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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자기(自暴自棄)
스스로를 해치고 스스로를 버린다는 뜻으로, 절망에 빠져서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自 : 스스로 자(自/0)
暴 : 모질 포(日/11)
自 : 스스로 자(自/0)
棄 : 버릴 기(木/8)
기대할 것도 아무 희망도 없어 스스로에게 모질게 하고(自暴) 스스로를 버린다(自棄). 자신이나 일을 되는대로 방치하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을 맹자(孟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모른 채 일상에서 자주 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될 대로 되라며 체념하는 것을 말하는 오늘날의 의미와는 물론 차이가 있다. 줄여서 자기(自棄), 자포(自暴), 포기(暴棄)라고도 한다. 권리를 행사하지 않거나 하려던 일을 중간에 그만 두는 포기(抛棄)와 혼동하기 쉽다.
흔히 자포자기라면 좌절한 나머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래 자포자기는 그런 뜻이 아니며 자포(自暴)와 자기(自棄)는 엄연히 구별되었다.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이는 맹자(孟子)다.
맹자(孟子)는 공자(孔子)를 이어 받아 인간의 최상의 덕으로 인(仁)을 중시했고, 정의를 말하는 의(義)를 더해서 인의(仁義)를 내세웠다. 당시의 사회 혼란을 인(仁)의 정치로 인간의 도덕성을 부활시켜 극복하려 했다.
맹자는 인격의 수양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사람이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인의(仁義)였다. 그러나 당시는 전국시대라 전쟁이 치열할 때였다. 제후(諸侯)들은 누구나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왕은 없었다. 맹자는 그런 세태를 개탄했던 사람이다.
양혜왕(梁惠王)도 그런 부류(部類)의 왕이었다. 맹자를 불러 놓고는 대뜸 “무슨 이익(利益)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화가 난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그 많은 말 중에서도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저에게는 오직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은 목전의 이익에만 혈안이 된 나머지 인의(仁義)를 멀리했다. 그는 그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그래서 말했다.
孟子曰(맹자왈);
맹자(孟子)가 말했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자폭자, 불가여유언야.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사람과는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다.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자기자, 불가여유위야.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과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언비예의, 위지자폭야.
말로 예의를 비난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것(自暴)이라고 한다.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오신불능거인유의, 위지자기야.
내 몸이 인(仁)에 거하고 의(義)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를 버리는 것(自棄)이라고 한다.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인, 인지안택야. 의, 인지정노야.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義)는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광안택이불거, 사정노이불유, 애재.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맹자는 예의를 헐뜯기만 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자포(自暴)와 자기(自棄)의 사람은 상종하지 말라며 이 말을 썼다.
이 이야기는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 나오는데, 맹자(孟子)가 한 말인 자포(自暴)와 자기(自棄)가 합해져서 자포자기(自暴自棄)가 되었다.
오늘날 뜻과는 상이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또 돌아보지 않는 것도 도리를 다한 것은 아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지레 겁먹지 말고 이겨낼 각오가 있다면 밝은 내일이 기다릴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하는 자포자기(自暴自棄)의 기준은 도덕과 자기 발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간단히 말해서 자포자(自暴者)란 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인간을, 자기자(自棄者)란 착하게 사는 게 좋기야 한데 난 애초에 훌륭한 사람 되기는 글른 놈이니 그냥 되는대로 살란다 하는 인간을 뜻한다.
요컨대 자포자기의 원뜻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에 절망하여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구차한 핑계를 대며 도덕을 무시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의(仁義)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며 참된 인간다움으로 보았던 맹자는 이러한 자포자기를 인간으로서의 자해(自害)이자 직무유기(職務遺棄)로 간주하고 비판했다.
