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1
4월25일[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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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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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8U3g4-4XR4
(박유민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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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책, 복음서!>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매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가 지니고 있는 신념이랄까 의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 내 영예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 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직제자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서 지속적인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이 소중한 생명의 말씀,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 역시 저와 똑같은 신념과 의식을 갖고 복음서를 기술했을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 갖은 고초와 시련 속에서도,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 복음서를 집필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큰 노고와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오늘 우리 손에 이 아름답고 값진 생명의 말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인해, 2천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코가 자신의 삶 전체, 생애 전체, 목숨까지 걸면서 기술한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백번 천번 감사하면서, 세상 둘도 없는 보물처럼 여겨야겠습니다. 복음서는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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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9sU4mm0j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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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은 “그의 말과 행동이 옳다”라는 확증>
오늘은 복음사가 마르코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표징이 뒤따르게 해주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표징이 있어서 선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하니까 표징으로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표징의 삶을 살려면 먼저 복음을 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데 포레스는 페루 리마에서, 스페인 귀족과 파나마 출신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검은 피부를 물려받은 그는 귀족인 아버지로부터 멸시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가정을 버렸기 때문에, 마르틴은 가난 속에서 컸으며 리마 사회의 하류층 생활을 했습니다. 마르틴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의 관대함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 겸손,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의 봉사에 감명받았습니다.
그는 12세 때 머리 깎는 법과 지혈법을 배우고 의술도 익혀서 부상자를 돌보고 치료했습니다. 아침마다 산 라자로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미사에 참여하면서 마르티노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누구의 몸 안에도 하느님을 본뜬 혼이 있으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분 뜻이 아닐까? 만일 내가 사람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면, 나는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걸 거야!”
15세가 되었을 때 마르티노는 리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에 자기 자신을 바치리라고 결심합니다. 자기가 태어난 것은 완전히 이것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제도 노동 수사도 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도원의 심부름꾼이 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을 나에게 내주셨다. 나도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치리라. 주님! 지친 사람, 병든 사람, 불행한 사람을 제가 돕도록 해주세요.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저를 도구로 쓰셔서 그들이 알게 해주십시오.”
평신도 보조원으로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9년 후 수도 공동체는 그의 기도와 참회, 애덕과 겸손을 보아 그가 수도서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너무 큰 영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봉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르티노가 병든 인디언을 자기 방에 데려온 것을 보고, 이것을 수도회의 한 수도자가 비난하고 불순종에 대하여 꾸짖었습니다. 그는 꾸지람을 다 받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종이 자비보다 앞서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어느 날 자기 방에 아주 더러운 거지를 데리고 들어온 것에 대하여 비난받게 되었을 때, 마르티노는 “자비심이 깨끗함보다 더욱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마르티노가 수도회의 형제들을 존중하고 사랑했음에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의 행위 때문에 이러한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다른 수도자들이 아닌 마르티노의 행동이 옳음을 기적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마르티노가 의학적으로 병을 고치는 것뿐 아니라 그의 도를 통해서는 지극히 무서운 병도 낫게 했습니다. 마르티노가 부엌에서, 세탁실에서, 병원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는 데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생활을 놀라운 기적과 선물로 채워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줄 빵이 얼마 없자 끊임없이 바구니에서 빵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기적들입니다. 그리고 그를 공중에 들어 올리는 탈혼 상태, 또 그가 기도하는 방을 가득 채우는 빛,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일, 순간적인 병의 완쾌, 동물들의 순종, 잠긴 문을 통과하는 것 등 수많은 은사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본 동료 수도사들은 더는 그의 행동에 토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보다 더 큰 감명을 주는 것은 그의 겸손이었습니다. 수도원이 빚을 지게 되자 그는 이렇게 청했습니다. “나는 가련한 혼혈아일 뿐입니다. 나를 파시오. 나는 수도원의 재산입니다. 나를 파시오.“ 그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불타는 사랑과 봉사”입니다. 이것만 행한다면 그 행위가 옳다는 표징은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마르코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냈으며 거기서 주교가 되었습니다.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중 마르코는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는데 이들은 주교인 마르코의 목에 밧줄을 걸어서 성인을 거리에서 끌고 다녔으며, 이튿날 같은 일을 되풀이했고, 성인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교도들이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고, 사람들은 시신을 방치한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는데 그 틈을 타 신자들이 성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에 모셨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모셔졌던 성인의 유해는 829년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베네치아로 옮겨졌으며, 이를 기념하여 베네치아 사람들은 성인의 이름을 따 성 마르코 대성당을 짓고 그곳에 유해를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먼저 복권을 사야 당첨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표징은 언제나 전한 복음의 확증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마르코 성인도 마찬가지지만 수많은 성인이 시복시성을 추진할 때 죽음 뒤에 일어난 표징을 근거자료로 삼습니다. 