 겪으면서 시금석과 같이 단단해진다. 소가 멍에를 메듯 사람도 관계의 불편한 멍에를 메고 산다. 관계의 단절에서 회복하려는 고통의 멍에를 지고 사니 말이다.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단절이 악이다. 그로 말미암아 불편해지고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나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여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 좋은 결과는 이룰 수 없다. 세상에는 악이 만연하지만 고이지 않고 물 흐르듯 씻어 간다. 새로운 물이 흘러 정화하듯 사랑으로 바꾸어 놓는다.
악으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경전의 말씀이 떠오른다. 신의 섭리로 우주 만물은 움직인다. 가끔 전쟁이나 재앙으로 악을 도려내어 세상을 밝게 하기도 한다. 그런 아픔과 고통의 멍에를 딛고 평화를 찾아간다. 코로나라는 재앙으로 진통을 겪으며 그 멍에에서 벗어났지만, 살아남은 자는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본은 원폭으로 순간에 수많은 생명이 지하로 내려갔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은 평화를 얻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살아남은 자가 더 큰 죄인이라며 죄의 보속을 위해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반핵 반전, 평화, 이웃사랑의 삶을 깨우쳐 준 현세의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성찰한다. 언젠가 나가사키의 고토 신앙촌을 순례했다. 수백 년 동안 박해의 멍에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지켜왔다. 그 믿음은 ‘신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런 굳건한 믿음으로 멍에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쟁취했으니 말이다. 믿음은 신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돌아왔다.
멍에 Ⅱ
마소(牛馬)가 멍에를 메고 쟁기로 논밭을 뒤엎으며 일을 한다. 그 일을 끝내기 전에는 멍에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사람도 누구나 멍에에 얽매여 버겁게 삶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성자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 30)라며 당신에게로 오라고 한다. 어떻게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울까?
어떤 일을 하는데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에서 느껴지는 경중이 달라진다. 즐겁게 하는 것과 마지못해 하는 경우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일의 능률도 떨어질 뿐 아니라 힘이 들고 돌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마음이 편하고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삶의 길에서 여러 길이 놓여 있다.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다들 쉽고 넓으며 평탄한 길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좁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어느 날 TV 아침마당에 가수 이상우가 출연했다. 첫아들(발달장애)에게 트럼펫 연주를 시켰다. 왜 다들 불기에 힘들어하는 악기를 택했을까? 다들 불기 쉬운 떨판(리드)을 이용하여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색소폰과 같은 악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트럼펫은 소리를 내어야 하기에 힘이 많이 들어 선호하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노력을 하면 경쟁자가 적으니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한때는 전국을 누비며 마라톤을 했다. 지인들이 그 힘든 운동을 왜 하느냐고 물었다. 마라톤이라는 힘든 멍에를 통해서 삶의 올바른 길을 찾았고 그 길이 오히려 짐이 가벼움으로 다가왔다. 그 멍에로 말미암아 삶의 길에서 ‘문학과 신앙’이라는 은총을 받아 편하게 걷고 있으니 말이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편하고 거추장스럽지 않다. 몸에 맞지 않은 화려한 옷은 허울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여기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여 즐겁게 적응하면 편리하고 가볍게 할 수 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되뇌며 다가오는 멍에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련다.
멍에 Ⅲ
‘세상만사 둥글둥글!…’이라 하지만 어디 그렇게 흘러가 형통하는가? 그런 말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표현되는 바람이기도 하다. 어떤 말의 생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고 유행한다. 노랫말에 ‘사랑’이라는 표현이 많다. 그 말은 사랑이 어렵기도 하지만 고통의 쓴맛을 주기 때문에 멍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동물과 달리 희로애락의 삶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동물은 신이 만들어 놓은 규칙대로 절대복종하여 살기 때문에 행불행이 없다. 인간 삶의 길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예측불허이며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나간다. 그러하니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며 매사가 도전의 정신이다.
소가 밭갈이를 하거나 무거운 짐을 수레로 나를 때 멍에를 목에 둘러야 한다. 결코 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삶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면 가벼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어차피 거처야 할 거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더 고통이 과중하여 어렵고 힘이 든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에게 지워지는 무게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결정을 해야 한다. 긍정의 힘이 무거운 짐을 덜 수 있다. ‘잘 되리라’를 머리에 주문하여 일에 착수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멍에는 삶의 굴레에서 속박이다. 그 굴레는 사랑, 희생, 질병, 고통, 가난, 전쟁 등이다. 어쨌거나 우리와 함께하는 필연의 요소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말처럼 멍에에 두려워하면 더 무거워지고, 어쨌거나 하고 여기면 오히려 더 가벼워진다. 예수께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다.’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묵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