참고로 포기(抛棄)는 자포자기의 준말이 아니다. 자포자기의 포는 사나울 포(暴)고 포기의 포는 던질 포(抛)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자포자기도 스트레스 장애 증상 중 하나란 거다. 주로 학교폭력 피해자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하면서 자해와 우울장애에 시달리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단, 위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일상 용례에 한정되는 것으로 유래가 된 맹자에서 말하는 자포자기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도 알아두자.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사전적 의미는 절망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보지 아니함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의 해석과 달리 맹자(孟子)에서는 자포(自暴)와 자기(自棄)를 각각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맹자에 의하면 “자포자(自暴者; 스스로 해치는 자)는 가히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자(自棄者; 스스로 버리는 자)는 가히 더불어 할 수 없으니 말함에 예의(禮義)를 훼손하는 것을 스스로 해친다[自暴]고 이르고, 내 몸을 능히 인(仁)에 머무르고 의(義)로 말미암을 수 없다고 함을 스스로 버린다[自棄]고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즉 자포(自暴)는 말함에 예의를 훼손하는 것, 자기(自棄)는 인과 의를 외면하는 것을 이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는 자포자(自暴者)의 경우 예의가 아름다움이 됨을 알지 못하고 비난하고 훼손하니 비록 더불어 말하더라도 반드시 믿음을 볼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기자(自棄者)의 경우 인의(仁義)의 아름다움은 아나 다만 게으르고 나태함에 빠져서 스스로 반드시 능히 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주자(朱子)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정자(程子) 또한 “사람이 진실로 선(善)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면 곧 이행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비록 어둡고 어리석음이 지극한 자라도 모두 가히 점차 연마하여 나아갈 수 있다. 오직 스스로 해치는 자는 이에 항거하여 믿지 않고 스스로 버리는 자는 이를 끊어서 하지 않으니 비록 성인(聖人)께서 더불어 거처하더라도 능히 교화하여 들어가게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맹자(孟子)는 위의 말에 이어 계속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편안한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려두고 가지 않으니 슬프도다.”라고 한탄해마지 않았다.
맹자(孟子)나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말하는 자포자기는 다분히 도덕적 측면에서 자포자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한 셈이다. 특히 선행(善行) 같은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힘써 노력하지 않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자포자기나 맹자를 비롯한 현인들이 말하는 자포자기나 모두 우리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임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임상실험을 거쳐 많은 의술의 발달과 약재의 개발이 이루어져 왔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도 훌륭한 정보들을 집적하기에 이르렀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거나 과음을 하지 말라는 것, 짜거나 매운 음식을 삼갈 것, 운동을 열심히 할 것 등등 건강에 대한 수많은 조언이나 충고들을 우리는 거의 매일 귀가 아플 정도로 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대부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것에 대한 실천에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정자(程子)의 견해를 가지고 바라보자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측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누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 실행하지 못하거나 뒤로 미루기 일쑤다. 건강은 부모나 자식, 형제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자신이 잘 챙기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인 셈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망가뜨리거나 버려서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은 마치 예외적 존재처럼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한 경우 자신의 생명마저 자포자기하여 주위를 안타깝게 하는 경우도 많은 게 사실이다.
자포자기하지 않는 삶, 그 가운데 희망이 있다. 어차피 주어진 것이라면 즐기라는 말처럼 진흙 구덩이 가운데서도 미래를 보는 사람은 일어설 수 있고, 권세와 부가 충만할 지라도 순간의 자포자기는 그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신의 진정한 노력에 근저하고 있음을 처절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라는 말이 요즘에 와서는 될대로 대라는 식의 체념(諦念)으로 더 많이 쓰이지만 이렇게 뜻이 변하게 된 연유를 상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뜻을 상고하면서 몇 자 더 붙여 보고자 한다.
위에서 보듯이 원래 자포자기란 단어는 맹자 이루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발췌하여 쓴 것이다. 그 뜻을 풀어보면 스스로를 해치는(自暴) 자와는 더불어 말을 할 수 없다. 스스로를 버리는(自棄) 자와는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 예의(禮義)가 아닌 일을 말하는 자를 일러 스스로를 해치는 자라 하고, 인의(仁義)를 실천할 수 없다는 자를 일러 스스로를 버리는 자라 한다. 인(仁)은 사람이 거할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이 밟아야 할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려두고 걷지 않는다 슬픈 일이로다.
인간으로서의 신성함을 믿지 않고 버리는 것을 맹자는 자포(自暴)라고 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해친다는 뜻이다. 또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존귀함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했다. 스스로를 내버린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그때도 세상은 자포자기 인간으로 그득했다. 이 말을 한 맹자는 인간의 성품이 선(善)하다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맹자가 인간의 원 성품인 사단(四端)을 들어 보여지게 한 것일 뿐 원래의 유학기조가 성선설이다.
