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 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일반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도 온화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로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묵상을 잘 할까?" "저 신부님은, 저 수녀님은,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어떻게 저렇게도 덕스러울까?"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
"저 자매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해서 저렇게 살을 뺐지?"
"저 자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예뻐졌지?" "
저 사람이 입은 옷이 참 멋있다. 어디에서 샀지?" 아니면
"저 사람은 성질이 대개 나쁘군. 아니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저 사람 형편없는 사람이군. 신부가, 수녀가, 신자가 뭐 저래?"
"저 사람은 부정축재 자야, 저 사람은 강도야, 저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야.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등 등.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과연 나는 어떤 소리를 주로 많이 듣고 또 어떤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 받은 사람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사목 회장이나
구역반장, 단장이나 모두가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생각이 그 생각이지 상대방을 크게 놀래킬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이라면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도 아무런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그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그냥 그냥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라는 놀라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 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듯이 맑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들에게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삶은 신앙인들 특히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가능하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에 충실한다면 분명히 몇 년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랠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디에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저 사람이 옛날의 그가 아니네!
저런 여유가, 저런 평화가, 저런 희생이, 저런 온유함이, 저런 사랑이, 저런 기쁨이, 저런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네."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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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임철규 교수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눈의 중요성만큼이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로
‘눈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이 ‘안다’는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배제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보고 알게 된 것을
전부로 여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힐 때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그분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관계나 과거를 속속들이 기억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이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자신들이 눈으로 본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일 뿐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수님의 신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그 결과 그들은 기적을 누리지 못합니다. ‘앎’이라는 견고한 벽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
은총의 통로를 막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때때로 눈을 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경험적 지식이 주님의 은총을 가로막지 않도록
겸손히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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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석 라파엘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
(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전주교구 이정석 라파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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