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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풍 령
대충 짐작하겠지만 추풍령에는 추풍령 감자탕이 없다. 그래도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추풍령을 가는 방법은 차를 가지고 가느냐 마느냐에 따라 길이 각각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무작정 달리다가 추풍령 휴게소로 접어들면 되고 후자의 경우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로 가면 된다. 버스로 가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다시 한 번 갈아타는 수고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 방법은 적극 추천하고 싶지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추풍령은 무궁화호 열차로 가야 제격이다. 서울과 부산의 딱 부러지는 중간지점에서 내리면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친 것처럼 저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추풍령 역사가 앞을 가로막는다. 시골 역사들이 대략 그렇듯이 감나무와 측백나무가 좌우로 도열해 있고 역사의 뒤, 탑승구 쪽 화단에 맨드라미나 개량종 무궁화, 국화 같은 향토색 짙은 꽃들이 올망졸망 심겨 있다. 꽃이 만발한 계절에 와도 역사가 가난하고 좀 추워 보인다.
개찰구를 벗어나 역사 앞으로 나오면 우선 속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이라더니, 고개는 무슨 고개? 자그마치 령이 아닌가. 옛사람들은 고개의 험하기와 위치를 따져 령, 재, 치, 티 순으로 이름을 매우 엄격하게 붙였다. 즉 구름과 머리를 맞대는 정도의 가파른 고개만이 령이란 칭호를 얻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지명조차 추풍령(秋風嶺)이다. 봄바람도 아니고 매서운 가을바람 아닌가. 추풍령 역사의 소속이 충북인 관계로 아찔한 절벽까지는 바라지 못하더라도 다소 가파른 고개와 그 고개를 훑고 가는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게 몰아칠 줄 알았는데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고개는 고사하고 평평한 평지에 낮은 산과 들, 여름 논의 피처럼 볼썽사납게 찡긴 상가와 농가들. 김이 확 새는 기분을 다독거린 뒤 역사 앞에 세워진 추풍령 노래비를 거듭 읽어도 사기당한 기분에서 완전히 놓여나지는 못할 것이다.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니던가.
어쨌거나 거듭 말하거니와 추풍령에는 추풍령 감자탕이 없다. 대신 크라운 베이커리나 태평 해장국집, 수산횟집, 돼지 갈비로 유명한 할매집이 있다. 지금은 할매집이 한적한 국도 변에 작은 정원까지 딸린 근사한 식당으로 변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추풍령 장터로 들어가는 길모퉁이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할매집의 아귀가 맞지 않는 미닫이 유리문을 덜커덕 밀고 들어서면 화덕이 붙은 여섯 개의 탁자가 놓여 있고 마주 보이는 가겟방 장지문에 파리가 평균 이십여 마리는 앉아 있었다. 물론 가겟방에도 탁자 네 개를 두고 천장에 파리 잡는 끈끈이를 길게 늘여 붙이고 손님을 받았다. 색이 바랜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나오는 파절이는 금방이라도 머리를 풀고 하늘로 올라갈 듯 풀풀 날아다녔고 다른 밑반찬도 볼품이 없으며 환경 역시 불결한데도 손님이 그 집 파리 떼처럼 오글오글 끓었다. 할매집의 돼지 갈비와 동치미 때문이었다. 그때도 나는 모 경제지에 <맛집 탐방>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 배즙과 양파즙에 하룻밤 미리 재운 뒤 양념한 돼지 갈비는 입에 녹을 만큼 육질이 연하고 먹고 나면 혀가 약간 매옴하다. 여기에 살얼음이 도는 할매집의 동치미를 곁들여 마시면 코끝은 찡하지만 은은한 향이 입 안에 오래 남는다, 라고 제법 감상적으로 쓴 기억이 난다. 추풍령에 있는 식당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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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의 빛나는 한때는 있기 마련이다. 나는 정신적인 키가 하룻밤에 한 뼘씩은 자랐던 ㄱ여고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니던 ㄱ여고는 ㄱ시에 있었다. 새벽에 집을 나와 여섯 시 십오 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완행열차를 타고 추풍령을 거쳐 신암, 직지사를 지나면 ㄱ시가 나온다. ㄱ여고에 다니던 3년 내내 나는 하루 두 번씩 추풍령을 지나쳤던 셈이다. 