사단(四端)이란 실제 대단한 것이 아니라 원래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저리게 느끼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거짓을 미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이익을 물리고 남을 밀어주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선악을 판단하는 이성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누구나 원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지 않은 사람을 가르켜 우리가 흔히 인간같지도 않은, 혹은 인간이 아닌으로 말하곤 하는 이유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이는 중용(中庸)의 첫 구절에서 나오는 말에서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 인간의 성품이라 그 성품을 찾아 따르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길 즉 도라 하였고, 누구나 그 도를 바르게 닦는 행위를 즉 교육이라 하였으니 그것을 찾고 닦는 것이 인간이 살아야 하는 최고의 덕목으로 알았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또, 그 중 군자나 군주는 그 하늘이 내려준 성품을 간직하고, 그것으로 따라 행동하는 인물로서 일종의 지도자이며 규범자이고, 그 중 하늘의 초월한 권리를 이임받아 이끄는 것이 군주라 하였으며, 그 이끄는 행위에도 저마다의 질서를 이름하여 예(禮)라고 하고, 그 예(禮)라는 것이 사람사이의 질서이다 보니 그 옳은 것 의(義)를 따르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그 따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인(仁)이라고 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상호관계를 가지는데, 그 근본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아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단계적인 실천 요령을 이른 것일 것이다.
나의 몸, 그리고 가정과 사회, 국가 세계에서의 사람의 삶은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원리는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것을 지탱하는 인의예(仁義禮)란 것이 거창하게 무슨 형식이 실상은 아니라 중용의 한 구절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인자인야 친친위대 의자의야.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존현위대 친친지쇄 존현지등 예소생야.
인(仁)이란 사람의 본성이다. 가까운 것을 가깝게 아끼는 것을 크게 여기고 의(義)란 의당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진 이를 받드는 것을 크게 여기고 가까운 것에 경중(輕重)을 두고 받드는 것에도 차등(差等)을 두는 것으로 예(禮)란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람됨을 실천함으로서 자식을 키우고 효(孝)를 다하고 나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고 이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후에 천하에 그 뜻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심오한 인의(仁義)의 사상을 나는 못하겠노라는 사람은 원래 자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조차 자기 자신이 없애고(그래서 자적自賊; 스스로의 도둑) 있어 자포자기가 될대로 되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이리라.
될대로 되라고 포기하고 자신의 한 몸을 버리는 것만으로 끝나면 되는데 사람간의 도리를 말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한 몸의 이익이나 순간의 위해를 모면할 참으로 행동하고 모이고 과신하는 무리들은 자신만의 자포자기가 아닌 인간 전체에 그 위해를 가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성품이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자라게 되는 산 속의 나무들과 같아서 베어내지 않고, 혹 베어낸다고 하여도 산 전체를 보고 가지를 쳐주고 빈자리는 심어주고 하는 노력을 하여야 하는데 그러한 배려도 없이 춥다고 무작정 필요 이상의 나무를 베어와 쌓아두는 것으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사람의 행동으로 모두가 그런다면 그 산은 그 산림은 황폐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어느날 산사태로 자신에게 이를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자포자기가 나쁜 것이고 묻지마 범행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실제 더 나쁜 것은 그러한 나무를 자기 필요에 의해 무작정 잘라오는 행위일 것이고 이러한 것이 인간을 황폐화 시키고 종국에는 자신을 황폐화 시켜 스스로가 괴로운 상황이 될 것이라 여긴다.
자포자기 하는 이들의 페해만이 아니라 실상은 이기적이고 파당적이며 광신적인 행태를 보이는 여러 집단들이 모두 이러한 의미로 자포자기의 무리일 것이다.
원래 인간이 가진 좋은 마음이 살아오면서 그리고 동물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을 사(인욕지사人欲之私)라고 하여서 경계하였던 것인데, 근자에는 개인적인 사적인 것이 공공성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사(私)적인 것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포자기한 행위의 금수(禽獸), 동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러면서도 어불성설인 것은 인권이라면 인간의 심오한 권리를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포자기 보다는 자중자애(自重自愛)하는, 진정 자신의 것을 중요시 여기고 아끼면 나 아닌 다른 이의 원래의 것도 아껴주는 것이 될 것인데... 자중자애 하라면 오로지 자기 것만 귀하게 여기는 금수(禽獸)로 돌아갈라는 시도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든다.
