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76]여수 앞바다 ‘손죽도’를 아시나요?
‘여수 밤바다’ 노래도 알고, 여수 앞바다 ‘금호도’도 가봤지만, 여수에서 70여km 떨어졌다는 ‘손죽도’는 몰랐다. 우연히 <전라도닷컴> 과월호(2022년 9월호)를 뒤적이는데, 기획특집이 ‘손죽도의 여름(2)’이었다. 손죽도 우리말 땅이름을 담은 지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사진>. 이럴 수가? 여수에서 배로 1시간 반이 걸리고, 80여가구 200여명이 산다는 손죽도는 바위에 빙 둘러싸여 있는 것같다. 그 바위 등에 붙여진 이름들을 보시라.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대한민국 수많은 섬(유인도 464개, 무인도 2918개로 총 3382개로 세계 10대 섬 보유국이란다) 가운데 이런 섬을 없을 것같다.
‘이남애(88)’라는 할머니가 줄줄줄 외는 손죽도 땅이름 “여기서부터 가문 산너리, 똑바끝티, 큰여, 빈지, 보름네밭넘에, 상산엄에꼬랑물, 진거름, 개쎄빠진디, 납데이, 띠밭밑티, 온너리섬, 깨떡바, 굴비끝티, 굴바물, 큰재밑티, 큰재밑납데이, 양아리, 큰재밑민지뿌리, 큰광대터, 작은광대터, 광대터민지뿌리, 개모가지양아리, 개모가지, 근실이낼친고랑, 큰너부너리, 작은너브너리……, 이렇게 다 이름이 있어”
하하하, 정말 재밌다. 옛날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족보가 없어 100-, 150년 전을 거슬러 ‘구전口傳 구술口述 족보族譜’를 읊어대던 사람이 있었다는데(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 나온다), 할머니의 땅이름 대기는 언제나 끝날까? 점입가경이다. “바구독질이 하도 쫍은개 똑바로는 못가고 옆걸음질로 걸어야 헌다고 ‘옆걸음’, 발을 아조 째까썩 욈겨야 헌 디는 ‘잔옆걸음’, 앙거서 가야 헌디는 ‘안징거름’이라고 불렀어”
“납작하다고 해서 납데이, 덜걱덜이는 돌을 디디문 덜걱덜걱 움직인다고, 민지뿌리는 미끄럽다고 해서 불른 이름이고, 바구독이 딱 막고 섰은게 두 팔로 보듬고 조심조심 돌아간 디는 ‘독보듬고돈디’고, 앞선 사람이 손을 건네고 나중 간 사람이 그 손을 잡고 돌아야 갈 수 있는 디는 ‘손잡고돈디’여. 줄을 타야만 내려서는 디도 있어, 거그는 ‘줄멍게’여.”
허허-그것 참. 이 할머니 돌아가시면 그 누가 이렇게 촘촘히 땅이름을 외워댈까나. “역시 우리말”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온다. 그 땅이름, 나하곤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기분이 아주 좋다. 오래오래 그 이름들 간직하고 주민들에게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문화나 전통을 온통 뒤죽박죽 만들어버렸지만, 순 우리말 땅이름조차 한자어로 바꾸어버렸다. 참으로 몹쓸 짓이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더니 창경원의 남쪽이라고 원남동, 서쪽이라고 원서동 식으로 자기들 맘대로였다. 분당의 판교도 원래 너더리인 것을. 망할. 어디 한두 군데만 이럴까? 예를 들자면 끝도 갓도 없는 일. 아예 말을 말자.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우리가 이름 석 자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손죽도 출신 ‘청년장수 이대원李大源(1566-1587)’이었다. 18세에 무과 급제, 21세에 녹도(고흥 녹동읍)만호로 부임, 1587년 2월1일 고흥 연안 섬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했다. 이대원의 전공戰功을 가로채려다 거절당한 전라좌수사 심암은 앙심을 품고 2월 17일 대규모 왜적이 재침략하자 100명의 병사만 내주고 출병을 명했으니, 죽으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허나 이대원은 중과부적 속에서도 적선 20여척을 격파하는 등 사흘 밤낮으로 싸우다 사로잡혔으나 끝내 항복을 거부, 참수를 당했다. 부관 손대남에 의해 죽음의 진상이 알려지자, 선조는 심암을 한양으로 압송해 당고개에서 참수했다고 한다.
이대원은 속저고리에 혈서 절명시絶命詩 28자를 썼다고 한다. <日暮轅門渡來海일모원문도래해/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君親恩義俱無報군친은의구무보/恨入愁雲結不開한입수운결불개>. 이대원, 임진왜란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22살때 일이었다.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외로움 병사 힘 다 했으나 끝나는 인생 슬프다/임금과 부모님께 은혜를 다 못갚아/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릴 길 없네>.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은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전라좌수군의 전력은 이대원의 장렬한 죽음에서 비롯됐다”고 그의 신도비명에 적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손죽도는 1914년 전까지는 ‘손대도損大島’로 불렸을 것인가. 그 뜻을 말해 무삼하랴. ‘큰 인물 이대원 장군을 잃어 크게 손해를 보았다’는 뜻이 아닌가. 순국 직후부터 이장군을 모셔온 ‘충렬사 忠烈祠’는 손죽도 사람들에게는 섬의 수호신이 계시는 신전이었다. 이장군과 함께 죽어 떠밀려온 무명용사(박면, 김개동, 이언세, 손대남, 유언수 등) 90여명의 시신을 모셔 장사를 지낸 곳이 ‘무구武軀장터(무장을 한 시신을 장사지낸 곳)’이다. 광화문에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이 있듯, 손죽도에는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동상이 일본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리고 서있다. 무구장터엔 청동동상을, 선착장에는 석조동상을 세워놓은 까닭을 아는 이, 몇몇일 것인가?
우연히 읽은 전라도닷컴 과월호에서 깜짝 놀란 두 가지 사실. 섬 주위의 90여개나 되는 우리말 땅이름과 임진왜란 전 22살의 나이로 순국한 이대원 장군. 그 잡지가 고마웠다. <전라도닷컴>에는 역시 ‘전라도의 사람 자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또 한번 증명한 셈이다.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 창간하여 딱 한 권 거르고 현재 통권 256호를 기록하고 있는 막강한 문화잡지이다. 나 역시 창간독자로서 닷컴의 ‘마니아mania 독자’임을 자부한다. 세상 만물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 전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진리를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기회되는 대로 손죽도를 꼭 가보리라. 나와 함께 가보고 싶지 아니한가? 선착순! 흐흐.
후기1 : 고백하건대, 월간지 열혈독자임에도 매달 샅샅이 읽지 못한다. 아니, 나의 글이 어떻게 실렸을까(새살새살 찬샘통신, 지난 7월호가 29회째이던가) 훑어본 후 책꽂이에 꽂아놓기 일쑤다. 그 까닭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늙어 양로원에 있을 때 소일거리로 차근히, 차분히 읽을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흐흐.
후기 2: 손죽도 같이 갈 사람은 선착순! 이라고 썼더니, 순식간에 3명이 잡혔다. 신나는 일이다. 손죽도의 순우리말 이름을 되뇌다보니, 우리 동네도 순우리말 지명이 제법 있는 걸 알았다. 열거하자면, 새뚬, 안뚬, 뒷고래, 원젱이, 외얏물, 중뫼, 목너무, 상뚬, 뒤뻔데기, 병든배미, 여시박굴, 구수골, 말치재, 깽번, 독다리, 육덕굴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