아마 그 시절 추풍령 역사를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ㄱ여고 교복은 앞면과 뒷면에 큰 주름 하나가 깊게 잡힌 에이라인 스커트였다. ㄱ여고 학생들은 의자에 앉으려면 으레 치마를 잡고 옆으로 사삭, 돌렸다. 학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교복 스커트의 주름이 구겨지는 걸 막자면 주름이 없는 쪽으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안에서건 밖에서건 ㄱ여고 학생들이 치마를 돌리는 동작은 사관생도처럼 일사불란했고 그 광경은 일찍이 그쪽 지방의 몇 안 되는 명산물에 속했다. 그때 나는 의자에 앉으려고 치마를 돌리거나 친구들과 잡담을 하느라 추풍령 역사를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기를 쓰고 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ㄱ시에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가 장혜련이다. 아이들은 권미란과 장혜련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같은 반 같은 분단에 나란히 앉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떨 땐 혜련이의 등을 철썩 때리며 야 권미란, 하고 부르기도 했고 어떤 날은 내 뒤통수에 대고 장혜련, 의기양양하게 호명하기도 했다. 난 권미란이야. 이름을 밝히면 아이들은 볼멘소리로 비슷한 것들이 붙어 있으니까 헷갈리잖아, 하며 눈을 하얗게 흘겼다. 우리는 생긴 것도 다르고 출신도 명백히 달랐다. 장혜련은 옷을 맵시 있게 만들기로 소문이 난 모드 양장점의 외동딸이고 난 시골에서 갓 올라온, 그럼에도 여자들만 사는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해서 ㄱ시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권씨 집안의 흔한 여자들 중 한 명이었다. 장혜련은 ㄱ시 번화가 모드 양장점의 이층에 살지만, 권미란은 지붕이 새는 오래된 기와집에서 살았다. 장혜련은 희고 고운 피부에 광대뼈가 약간 나온 귀여운 인상이었고, 권미란은 짙은 눈썹 네모진 얼굴에 피부색이 노르께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이유를 스무 가지쯤 댔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너희 둘은 어쨌든 비슷하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만 해도 교복 하나로 3년을 버티던 시절이어서 다들 옷을 크게 맞춰 입었다. 손목이 쑥 들어갈 만큼 허리가 헐렁해야 부모들은 교복이 몸에 맞는다고 했다. 그처럼 옷을 크게 입어도 3학년이 되면 교복 치마가 작아져서 벌어진 옆구리 지퍼 사이로 속옷이 훤히 보였다. 그러면 옷핀으로 여민 옆구리를 상의 끝자락으로 숨기고 다니기 바빴다. 그런 시절에, 감히 신입생인 주제에 나는 장혜련처럼 몸에 딱 맞는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헷갈린 이유도 교복 때문이었다. 학교가 지정한 모드 양장점의 문을 열었을 때 보라색 터번을 쓴 여자가 나를 맞아주었다.
골격을 보니 크지 않게 생겼네. 교복이래도 기왕이면 예쁘게 입지 뭐. 몸에 맞게 해도 괜찮지?
1970년대 중반, 머리에 터번을 쓴 여자는 흔치 않았다. 비로드로 만든 보라색 터번에 홀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머릿수건이나 머플러를 쓴 여자를 본 적은 있어도 이슬람교도처럼 머리에 터번을 쓴 여자는 처음 봤고, 담요나 요가 깔린 바닥은 본 적 있어도 사람이 다니는 곳에 깔린 서양 카펫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 보고 또 그걸 직접 밟아 폭신한 촉감까지 즐기던 중이었으니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터번의 천인 비로드가 내뿜는 보랏빛과 카펫의 밝은 감색에 압도당해 그야말로 황홀한 상태에서 치수를 재기 위해 팔을 올리고 있는데 웬 여자애가 빛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여자애는 양장점 카탈로그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흔히 우리가 ‘가다마이’라고 불렀던 새빨간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여자애의 흰 폴라티와 검은 나팔바지, 새빨간 양복저고리의 완벽한 조화에 내 눈은 얼마간 시력을 상실한 터여서 선은 보이지 않고 면만 보이더니 급기야 겹치거나 하나로 뭉친 여러 개의 덩어리가 공중에서 빛을 내며 떠다니다가 급물살을 타고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거였다. 반들거리는 보라색, 밝은 감색, 특히나 여자애가 입은 ‘가다마이’의 새빨간 색은 권씨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금기시되던 색상이었다. 그랬으니. 어머, 얘 치수가 우리 혜련이와 같네.