분명 그분이 전한 복음의 삶에 주님께서 기적으로 확증해 주실 것임을 교회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다고 자신 없어 하지 말고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에 충실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표징으로 우리가 전한 복음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부모가 심부를 할 아이에게 돈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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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학생을 부르는 호칭 중에 ‘학사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교우 분들도 그렇게 ‘학사님’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제가 될 사람이기에 존중하는 의미로 ‘학사님’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등에 모시고 가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의 등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깊은 존경의 표시로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알고 우쭐해져서 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말의 등에 있던 예수님의 십자가가 땅에 떨어졌고 말은 그 일에서 쫓겨났습니다. 신학생을 학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소중한 직책을 맡을 사람이기에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말처럼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재능 때문에 사람들이 존중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예전에는 대학생이 많지도 않았고, 대학 졸업으로 받는 학위인 ‘학사’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학사님이라는 호칭도 나름 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습니다. 아니 학사 학위는 가장 낮은 등급의 학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까지 받습니다. 그렇기에 ‘학사님’이라는 호칭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닙니다.
저의 학사학위 논문 제목은 “현대인을 위한 설교(사제의 직무를 중심으로)”였습니다.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선교와 설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예수님의 설교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오로의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한 번의 설교로 신자가 3000명이 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한편의 시와 같았습니다. 지친 영혼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설교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설교를 강론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라는 말 대신에 강론이라는 말이 익숙합니다. 설교나 강론이나 본질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강론은 사제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한이면서 책무입니다. 그렇기에 사제는 언제나 성실하게 강론을 준비해야 합니다. 32년 사제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제들의 강론이 현대인들의 지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강론인지 돌아보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강론을 들으려는 교우들의 태도에도 아쉬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의 정성에 아쉬움이 더 많습니다.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표징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마르코가 전해준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4개의 복음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루카, 요한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그중에서 마르코 복음이 가장 먼저 완성되었습니다. 복음이란 ‘기쁜소식’입니다. 성서에서 기쁜소식의 의미는 전쟁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이었습니다. 다음 기쁜소식의 의미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쁜소식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막에 샘이 넘쳐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뛰어 논다고 하였습니다. 늑대와 양이 함께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평화가 주어지는 때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고 그것이 복음, 기쁜소식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가 기쁜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권위를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나병환자가 치유되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광주리가 12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징이 기쁜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제자들에게 예고했던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기쁜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복음을 증언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삶을 통해서 복음을 증언할 사명이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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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복음 선포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 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우리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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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5-18)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ㄴ)
‘복음 선포’는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예수님은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잃은 양’ 하나를 찾을 때까지 ‘끝까지’ 뒤쫓아 가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복음 선포’는, ‘우리 편’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뜻을 알려 주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고, ‘편 가르기’도 없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온 세상’에, 즉 세상 모든 곳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제외해도 되는 지역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 있긴 합니다.
우리는 그런 지역도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주려고 노력해야 하고, 길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에게”는 뜻으로는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피조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물론 동식물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뜻은 아니고, ‘복음화’는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 세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자연계와 생태계를 보호하고 가꾸고 돌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일입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가 사람들만 있고 동식물은 하나도 없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그 삭막한 세상을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 주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일방적으로 선포만 하고 그것으로 그쳐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선포한 다음에는 그 선포가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열매는 내가 전해 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만을 위한 열매가 아니라, 그 사람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를 위한 열매이기도 하고, ‘나’를 위한 열매이기도 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라는 말씀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복음 말씀 그대로 잘 실천한 사람은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구원’은 답이 정해져 있는 수학 공식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자비’이고, ‘은총’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께 ‘간청’할 뿐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또는 신앙인으로 한평생 잘 살았으니 ‘구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또 “나는 신앙생활을 잘했으니 구원받는다.”라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과 말은 ‘교만’이고, 주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믿지 않아서 단죄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고 세례받기를 거부하면 처벌하겠다.”라고 위협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을 단죄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신앙을 거부해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본다면, “그럴 줄 알았다.” 라는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건 네 탓이다.” 라고 꾸짖게 될까?