자신의 얼굴에는 분단장하고 화사한 옷으로 치장하면서도 자신이 닥칠 앞일같은 부모형제에는 그 정서의 반의 반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가진 것만 내세우고, 광신적인 패당거리로 자기류만 잘 났다면서 다른 류를 인정하지 않고 해꽂이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몸에 흠집내기란 것을 모르는 아메바 같은 이들의 작태가 성행하는 작금의 현상이 그런 염려를 가져오게 만든다.
구소련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 화차 속으로 들어간 후, 그만 실수로 밖의 문이 잠겨 냉장고 화차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이 냉장고 화차는 고장이 나 있었다. 작동이 되질 않아 공기도 충분했고, 온도도 섭씨 13도의 알맞은 체감온도였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다른 직원이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는데 왜 죽었을까? 사람들은 그 사람(죽은 직원)이 고장 난 냉장고 벽에 남긴 글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점점 몸이 차가와진다. 나는 점차 몸이 얼어 옴을 느낀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는지 모른다.’
자포자기와 절망이 그를 죽인 것이다.
벼룩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뛸 수 있는 높이뛰기의 천재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벼룩만큼 자기 신체에 비해 높이뛰기를 그렇게 잘하는 생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벼룩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벼룩을 잡아다가 주둥이가 큰 병속에 집어 넣은 다음 뚜껑을 닫아 놓습니다. 그런데 벼룩은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계속 쉬지 않고 높이뛰기를 시도합니다. 그때마다 벼룩은 머리와 등을 병뚜껑과 수없이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 부딪히다 보면 지치고 온몸이 아파서 ‘아! 나는 이제 더 뛰어 뵈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더 이상 높이 뛰어 보았자 내 몸뚱이만 아파 예전엔 안그랬는데, 내 능력의 한계는 이제 이 병뚜껑까지 뿐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의 높이뛰기 한계를 단정 지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높이뛰기를 포기한 채 작은 병 안에서 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때 살며시 병두껑을 열어 놓으면 벼룩은 도망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또 높이 뛰었다가 몸만 상하는 꼴을 당하기 싫어서이겠죠.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한 번만 더 높이뛰기만 하면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벼룩은 높이 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 못한다, 다시 시도해 보았자 소용없다, 하는 쪽으로 의식이 굳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자포자기(自暴自棄)라고 말하죠. 즉 자포자기란 말을 우리는 될 대로 돼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세기면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스스로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죠.
우리 인간도 벼룩과 마찬 가지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나는 이제 지쳤다, 나는 이제 돈이 없다, 나는 이제 늙었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끝이다, 나는 학력이 약하다, 나는 건강이 좋지않다, 더 이상 해봐도 소용이 없다, 이런 이유들을 대면서 스스로 자책하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한두번의 실패로 자포자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는 인생을 망치는 주범입니다. 한번만 높이 뒤면 세상은 온통 당신의 것입니다. 진정한 자긍심은 자기 신뢰와 자기 존중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성공은 당신을 가두어 둔 그 병속에서 튀어 나오는 순간 바로 그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自(자)는 상형문자로 사람의 코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코를 말한다. 사람은 코를 가리켜 자기를 나타내므로 스스로란 뜻으로 삼고 또 혼자서 어떤 명사 앞에 쓰이어 ~부터, ~에서와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이다. 또한 시간이나 공간에 관한 낱말 앞에도 쓰인다. 나중에 코의 뜻에는 鼻(비)란 글자가 생겼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몸 기(己), 몸 신(身),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타(他)이다. 용례로는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하여 행함을 자주(自主), 어떤 일을 스스로 자기의 임무로 맡는 것을 자임(自任),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확신함을 자신(自信), 손수 짓거나 만든 작품을 자작(自作), 자기 스스로의 힘을 자력(自力),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욕심을 억누름을 자제(自制), 스스로 움직임을 자동(自動), 자기 힘으로 자기를 도움을 자조(自助),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어려움을 타파하여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일을 자력갱생(自力更生), 같은 패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자중지란(自中之亂),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자기의 언행이 전후 모순되어 일치하지 않음을 자가당착(自家撞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는 자문자답(自問自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 라는 자기기인(自欺欺人), 자기의 줄로 자기를 묶다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등에 쓰인다.