터번을 쓴 여자가 내 치수를 불러 주다가 재단사에게 한마디 했다. 드디어 교복 찾는 날이 다가왔고, 교복이 맞아도 너무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큰어머니와 같이 갔으면 옷을 이렇게 맞추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나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작아서 못 입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보다는 큰어머니의 매운 손에 이끌려 모드 양장점으로 득달같이 쳐들어갈 일이,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곤 옷 짓는 일밖에 없을 텐데 눈은 어따 두고 옷을 이 따위로 만드느냐고 불같이 화를 낼 큰어머니가 난감했기 때문이다. 모드 양장점 여자의 보라색 터번과 감색 카펫은 큰어머니의 호통 한 방이면 본래의 빛과 색을 잃고 물 빠진 걸레 꼴로 추락할 게 뻔했다. 나는 장고를 거듭한 끝에 ㄱ여고는 원래 교복을 몸에 딱 붙게 입는 것이 교칙이라고 둘러댔다. 눈썰미가 좋은 권씨 집안 여자들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러고는 안방으로 몰려가 교복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까보기도 하더니 접어 넣은 시접과 단이 넉넉해 작으면 언제든지 늘일 수가 있겠다며 교복 사건은 그것으로 흐리마리 무마가 되었다.
혜련이와 나란히 앉게 되었을 때도 내 짝이 모드 양장점의 ‘가다마이’인 줄은 몰랐다. ‘가다마이’를 벗은 장혜련은 삼각자를 잘 빌려 주는 애이고 우리 반에서 연필을 가장 뾰족하게 깎을 줄 아는 평범한 아이일 뿐이었다. 수업을 일찍 마친 토요일이면 혜련이와 나는 ㄱ시를 쏘다녔다. ㄱ시는 멀리서 보면 뱀이 풀숲을 지나는 형세로 중심가가 구불구불하면서도 길게 뻗어 있었다. 신성일과 최무룡을 비슷하게 그려서 상영 중인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신성일인지 최무룡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던 황금 극장의 모호한 간판 밑에는 한겨울에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인 사주쟁이가 자리 잡고 있었고, 한일시계점과 전당포를 지나 길이 끝나는 곳에 대성 사진관이 삐뚜름하게 붙어 있었다. 대성 사진관의 진열장에는 15도 각도로 머리를 기울인 ㄱ여고 이명희가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찌르고 우수에 찬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족사진과 백일 사진도 같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이명희의 흑백사진이 단연 돋보여서 우리는 대성 사진관 앞에만 오면 진열장에 붙어 서서 사진이 실물보다 낫네, 아니네 눈이 좀 삭아 보이네, 단체로 품평을 하곤 했다. 아이들의 반응에 탄력을 받은 이명희는 대성 사진관 말고도 다른 사진관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지만 이번엔 왠지 표정에서 가식이 느껴졌고 볼을 찌른 손가락도 전보다 굵고 단단해 보였다. 당연히 그 사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대성 사진관의 슬래브 지붕 위로 걸친 듯 놓인 육교에는 ㄱ시의 바람이란 바람은 전부 몰려들어 그 위를 지나는 여학생들의 교복치마를 가차 없이 뒤집어놓았다. 일부러 시멘트 바닥에 두드려서 나달나달하게 만든 교모를 눌러쓴 남학생들은 육교 밑에 진을 치고 서서 여학생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아무리 치마를 부여잡고 종종걸음을 쳐도 심술궂은 바람은 어느 틈엔가 치맛자락을 쑤석거려 육교를 지나는 여학생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육교를 건너지 않고는 ㄱ여고도 ㄴ여고도 갈 수가 없었다.
햐, 빨간 칠 부 빤스 지나간다.
온다 온다, 팔팔하게 물 좋은 하늘색 쫄쫄이 빤스가 와요.