가족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가족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심판 때에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크게 슬퍼할 것입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게 행복이 되고 평화가 되고 안식이 될까?
실제로 그렇게 가족이 흩어지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한 평화, 영원한 행복, 영원한 기쁨’은 누리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식구들 때문에 슬픔과 고통만 겪을 것이고, 하느님 나라는 눈물바다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지금’ 노력해야 하고, ‘지금’ 기도해야 합니다.>
17절과 18절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들’(기적들)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주님께서 신앙인들을 위해서 그런 기적들로 도와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꼭 기적이 아니라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20절의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이고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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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이야기의 본론입니다. 군중은 빵의 기적을 목격하였지만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듯합니다.(6,30-34 참조)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체험한 만나 사건에서 모세를 보았지만, 하느님은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6,31-33 참조) 예수님께서는 가시적 현상에 빠져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는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달라고 청하는 군중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는 -이다.’는 요한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신원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그리고 ‘빵’ 말고도 ‘세상의 빛’(8,12; 9,5), ‘문’(10,7), ‘착한 목자’(10,11.14), ‘부활과 생명’(11,25), ‘길’(14,6), ‘참포도나무’(15,1)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다.’라는 표현 양식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본질 자체를 규명하기보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서 저자는 생명은 빵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며,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믿음은 영원한 생명, 곧 구원받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자기 계시는 예수님께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심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시면서 우리를 당신과 맺는 친교로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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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눈에 끝 모르게 드넓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작업을 설명하는 창세기 말씀은 참 아기자기 합니다. “생겨라” 하니 빛이 생기고 말씀대로 생긴 그 빛이 하느님께 좋으시고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모습을 갖추는 뭍과 궁창도 하느님께서 보시기 좋으셨고 ....... 꼭 소꿉장난하며 재밌어하는 아이의 놀이를 보는 듯싶습니다.
땅의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시며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라고 세밀하게 이르시는 것을 보며 정말 자상한 하느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유독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흙의 먼지로” 빚으십니다. 그리고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지요. 모든 것을 말씀 한 마디로 이루신 그분께서 유독 인간만은 손수 ‘빚으신’ 까닭에 인간은 하느님의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날 우리 안에 불어 넣어진 생명의 숨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하느님의 영을 갖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잃어버리게 된 하느님의 영을 도로 채워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여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과 느낌을 갖고 살아갑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잃어버리게 된 하느님의 생각과 뜻과 철학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하느님 영의 회복을 위한 작업’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을 하느님의 것으로 바꿔 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입니다.
세상에 물들어 병든 인간의 영이 치워지고 온전한 하느님의 영을 주입받게 된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때‘에만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때에만 하느님의 영이 임하는 양 오인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근본적인 이유를 잊은 까닭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보여주는 일보다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알리고 전하고 일깨우고 싶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은 아마도 그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어느 누구보다 더 스스로가 제일 놀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제자들이 만약에 무언가를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돋보이려는 생각으로 주님의 권능을 스스로의 것 인양 착각하였다면 절대로 하느님의 영이 함께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성령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버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이르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린 그 사람들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들이 그분의 성령으로 새로워질 때 그분께서 이르신 황홀한 약속이 우리 안에서 세상 안에서 함께 할 것입니다.