▶ 暴(폭/포)는 회의문자로 동물의 가죽을 펼쳐서 말리는 모양으로 날 일(日; 해)部와 出(출), 양손 모양의 글자와 米(미)의 합자(合字)이다. 햇빛이 나서 쌀을 양손으로 쬐는 것이라고 전한다. 暴(폭/포)는
사납다, 난폭하다, 해치다, 모질다, 모질게 굴다, 세차다, 맨손으로 치다, 불끈 일어나다, 업신여기다, 조급하다, 갑자기, 쬐다, 따뜻하게 하다, 햇볕에 말리다, 나타내다, 드러나다, 알려지다 등의 뜻과 사납다(포), 난폭하다(포), 해치다(포), 모질다, 모질게 굴다(포), 세차다(포), 맨손으로 치다(포), 불끈 일어나다(포), 업신여기다(포), 조급하다(포), 갑자기(포) 등의 뜻과 앙상하다(박), 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박), 희다(박)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나울 한(悍), 사나울 맹(猛), 이슬 로/노(露)이다. 용례로는 난폭한 힘을 폭력(暴力), 물가나 주가 등이 갑자기 대폭적으로 오름을 폭등(暴騰), 남의 비밀이나 비행 따위를 파헤쳐서 남들 앞에 드러내 놓는 일을 폭로(暴露),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을 폭행(暴行), 몹시 세게 부는 바람 부풍을 폭풍(暴風), 포악한 정치나 가혹한 정치를 폭정(暴政), 물가 따위가 갑자기 대폭 떨어짐을 폭락(暴落), 사납고 악함을 포악(暴惡), 난폭하게 하는 말을 폭언(暴言), 갑자기 많이 내리는 눈을 폭설(暴雪),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을 폭리(暴利), 난폭한 행동을 폭거(暴擧), 난폭하여 인도에 벗어남을 포역(暴逆), 포악한 관리를 포리(暴吏), 난폭하고 교만함을 포만(暴慢), 횡포하고 잔악함을 포학(暴虐), 음식과 술 등을 한꺼번에 많이 먹음을 폭음폭식(暴飮暴食), 범을 맨손으로 두드려 잡고 큰 강을 배 없이 걸어서 건넌다는 포호빙하(暴虎馮河), 성질이 횡포하고 잔학하여 도덕성이 없음을 포학무도(暴虐無道), 하는 짓이 난폭하며 거만하고 무례함을 포만무례(暴慢無禮), 물건을 아까운 줄 모르고 마구 써 버리거나 아껴 쓰지 않고 함부로 버림을 이르는 포진천물(暴殄天物) 등에 쓰인다.
▶ 棄(기)는 회의문자로 마늘 모(厶; 나, 사사롭다, 마늘 모양)部와 葉(기; 쓰레 받기)와 卄(공; 양손)의 합자(合字)이다. 청소 도구를 양 손으로 밀고 감을 나타낸다. 따라서 널리 버림의 뜻이다. 棄(기)는 버리다, 그만두다, 돌보지 않다, 꺼리어 멀리하다, 물리치다, 잊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질 취(取)이다. 용례로는 내버려 문제 삼지 않음이나 어떤 사물을 버림을 기각(棄却), 권리를 버리고 행사하지 않음을 기권(棄權), 버림받은 아이나 어린아이를 내버림을 기아(棄兒), 쓸데없어 버린 물건 또는 버려 두고 쓰지 못할 물건을 기물(棄物),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기약(棄約), 버려 둠을 기치(棄置), 나라를 버렸다는 기국(棄國), 활을 버렸다는 기궁(棄弓), 시체를 내다 버림을 기시(棄屍), 아내를 버림을 기처(棄妻), 세상을 버림이라는 뜻으로 윗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기세(棄世), 은애를 버림의 뜻으로 속세에 대한 집착을 끊고 진여의 길에 드는 일을 기은(棄恩), 근본을 버리고 변변치 못한 말기를 따름을 기본축말(棄本逐末),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을 기권자(棄權者)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