남학생들은 육교 위 여학생들의 팬티를 감상하다가 지각을 하는 통에 아침이면 번번이 교문 앞에 일렬로 늘어서서 ‘줄빳다’를 맞았다. 쥐를 잡아 만두 속에 넣는다고 소문이 난 쥐고기집 왕만두와 언제나 면이 퉁퉁 불어 있던 딸랑이집 가락 우동을 먹은 뒤 혜련이와 나는 ‘가다마이’로 바꿔 입고 버스 정류장 옆 런던 다실로 향했다. 우리가 가는 시간에 주로 판을 돌리던 런던 다실 디제이는 다리를 약간 절었다. 그 시절 디제이들은 왜 하나같이 장발이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도 차랑차랑한 긴 머리를 흔들며 곧 서울로 음악 생활을 하러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음악 생활이라는 게 음악을 하겠다는 것인지 음악적으로 살겠다는 뜻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혜련이와 나는 그냥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들큼한 밀크를 마시며 팝송을 듣다가 노래 가사처럼 우리 앞으로도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다가올 컴컴한 미래를 숨 가쁘게 밀어내며 역으로 달려가면 여덟 시 통근 열차 개표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바이 바이.
혜련은 내가 입었던 ‘가다마이’를 품에 안고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밤 기차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가다 보면 어느새 직지사도 지나고 신암도 지나 추풍령이 다가왔다. 추풍령은 안내 방송을 듣지 않고도 저절로 알았다. 차창을 긁는 바람소리가 표효효, 목을 빼고 일제히 짖어 대는 승냥이 떼의 울음소리처럼 귓속을 날카롭게 후비면 추풍령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눈을 질끈 감고 추풍령이 어서 지나가기만 기다리지만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추풍령은 대구과 대전 사이의 역 중 가장 긴 구간이었다. 객차와 객차의 연결 고리에 묶인 안전 쇠줄이 절컥거리는 소리, 기차 바퀴가 철로 위를 구르는 소리 틈으로 승냥이 떼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러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그 소리를 배경삼아 훠이훠이 추풍령을 넘고 있는 게 보였다. 산발한 머릿단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고 열 개의 발가락조차 제대로 가두지 못하는 여자의 해진 신발은 검붉은 피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발가락에서 흐른 핏물은 넓게 퍼진 백두대간의 허리를 붉게 물들이고, 싸락눈이 내리는 초겨울이면 피가 고인 웅덩이는 번들번들 얼어붙고, 여자는 자신의 피가 얼어붙은 빙판길을 위태롭게 걸어서 간다. 다리가 붙어 있는 한 마냥 걸어서 가야 하는 곳. 추풍령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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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이 매운 어느 토요일 밤, 기차를 놓쳐 혜련이네 집에서 자게 되었다. 그날 모드 양장점의 이면을 보고야 말았다. 또한 내 짝 장혜련의 삶의 이면도. 모드 양장점의 살림집으로 올라가는 이층 계단은 가게 한쪽 귀퉁이에 있었다. 각종 두루마리 천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쟁여진 계단을 올라가니 찢긴 비닐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송판이 함부로 굴러다니는 침침한 복도가 나왔다. 혜련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책상과 의자 위, 서랍장 위, 빈 공간이란 공간은 무질서하게 쌓인 옷과 책으로 덮이고 이불은 굴을 판 것처럼, 아침에 몸이 빠져 나간 상태 그대로 둥그렇게 들린 채 깔려 있었다. 이불을 걷고 겨우 밥상 들일 자리를 마련했다. 장혜련이 들여온 저녁상. 먹는 행위에 인생 전부를 바치는 권씨 집안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밥상이었다. 당시 귀한 반찬에 속했던 소시지가 바짝 마른 채 우묵한 프라이팬에 담겨 있고 석유 그을음이 새까맣게 낀 양은 냄비 속에는 생선찌개인지 생선국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그들먹하게 들어 있었다. 성의 없고 불결해 보이던 반찬은 먹어보니 의외로 맛이 있었다. 게다가 혜련은 한술 더 떠서 트레이닝 바지를 뒤집어 입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때가 안 탄 쪽으로 또 한 번 입은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혜련의 방에 쌓인 비싼 옷들은 모조리 때가 타 있었다. 