현란하고 대단한 뚜렷하고 엄청난 그분의 가장 놀라운 이적은 오늘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나, 그분의 생각을 알기에 그분처럼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나, 지고, 포기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서만 고민하는 바보 같은 내 삶이라는 걸 새깁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달라진 우리들의 삶이 아직 ‘믿지 않는 자’로 구별된 그들을 ‘믿는 이’로 변화되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귀한 사명이며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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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님]
신앙인이라면 마르코 복음을 한번쯤이라도 들여다 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성경 필사까지도 하셨을 것입니다. 아직 한 번도 안 읽어보신 분들은 필사는 고사하고 지금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한번은 본당 복사 아이들에게 성경 퀴즈 문제를 낸 적이 있는데 너무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심어주고자 네 가지 복음서 중에서 필사를 해오라고 숙제를 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복음서를 쓰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마르코 복음이라고 대답합니다. 왜냐고 물으니 “제일 짧아요”라고 대답합니다. 짧다는 것은 어찌 알았는지 대견합니다.
물론 요즘 대다수의 아이들처럼 학교 생활하랴, 학원 가랴 바쁜 아이들에게 성경 필사가 조금 가혹하게 느껴지는 아픔을 감수하고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필사한 공책을 들여다보니 조금은 실망이 앞섭니다. 글씨가 괴발개발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겐 그 안의 내용보다는 숙제가 더 급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친숙하게 하려고 했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업적 위주로 끝내려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성경 필사가 어른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어렵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업적 위주로 쓰려한다면, 그 내용을 충분히 묵상과 기도로써 쓰지 않는다면 소위 ‘죽어 있는 문자’가 되고 맙니다. 물론 어린이들에게 묵상과 기도로써 성경을 대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우리 어른들에게는 어떠한지요?
마르코 복음 사가는 우리들에게 죽어 있는 문자를 남겨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복음서를 남겨주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그래서 그분이 내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고백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필리 1,21)가 되어야 하고 “복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도록”(1테살2,13)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아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비록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직접 목격한 열 두 제자단에 속한 분은 아니지만, 그분들 못지않게 우리에게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대신해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9,16) 하신 것처럼 우리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긴 합니다만, 오늘 복음의 내용처럼 어떤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기적 같은 힘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 있다 한들 그것을 전해주는 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하느님을 말씀을 전해주신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감사드리며, 우리 또한 또 다른 마르코 복음 사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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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순보 스테파노 신부님]
마르코 성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4대 복음서중 하나인 마르코 복음서가 그것입니다.
복음사가 마르코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는 사도가 아니었고 베드로 사도의 열심한 제자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마르코에 관해 간단히 기록된 기사와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르코는 유복한 가정의 출신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수난전날 저녁 예수님을 따라 게세마니 동산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잡힐 당시 함께 잡힐 뻔하였습니다.
복음에 의하면 고운 삼베를 두른 채 사도들과 함께 도망가다가 군인들에게 잡히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4,51)
마르코는 맨 처음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나중에 사도 바오로를 따라 바오로의 협력자가 되었고 베드로의 통역으로서 헌신하였습니다. 교회의 오랜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바오로의 영향보다 베드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베드로의 통역> 또는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전도 여행을 하였고 베드로가 입으로 전한 복음을 간추려 복음서를 썼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르코 성인이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는 기원 64년경에서 마르코가 순교한 68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성인의 유해는 후에 이탈리아의 베니스 시에 옮겨져 성 마르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의 축일을 맞이하여 그분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전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고 명하심으로서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복음선포의 사명은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선포의 사명. 이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조용하고 점잖하다고 합니다. 좋은 의미로 볼 때는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전교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개신교 신자들을 떠 올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전교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열성은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열성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있는 본당에서는 작년부터 전교를 위해 가두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거리에 나가서 전단을 나누어주며 천주교에 대한 소개를 했을 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천주교도 이렇게 합니까?"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안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쳐다도 보지 않고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가두선교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다들 부끄러워하고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열성을 가지고 전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의 효과가 당장은 눈에 보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복음의 씨를 뿌린다는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더욱더 풍성히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선포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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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화가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로 알려진 폴 잭슨 플록(1912-1956)이 있습니다. 