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를 위한 노동
'인간은 유희적 동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말이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먹고 잔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을 넘어 즐기기 위해 움직이고 시간과 물자를 기꺼이 투자한다.
요즘 북중미 월드컵이 한창이다. 전 세계인이 즐기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투입되는 행사다. 따져보면 수십조 원의 자금이 움직이고 수많은 선수와 관계자들이 지구촌을 누빈다.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2002년 월드컵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놓은 사건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놀이와 즐거움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요즘 나도 모종의 유희를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거대한 괴물 하나를 깨워 바로 눕히는 일이다. 수억 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바위를 깨우는 셈이다. 무게만 해도 오륙 톤쯤은 되어 보이는 드래곤 같은 바위다. 편히 누워 있을 일이지 머리는 치켜들고 꼬리는 아래로 기울어진 채 버티고 있다.
작년 복중에는 이곳에서 동네 아우들과 복달음을 했다. 선영의 석탁 위에 씨암탉 네 마리를 삶고 산에서 캐 온 약초를 우린 물에 삼지구엽초와 산삼까지 곁들였다. 술이 고픈 김에 펄펄 끓는 솥에 부추를 살짝 데쳐 안주 삼아 한잔한 뒤 본격적인 놀이에 들어갔다. 음식을 들고 내가 정비해 둔 계곡으로 내려갔다. 위에서는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아래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곳이다. 한여름 무더위도 이곳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저만치 물러난다. 술을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는다. 동네 후배들과 농막의 부부, 형님 가족까지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만 앉을 자리가 좁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번에 대대적인 정비에 나선 것이다. 목표는 오륙 톤쯤 되는 바위를 평평하게 눕혀 사람들이 걸터앉을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탑을 쌓으며 돌을 다뤄 온 터라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남들이 봤다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장비를 불러야지,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레는 힘을 몇 배로 키워 준다. 놀이터의 시소를 생각하면 쉽다. 작용점을 중심으로 무게가 더 실린 쪽으로 물체는 기울기 마련이다. 무게의 크고 작음과는 관계없이 원리는 같다. 무게중심을 가늠해 바위 아래를 파내고 산쪽에 쌓인 흙도 걷어냈다. 빙 둘러 흙을 걷어낸 뒤 지레질을 해보았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던 드래곤이 마침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지렛대를 계곡 쪽에 대고 힘을 주면 바위는 자꾸 산쪽으로 붙었다.
문득 탑을 쌓을 때 사용했던 체인블록이 떠올랐다. 꼬리 부분에 '중량물을 올리는 띠'(목바)를 감고 체인블록에 걸어 당겼다. 체인을 한 칸씩 감을 때마다 바위가 조금씩 들려 올랐다. 무슨 일이든 시행착오는 따르는 법이다. 바위 밑에 박힌 돌을 빼내야 균형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몸 쓰는 일에 몸을 사렸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힘이 거의 다 빠질 무렵, 마침내 바위는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평평하게 누웠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들어낸 돌을 다시 바위 밑에 괴고 퍼 올린 흙으로 빈 곳을 메웠다. 바위와 돌로 기역(ㄱ)자 형태를 만들고 석판을 이용해 나머지 공간을 채워 미음(ㅁ)자 모양의 자리를 완성했다.
전에는 네댓 명만 앉아도 비좁던 곳이 이제는 열 명이 앉아도 넉넉하다. 돌에 찧이고 연장에 긁혀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생계에 필요한 일도 아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힘을 쓰면서, 그것도 칠십을 넘긴 사람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희를 위한 노동이다. 인간은 밥 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다움을 지키고 나 자신을 치유하며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다.
내가 힘을 들인 만큼 형제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쏟아지는 물보라와 발밑의 차가운 계곡물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다.
선영에 오면 시제든 한식이든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뜨곤 한다. 그러나 내가 노력한 만큼 더 머물고 싶고, 더 놀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곳이 나의 놀이터이자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그날을 위해 나는 오늘도 힘을 보탠다. 지금은 배관을 통해 쏟아지는 물줄기를 이용해 폭포를 연출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두덩 위로 떨어지는 물이 양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하나로 모여 흘러내리도록 하고있다.
누워 있는 거대한 바위처럼, 내가 흘린 땀도 오래도록 이곳에 남아 사람들의 웃음과 쉼을 받쳐주는 작은 바위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