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기법을 통한 드라마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비참한 풍경은 전쟁이다. 전쟁은 약육강식의 드라마이고, 이익 추구의 왜곡된 형태이다. 영토 확장을 통한 욕망의 극대화이고, 또한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인간 욕망의 뒤틀림이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트라우마의 정신적 암의 형태로 부작용을 지속시키기도 한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건물과 도로는 다시 복구할 수 있지만 정신적 트라우마는 좀체 회복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바로잡을 수 있지만 형태가 없는 것은 그 잘못의 실마리를 쉽게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정신적 트라우마는 사랑의 온기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치유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자의 끔찍한 기억을 함께 공유하는 체험의 공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신도 그 사람과 함께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그 참옥함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프랑스 감독 미셀 하자나비시우스의 <더 서치>(The Search, 135분)는 전쟁의 후유증 극복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90년대 말 러시아의 체첸공화국 침공을 소재로, 부모를 잃고 18개월 된 동생을 남의 집 앞에 버린 채 탈출한 한 소년의 트라우마 극복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가해자인 러시아의 신병으로 입대한 니콜라이 청년이 순박한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드는 드라마이다. 아홉 살 체첸 소년 ‘하지’ 와 러시아군의 신병 청년 니콜라이의 참혹한 여정이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 여자는 체첸 난민 캠프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어루만지는 ‘헬렌’이라는 여성이고, 다른 여자는 EU 인권위원회에서 파견되어 그들의 실상을 조사하는 인권 활동가 ‘캬홀’이라는 여성이다. 그들 우 사람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일종의 보호와 감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와 니콜라이의 서사가 영화의 날줄이라면 헬렌과 캬홀의 이야기는 씨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날줄과 씨줄이 질서 있게 얽혀 한 필의 베를 직조하듯이, 이들 네 사람의 남녀 이야기는 이 영화의 논리적 서사를 완성시키고 있다. 두 사람의 남자 이야기가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면, 두 여성의 인간적인 면모는 드라마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을 연출한 미셀 하자나비시우스는 자신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아티스트>로 2012년 제 8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하여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의상상을 수상하여 세계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그는 지금까지 상업영화 등을 만들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혹한 풍경을 통한 인간의 험난한 여정이라는 목직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아티스트>가 무성영화의 형식으로 1920년대의 영화적 갈등을 포스트 모던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이번 영화는 전쟁의 살육 현장에서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형식적 특성은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통해 드라마를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위해 감독은 건물이나 풍경을 비롯한 미술적 미장센, 인공조명을 배제한 자연 조명,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까지 연출의 세공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사의 씨줄 : 하지와 니콜라이의 광기
체첸의 소년 ‘하지’(압둘 칼림 마무치에프 분)와 러시아군 신병 ‘니콜라이’(막심 에멜리아노프 분)의 서사는 이 영화의 시작에서 끝을 통과하는 씨줄의 역할로, 전쟁의 참혹한 여정을 표현하는 두 개의 축이다. 하지는 창문 유리창을 통해 러시아군에 의해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19개월 된 동생을 포대기에 싸안은 채 그곳을 탈출한다. 그러나 누나 라리사의 아들은 하지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배고픔에 보채는 갓난 동생의 울음소리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위험 신호가 된다. 하지는 남의 집 앞에 아기 포대기를 내려놓고 도망친다. 그 이후로 그는 동생을 버렸다는 죄의식에 실어증에 걸려 말문을 닫아 버린다. 그렇게 해서 그는 체첸 난민 캠프에 흘러들어 구호활동을 하는 ‘헬렌’(아네트 베닝 분)에게 발견된다.