혜련이네는 더러워진 옷을 하나씩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을 때 한꺼번에 빨아서 입는 집이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의’와 ‘식’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주생활도 가정 과목에 포함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이 안 되는 집 꾸미기 같은 것뿐이다. 정작 실생활에 필요한 가전기기 작동법이나 현실적으로 보탬이 되는 주식, 부동산 관련 법 따위는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만 모아 가르치기로 굳게 맹세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그런 형편인데 1970년대 학교는 오죽했겠는가. 1970년대 여고생들은 순결과 청결을 강요받고 있었다. 순결하지 못한 여자는 사회에서 매장 당했고 청결하지 않은 여자는 그 즉시 축출 당했다. 여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80퍼센트 이상이 현모양처(그때는 현모양처 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다. 결혼만 하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였고, 문화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는 깔고 앉을 스카프를 하나씩 가져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남자의 정액이 묻은 의자에 앉으면 임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 권미란은 아직도 기억한다. 남자가 사정한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면, 보는 동안 쌀뜨물 같은 정액이 자궁 속으로 스며들고 그 정액이 난자와 결합해서 아기가 생길 수도 있다던 ㄱ여고 가정 선생을. 그러니까 1970년대 남자들은 아무데서나 마구 사정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여자들은 의자에 함부로 앉으면 아기가 막 생길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데나 앉아서 남자의 정액이 묻었을지도 모를 바지를, 그것도 뒤집어 입다니! 혜련은 미혼모가 되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여자애로 보였다. 나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밥상을 들고 나가는 혜련의 뒤를 따랐다. 혜련이네 부엌은 정말이지 부엌이랄 수가 없었다. 최소한의 부엌 용기만 있었는데 그마저도 사람의 손길이 자주 닿지 않은 듯 보였다. 양장점 언니들 중 아무나 들어와 대강 끓여서 끼니를 해결하는 눈치였다. 양은 대야가 얼어붙은 수돗간은 물을 안 쓴 지 오래되었고 아래층 난로에서 데운 물로 간신히 고양이 세수만 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혜련은 그 모든 살풍경한 것들을 엄마가 너무 바빠서, 라는 말로 대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모드 양장점의 재봉틀 소리는 밤새 들들들, 건물 전체를 울렸다.
엄마의 다리는 늘 퉁퉁 부어 있어. 일감이 많이 밀리는 신학기나 명절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재봉틀만 돌려. 우리 엄마가 터번을 왜 쓰는 줄 아니? 머리 감을 시간이 없어서 쓰는 거야.
그 방의 창은 길가로 나 있었다. 외풍 탓에 비닐을 한 겹 덧댄 창을 열고 내려다보면 모드 양장점의 간판 뒷면이 고스란히 보였다. 뒷면은 붉은 녹이 슬고 깨어지거나 금이 간 곳을 때운 흔적들로 지저분했다. 더구나 색색의 전선이 얽힌 채 한 뭉텅이씩 간판 뒤에 붙어 먼지를 부옇게 덮어쓰고 있었다. 그래도 앞면이 깨끗한 모드 양장점의 흰 간판은 밤거리를 밝히는 ㄱ시의 간판들 중 가장 크고 눈이 부시도록 현란했다. 앞면과 뒷면,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나는 그날 너무 많은 것을 보았으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혜련이에게 털어놓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건 비밀인데 말야. 난 우리 집 호주야.
비밀은 아니었다. 권씨 집안이 유명해진 건 여자가 호주이기 때문이다.
너 사생아냐?
사생아는 엄마를 따라 외가의 호적에 오르니까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호주가 되겠지.
그럼 뭐야.
남자가 없어서 그래. 딸도 나뿐이고.
에이, 별거 아니네. 우리도 호적상으론 아빠가 세대주지만 실질적인 가장은 엄마니까 엄마가 세대주나 마찬가지야. 아빤 우리 학교 육성회장을 맡고 있지만 육성회 일이라는 게 전부 돈 쓰는 일이래. 그거, 순전히 엄마가 번 돈으로 쓰는 거다. 엄만 황금 극장이 집 옆에 있어도 돈 버느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못 봐. 영화는 아빠가 대신 보고 엄마에게 실감나게 얘기해 준다.
호적상이고 뭐고 우리 집엔 아예 남자가 없다니까. 들어봤지? 추풍령 고개 넘어 권씨 집안이라고.
여자들만 산다는 그 집?