우연히 그의 작품 ‘No 5’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2006년 경매에서 이 작품은 한화로 약 1,800억에 낙찰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페인트를 뿌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액션 페인팅 기법이라고 하지만 미술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1,800억이라는 낙찰가가 거품으로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한 평론가의 글을 통해서 새로운 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아무렇게나 뿌려서 이 작품이 우연히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가의 정연한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페인트 뿌리는 힘을 조절하고, 페인트의 양과 색채를 조절해서 만든 작가의 질서가 가득한 위대한 작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위대한 작품을 손장난에 의한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으로 생각했던 저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폴 잭슨 플록과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제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하느님이 잘못되었다면서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족하고 나약하며 너무나도 무지한 우리가 하느님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부족함 그 자체인 우리가 감히 완전하신 하느님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평론가의 설명을 통해 폴 잭슨 플록의 작품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활동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이르십니다. 그러면서 여러 표징을 약속하시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표징은 무엇 때문일까요? 단순히 표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표징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보다 표징 자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표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주님을 부정하고, 주님께 원망의 말을 던집니다.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도록 더 노력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믿습니다.”라고 외치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을 먼저 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알고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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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마르코 16,15-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세상 깊숙이 들어가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모든 이에게 기쁨이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버림받아도 보듬으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미움마저 품어 사랑하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홀로라도 외로워하지 않으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어둠 속에서도 나아가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절망을 딛고 희망이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낡은 것을 벗고 새로 나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니
기쁘고 힘차게 일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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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신 차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훌륭한 집 가계도를 보면 그 가문에 큰 인물들이 함께 나옵니다. 성인들의 경우도 훌륭한 성인 곁에 성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프란치스코만 해도 10여 명의 성인이 그의 둘레에 있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를 보면 그를 둘러싼 분들이 화려합니다. 우선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가 ‘나의 아들’이라고 하는 관계이고 오늘 베드로 서간을 보면 베드로 사도와 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천사의 인도로 쇠사슬을 끊고 감옥을 나와 마르코의 집으로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베드로의 복음 선포 여정에 함께한 것일 겁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마르코는 바오로, 바르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같이한 것으로도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마르코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동반자가 되었고 그래서 복음 선포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첫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이런 관계를 본받아 선한 영향력을 넘어 영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로, 공동체도 영적인 영향력을 서로 주고받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본래 공동체란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살면 더 불어나는 법입니다. 좋은 것도 더 불어나고 나쁜 것도 더 불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베드로 서간에서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경각심을 가지라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이것을 보면 나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 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형제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 적대자 악마입니다.
우리 안에 육의 정신이 있으면 우리는 더러운 영이나 악령의 먹잇감이 되겠지요.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드셨습니다.
더러운 영이 어떤 집에서 나와 돌아다니다가 아직도 그 집이 비어있으면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그 집은 더 나빠진다는 비유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정신을 차리면, 다시 말해서 썩어빠진 정신을 버리고 제정신을 차리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악한 기운이나 정신이나 영들을 물리치고, 성령을 영접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 공동체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될 겁니다.
반대도 명확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 공동체는 복마전이 될 것입니다. 진짜 악령들이 우리 안에 머무는 복마전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악령들처럼 되어 복마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성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악령이나 받들자고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정신 차려 성령을 모시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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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삶>
- “주님의 복음 선포자,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시편89,2)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였으며 성 베드로는 오늘 제1독서 베드로 1서에서도 그를 애정 깊게 ‘나의 아들 마르코’(1베드5,13)라고 언급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사도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합니다.