러시아 진압군에 신병으로 입대하게 된 ‘니콜라이’는 순박한 청년이다. 그런데 잔쟁의 비인간적인 풍경은 그의 본질을 변화시켜 버린다. 병사의 죽음을 어이없게 처리하는 상관에게 폭행을 당하고, 고참병들의 비인간적인 장난질로 인한 인간적인 모욕감 등으로 그의 순박한 본성은 변질되어 버린다. 결국 그는 후방의 시체 처리반에서 전방의 체첸의 침공군 병사로 전보되어 살육의 현장에 참여하게 된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는 수미쌍관의 형식으로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프닝 시퀀스는 한 병사의 비디오카메라에 잡힌 체첸의 참혹한 현장이 소개된다. 스탠다드 화면의 작은 영상에 잡힌 풍경은 죽어 넘어진 동물의 사체, 전쟁으로 무너진 체첸의 건물 등 황량한 풍경이다. 비디오카메라로 풍경을 찍고 있는 병사는 화면을 보면서 농지거리로 내용을 설명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장난기와 욕설로 가득 차 있다. 러시아 침공군의 오만한 태도를 은유하고 있다. 마지막 시퀀스는 니콜라이를 비롯한 병사들이 죽은 체첸인들의 품안에서 시계와 지갑 등을 훔치는 장면이다. 니콜라이는 비디오카메라를 훔쳐 그것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풍경을 찍으며 농지거리와 욕설로 화면의 내용을 설명한다.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오프닝 시;퀀스의 병사가 바로 니콜라이였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두 개의 시퀀스는 감독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에서 러시아군 병사가 비디오카메라로 전쟁의 풍경을 담는 것은 진압군의 비인간적인 태도를, 다른 하나는 흔들리는 핸드헬드 영상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으로 낱낱이 고발하는 시산이다. 이처럼 니콜라이가 전쟁의 풍경을 담는 행위는 두 개의 주제적 층위를 은유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전쟁의 광기에 휘둘린 니콜라이의 오만한 태도를 통해 전쟁이 한 인간을 이렇게 변질시킬 수도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체첸 소년 하지와 러시아군 신병 니콜라이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참혹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하지는 동생을 버린 죄의식과 전쟁의 공포 때문에 실어증에 걸려 말문을 닫아버린 상태로, 니콜라이는 전쟁의 광기로 인해 자신의 본질적인 순박함과 정의감을 잃어버린 채 아무렇지도 않게 살육을 감행하는 전쟁 기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지는 헬렌과 캬홀(베레니스 베조 분)의 휴머니즘과 사랑의 감정에 동화되어 결국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말문을 연다면, 니콜라이는 이 지구상에 전쟁이 계속되는 한 광기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서사의 날줄 : 헬렌과 캬홀의 휴머니즘
난민 캠프의 구호 활동가인 헬렌과 인권 활동가 캬홀의 이야기는 이 영화의 날줄에 해당된다. 하지와 니콜라이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면 헬렌과 캬홀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헬렌은 난민 캠프에서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체첸 난민들의 전쟁 후유증을 치유하는 역할을 맡고, 캬홀은 EU 인권위원회에서 파견되어 전쟁의 실상을 조사하여 보고하는 인권 활동가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그들 두 여성의 차이점이다.
하지는 처음 헬렌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지만 그곳을 지키는 군인들의 군복에 압도되어 그곳을 뛰쳐나오게 된다. 차를 세운 채 점심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캬홀에 의해 발견되어 하지는 그녀의 숙소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하지의 실어증은 그녀를 답답하게 만든다. 조사관 활동의 무력감과 향수병에 젖어 있는 그녀는 하지를 말 상대로 평안한 안식을 취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지는 좀체 말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진심을 다하면 결국은 통하는 법이다. 캬홀이 자신의 계산적인 업무를 벗어던지고 사랑의 감정으로 다가가자 하지는 비로소 굳게 닫아걸었던 말문을 열게 된다.
소통이 되지 않는 캬홀이 헬렌을 찾아가 하소연하며 하지를 위탁하려고 부탁하자 그녀를 꾸짖는 헬렌의 말은 사랑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그게 그렇게 답답하면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으면 되잖아요?”
헬렌의 이 말은 상징적은 은유를 드러낸다. 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인내하며 진심으로 상대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심리적 소통의 방법이다. 결국 캬홀은 자신을 반성하고 하지를 자신이 맡아서 함께 하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캬홀이 새천년의 흥분된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비지스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지만 하지는 그저 불안한 눈으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캬홀이 밖에 나간 틈을 이용해 비지스의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은 하지의 말문이 열리게 된 것을 암시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결국은 난민 캠프에 들어오게 된 누나 라리사(주크라 뒤슈빌리 분)를 만나게 되면서 하지의 불안하고 참혹한 여정은 끝이 난다. 하지와 니콜라이의 여정이 전쟁의 트라우마와 광기를 은유한다면, 헬렌과 캬홀의 여정은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역할을 나타낸다. 가장 여성적인 것이 가장 모성적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고 있다. 그렇다. 여성적인 것의 본질은 곧 치유이다.
미셀 하자나비시우스의 <더 서치>는 전쟁의 광기와 치유에 관한 영화이다. 제목의 ‘서치’(search는 이제야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제목처럼 무언가를 ‘찾는’ 영화이다. 하지와 니콜라이의 이야기가 전쟁의 트라우마와 광기를 찾는 과정이라면, 헬렌과 캬홀의 서사는 그것들을 치유하는 사랑과 공감을 찾는 여정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극복과 치유의 열린 결말을 지향하고 있다. 씨줄과 날줄의 서사는 답답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지류를 벗어나 유장하게 흐르는 본류에 합류하게 된다.
전쟁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전염병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나라도 더 이룩하려고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더 서치>는 그러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장엄한 조곡인 셈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 어둡고 음산한 조곡 속에서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서치' 영화가 보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인간에게 내재된 광기를 건드리지 말기를!
전쟁은 그것을 건드리기에 휴전이 되어도
트라우마로 계속 남아 있습니다.
김문홍 선생님의 평, 재미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