그 집이 우리 집이야.
오, 그렇구나.
혜련이의 호기심 어린 눈을 피해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에 덧댄 비닐이 청청 흔들렸다. 그 소리는 큰어머니와 고모들이 세탁한 이불 홑청을 마주잡고 힘주어 내리칠 때 나던 소리였다. 너희 엄만 어딜 갔다니. 또 어딜 갔다니. 팽팽하게 맞잡은 이불 홑청을 동시에 내리치는 소리. 이어지는 다듬이질. 무심한 엄마는 알까. 그 다듬이 방망이가 조붓한 내 등도 두두두 두드리고 갔다는 걸.
남자가 없다는 건 말이지. 엄마가 없고 아빠가 없는 그런 단순한 없음, 상실이 아니야. 존재의 증명 자체가 힘든 거지. 한 세계가 이유 없이 문밖으로 밀어내고 죽을힘을 다해도 닫힌 문은 열릴까 말까 하는 것. 남자가 없는 건 그런 거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사춘기의 나는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했다. 친구들이 고무줄을 할 때 난 장황한 기제사에 참석했었다고, 친구들이 1연, 2연, 왁자지껄 공기를 하고 놀 때 부동자세로 서서 ‘유세차’로 시작하는 길고도 지루한 축문을 듣거나 코를 찌르는 향냄새를 맡으며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아 신위 앞으로 술잔을 건넸다고, 여자이면서도 남자 맞잡이로 살았던 내겐 유년기가 없었다고, 많고도 많은 제삿날 허벅지를 꼬집으며 초저녁잠을 쫓던 유년기의 내가 있을 뿐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한 가문의 내력을 끄집어내고, 어디에도 스미지 못하는 어머니를 불러 오고, 추풍령을 부르고, 그곳의 바람과 공기와 흙, 물과 불을 불러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남잔 있어도 불편한 존재야.
혜련은 씹은 돌을 뱉듯 그 말을 툭 던지며 인상을 썼다. 그날 밤 우린 각자 돌아누워 새우처럼 등을 꼬부리고 잤다. 방의 외풍도 외풍이려니와 두 명 다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나와 혜련은 추위를 타며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던 셈인데 원인이 둘 다 남자 때문이었다. 나는 집안에 남자가 없어서 춥고 혜련은 집안에 남자가 있어서 추웠다. 가슴으로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등을 바짝 꼬부리고 자는 우리 둘의 모습을 봤다면 아이들은 또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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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 집안은 과부와 과부로 대를 이어온 집안이었다. 남자는 낳기가 무섭게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 결혼한다고 해도 딸만 낳고 일찍 죽어버려서, 친척에게 남자 아이를 꾸어 와 양자로 근근이 대를 잇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직계비속인 딸을 호주로 내세워야만 했던 집. 말이 안동 권씨 집안이지 타성받이 여자들에 의해 가꾸어지고 다듬어진 집이었다. 말하자면 여자는 승하고 남자가 안 되는 집이었다.
과부 집안이 세상에서 살아남자면 나름대로 엄격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 엄격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건너뛴다. 그래야만 한 집안으로서 이 땅에 온전히 발을 붙일 수가 있었다. 과부가 바람이 나면 집안 자체가 결딴나므로 얼마나 단속이 심했던지 남녀 간의 내외는 물론이요 원색의 옷조차 금지되었다. 내시 집안 여자들의 삶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양자로 대를 잇는 점, 성적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 고수 따위로 장아찌를 담가 먹는 일 등이 그러하다. 과부 집안은 내시 집안처럼 고수 장아찌를 내놓고 먹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고수 장아찌 역할을 하는 것이 있긴 했다. 첫째가 일이었다.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몇 번씩 궁리하고 생각한 끝에 탄생하는 작품을 만드는 일.
