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라
2베드 1,2-7; 마르 12,1-12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9주간 월요일); 2024.6.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인 백성이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 징표를 식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서 성경을 인용하여 하느님의 섭리를 밝혀 놓으셨는데,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 마르 12,10ㄴ) 하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초래한 역사의 위기를 하느님께서 역전시키시리라는 놀라운 섭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 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마르 12,7)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유다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3 년 동안 몸소 겪으시고 관찰하신 이스라엘 역사를 오늘 비유로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 속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소작인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로 대표되는 유다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바쳐야 할 포도원 소출은 공정과 자비로 나타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비단 개인들이 이웃관계에서 실천해야 할 개인적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어야 할 사회적 사랑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소작인인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공정과 자비로 나타나야 했던 사랑이라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 당신의 종인 예언자들을 보냈으나, 소작인들은 소출을 내기는 커녕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고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모욕도 하고 심지어 죽여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종들에 비유된 예언자들은 왕국의 남북과 시기와 신분 출신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박해를 당했습니다. 지도층에게 중용되었거나 백성들 사이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지도층과 백성들이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로 암시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냈는데,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붙잡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 대목에서부터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러나 머지 않아 현실화될 임박한 십자가 사건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요 유다인들이 저지른 최악의 죄악이 이 사건입니다. 소작인, 즉 유다교 지도자들은 그 아들인 예수를 죽여버리면 유다교의 정통성이 안전하게 지켜질 것 같은 그릇된 계산에 스스로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예수님은 암시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자처한 예수님께서 신성에서 우러나오는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백성의 광범위한 호응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은 회개하지 않고 더욱 완고하게 굴었습니다. 복음선포로부터 받는 혜택에는 환호를 보냈던 군중도 구경꾼처럼 방관하기만 했을 뿐 정작 필요한 회개는 마냥 미루었습니다. 급기야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터무니 없는 죄목을 붙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백성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몸소 일하기 시작하신 때는 그 무렵부터입니다. 지도층과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아 사라진 것 같았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사도들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세속적 역사를 부흥시키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참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일으키시는 방향으로 일하셨습니다. 세속적 이스라엘은 종교적 타락으로 멸망 당했다가 2천 년 동안이나 전 세계에 흩어져 고생하더니 현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미국이라는 최강대국의 배후를 움직여서 서방 세계에 대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는 합니다. 최근에도 이스라엘과 미국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은 가자 지구에 살고 있는 팔레스티나의 하마스 지도부와 주민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전쟁을 자행하는 중입니다.
유다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거나 믿지 않습니다. 완고하기로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장차 닥칠 새로운 역사를 내다보시면서 역사적 전환기에 꼭 필요한 자세를 알려주셨습니다.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알려주신 그 역사적 지혜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3; 마르 12,11) 하는 기도에 위기를 역전시키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경탄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는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제법 안정되어 가던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요청되던 덕목이 무엇이었는지를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다가오는 전환기적 역사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기 위한 자세일 수도 있지요.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 마지막에 언급된 ‘형제애’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우들끼리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랑’은 공동체를 둘러싼 선의의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실천되어야 할 사회적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 징표에 대해서 한국교회의 교도권과 보편교회의 교도권이 식별한 바를 간추려 보면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뚜렷한 현상은 박해로 치명 당한 순교자들이 박해 당시 뒤집어 썼던 죄인의 누명을 벗고 민족 사회 안에서 명예를 회복하고 있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 240여 년 만에 이벽 세례자 요한과 황사영 알렉시오를 비롯하여 초창기에 치명한 신앙 선조들은 ‘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 하느님의 종들’로 인정되어 시복 심사를 기다리고 있고, 이 명단에는 비록 치명할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전국 교우촌 백 여 군데를 순방하다가 길 위에서 선종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도 ‘증거자’로 인정되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강완숙 골롬바 그리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신유박해(1801년) 이후 전반기 박해에서 치명한 124위 순교자들은 2014년에 시복되어 시성 심사를 위한 절차만을 남겨 두고 있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하여 기해박해(1839년) 이후 후반기 박해에서 치명한 103위 순교자들은 1984년에 시성된 바 있습니다. 이로써 240여 년에 이르는 한국천주교회 역사에서 초기 약 백 년 동안 조선 왕조와 유림들로부터 겪어야 했던 박해에 대한 역사적 징표는 식별이 끝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야말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소작인들로 빗대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마태 23,29-30) 이 말씀은 우리 신앙 선조들의 순교 행위를 시복시성하지만 말고 자랑스런 순교 전통을 계승하라는 촉구입니다.
‘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 하느님의 종들’로 인정된 우리 교회 초창기 신앙 선조들이 보여준 치열한 성사적 열망과, 창의적인 정열로 교리를 전하려 노력한 토착화의 노력을 계승해야 하고, 특히 사목자들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증거한 바 교우촌을 돌보려던 사목적 열정도 본받아야 하며, 전반기 박해에서 치명하신 순교 복자 124위 신앙 선조들이 목숨 바쳐 지키려던 신앙의 자유를 꽃피워 신앙을 활성화해야 함은 물론, 후반기 박해에서 치명하신 103위 순교 성인 신앙 선조들이 목숨 바쳐 증거하고자 했던 복음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역사적 전환점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전환기에서 어떠한 지향과 태도를 지니고 어떻게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단계의 국면이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 전래 후 백 년 동안 겪어야 했던 박해의 죗값이 일제의 식민 통치, 국토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과 민족 분열, 친일 군사 독재와 가난 등 또 다른 백 년 동안의 고난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분단된 남쪽, 우리 대한민국은 전쟁 후 폐허를 딛고 독재와도 싸우면서 가난을 이겨낸 끝에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2016년에 국정 농단을 저지른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엄동설한에 모여 든 연인원 천만 명 이상의 촛불 시민들이 20 차례 모여 시위를 했어도 폭력이나 방화 등 범죄 행위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력과 군사력이 전 세계 10권으로 진입했고 그리고 시민의식까지 기존 선진국들보다 성숙했다고는 해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 특히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사치 그리고 몰염치한 부동산 투기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민주화의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사회 공동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에 선의의 모든 이들과 함께 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노력이 한층 더 경주되어야 합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은 만큼 빛이 더 밝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이 사회적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부모라면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본능적으로 베풀 줄 압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되돌아올 줄 알면 잘 해 줄 줄 압니다. 그런데 사회적 사랑을 행함에 있어서 본능적인 깊이와 되갚으리라는 계산보다 더 한 이치로 실천할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어떠한 되갚음도 받지 않으셨고, 이 사랑을 제자들이 계승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 사회적 사랑, 즉 되갚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마치 큰 빚을 갚는 것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어머니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자모이신 성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면 이 명칭은 빛을 잃고 맙니다. 교우 여러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