성 마르코는 60-70년 사이에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주로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를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나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성 마르코를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성 베드로의 순교 이후 복음서를 썼다고 전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마르코는 성 베드로에 의해 이집트로 파견되어 그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도중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 밧줄에 목이 묶인채 거리를 끌려다니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상징으로 날개 달린 사자가 주로 등장하는데 그의 복음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자 예술적으로 그 소리를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면서 생겼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마르꼬 복음서의 저자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였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후반부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예외없이 우리 모두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의 골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요 복음 선포에 대한 반응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는 결단입니다. 복음 선포에 앞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늘 새로운 결단으로 선택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선택의 결단임과 동시에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기적입니다. 우연이 아닌 섭리의 삶이 펼쳐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친히 복음선포의 삶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다섯가지 현상들로(구마이적, 언어이적, 독사이적, 치유이적, 음독이적) 소개합니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기적의 연속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기적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면서 동시에 늘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이 뒤따르게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진리인지요!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초월과 내재의 주님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은 누구나 그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평생 늘 거기 그 자리의 수도원에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요셉수도원은 환대를 통한 복음 선포의 선교라 말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인터넷을 통해 날마다 강론을 나눔으로 전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캐나다에서 51년동안 살다가 잠시 수도원에 피정중인 노부부의 이야기도 감동스러웠습니다. 캐나다 해밀턴에서 수년 동안 굿뉴스를 통해 제 강론을 매일 읽었고 이번 12년만의 한국 방문때 수도원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어느 치과의사와 하루 일과가 끝나고 12:30분쯤 받은 카톡메시지에 대해 황매화꽃과 더불어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오늘 참 수고많으셨습니다. 형제님의 일터인 치과병원이야말로 생업의 현장이자 복음선포의 현장이요 영적전투의 현장이네요. 늘 거기 그 자리의 느티나무처럼 한결같은 정주 삶의 현장이기도 하구요. 황매화꽃 위로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이밤도 주님 사랑의 품 안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형제님! 형제님 취침시간에 저는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네요. 주님의 전사로서!”
“예, 감사합니다. 편히 푹 잘 듯 하네요.”-
오늘 복음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한 복음 선포의 명령이라면, 제1독서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복음 선포의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흡사 생생한 영적전쟁의 상황임을 연상케 합니다. 예나 이제나 믿는 이들의 삶은 영적전쟁의 삶임을 통절히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책임과 사명을 부여 받은 우리 믿는 이들은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 믿음의 전사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르쳐 주는 바,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서 주님의 은총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면서 복음 선포의 삶을 위한 필수적 요소 둘이 바로 겸손과 깨어 있음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십니다.”(1베드5,5ㄴ-7)
참 좋은 겸손입니다. 참된 복음 선포의 일꾼에게, 전사에게 우선적 자질이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의 선택과 은총, 훈련, 습관화로 주님의 겸손의 전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어지는 깨어 있음에 대한 강조입니다. 매주간 화요일 끝기도 때마다 나오는 성구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각자 삶의 자리가 복음 선포의 현장이자 치열한 영적전투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초월과 내재의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며 도와 주십니다.
오늘은 34년째 요셉수도원에 정주중인, 농장 책임과 순대방 책임을 맡은, 주님의 믿음의 용사 마르코 수사님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초에는 이때 목련꽃이 만발했는데 지금은 한달 가량 빨리 폈다 지니 봄이 그처럼 짧아진 것입니다. 또 오늘 11년전쯤 왜관수도원에서 부임하여 살던 안토니오 수사가 잠시 자리를 바꿔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뉴튼수도원에 파견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또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축제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빛 속을 걷나이다.”(시편89,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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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복음 선포의 사명!>
오늘 복음(마르16,15-20)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 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마르코는 교회의 두 큰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와 함께 동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함께 했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 때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코가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기록한 마르코 복음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씌여진 복음입니다. 기원 후(A.D.) 70년경에 씌여졌다고 하는데, 이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A.D. 66년 경)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입니다. 마르코는 주로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기초로 마르코 복음서를 썼다고 합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
오늘 독서(1베드5,5-14)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모습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5,5)
그리고 '늘 깨어 있으라.'고 권고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5,8-9)
'겸손의 대전제는 충실'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큰 덕인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충실'을 전제로 합니다.
오늘도 먼저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그 위에다 겸손의 옷을 입읍시다. 그리고 깨어 있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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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j9w-epYoJ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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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꽃과
꽃 사이에
부활의 아름다운
봄이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꽃들이 어울리며
복음의 꽃이 됩니다.
복음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지금 여기를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바르게
보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어디에서나
복음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속박한 적인
없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를
묶어 왔던
것입니다.
묶여 있던
우리 자아가
하느님께로
빠져 나오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이
되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의 일상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낮추시는 존중과
모든 것을 나누시는
평화로 우리를
복음의 삶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복음의 기쁨이
우리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사람의 복음은
사랑과 용서이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삶입니다.
사랑에
충실한 삶이
복음을
선포하는
삶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읽고
묵상하게 하는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을 통하여
배움이라는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다시
깨닫는 새로운
새아침입니다.
가장 좋은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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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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