언젠가 시골집 다락을 청소한 적이 있었다. 다락 깊은 곳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베갯모. 쥐가 쏠은 흔적도 있고 원단의 색상도 누렇게 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심히 펼쳐 들고 거기에 놓인 자수를 보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집게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파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놓는 정경이야 어릴 적부터 봐온 것이었고 그저 잘하는 줄만 알았지 우리 집 여자들의 솜씨가 그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과부들의 음기로 한 땀 한 땀 뜬 모란과 난초와 연꽃은, 소나무와 대나무는 흡사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지 않은가. 어린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흔히 먹는 떡에도 물고기나 파초, 바퀴문, 연꽃문 등 갖가지 문양을 새겼고 한과는 먹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맛과 멋이 빼어났다. 찹쌀 튀밥과 대추, 건포도로 꽃모양을 내는 한과는 제사상에도 오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가문의 품격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았다. 그러니 과부 집안이라고 해서 누구도 쉽게 여기질 못했다. 오죽하면 저 집안 여자들의 손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는 말이 돌았겠는가. 잡념을 없애고 몸 안의 진기를 빼기 위해 일부러 손 많이 가는 일을 찾아했든 말든 과부가 된 고모들까지 친정으로 돌아와 그 일을 했으니 아주 못할 일만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에야 에야. 시집가던 삼 일 만에 시어마니 거동 보소. 참깨 닷 말 들깨 닷 말 두 닷 말을 볶으라요.
한숨처럼 뒤란에 부는 잔바람처럼 가만가만 읊조리는 노랫가락이 들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런 집안에 한 마리 까마귀가 있었으니 바로 내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기름한 말상에 제법 큰 눈을 가졌지만 초점도 생기도 없는 눈이어서 항상 넋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벌떡증이 생겼는지 그게 한 번 도지면 석 달이고 반년이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유령처럼 떠돌았다. 매섭기가 엄동설한 칼바람 같던 할머니도,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라는 말을 보증이라도 하듯 추상같은 기개로 무장했던 큰어머니도 자신의 아랫동서인 어머니를 막아서지 못했다. 군대보다 엄격한 과부 집안의 규율을 서슴없이 깔아뭉갠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 멀미가 심해 차를 타지도 못하는 사람, 온갖 종류의 차들이 국도를 쌩쌩 달리던 때 사흘이든 열흘이든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친척 집 문간방을 찾아들던 사람, 풍찬노숙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거나 눈을 부릅뜨고 뒤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어머니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침으로 막힌 기운을 신통하게 잘 뚫었다. 그래도 벌떡증에 평생 끌려 다닌 걸 보면 당신의 막힌 기만은 끝내 뚫지 못한 게 틀림없다. 싱겁게 담가 곰팡이가 핀 간장이나 탈이 난 된장도 어머니의 손이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다스려졌다. 탈이 난 사람과 음식을 바로잡고 큰일을 앞둔 집에서는 갈고 닦은 솜씨까지 화려하게 펼쳤으니 적어도 눈칫밥은 먹질 않았다. 그렇다곤 해도 큰일이야 어쩌다가 있는 것이고 어머니의 벌떡증은 시도 때도 없이 도졌으니 시집의 멀고 가까운 친척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친정의 멀고 가까운 친척까지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그런 탓에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을 지 일이 생기기도 전에 앉아서 미리 알았다.
이상한 건 친척들의 태도였다. 사랑에 식객이 끓던 조선 시대도 아니요 풍류 가객도 아닌 터에, 요즘 같은 세상에 친척이라는 명분으로 한 해 걸러 한 번씩 찾아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처 묵는 식객을 아무도 내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큰일이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지 자잘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다. 미안하거나 고마운 기색도 없이 앉아서 세 끼 밥상을 꼬박꼬박 받았을 것이다. 그중엔 형편이 어려운 집도 있었을 텐데 모두들 어머니를 싫은 내색 없이 받아주었다. 모자라는 아이를 집안에서 돌아가며 거두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련만 어머니의 경우는 그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오면 오나 보다, 가면 가나 보다 했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사람, 내 식구도 남의 식구도 아닌 사람. 어머니를 대하는 친척들의 얼굴이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친척들은 어머니를 당연히 내야만 하는 정신적인 세금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 사용하는 구형 수세식 변기처럼 여겼을 수도 있다.
혜련이와 ㄱ시를 쏘다닐 무렵 남산동에 있는 문화원엘 가게 되었다. ㄱ시에서 유일하게 수세식 변기를 설치한 곳이 문화원이었다. 수세식이라고는 해도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구형 변기였다. 문화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일어나서 줄만 잡아당기면 된다는 혜련의 말대로 위쪽 물통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더니 어디선가 물이 요술처럼 흘러나와 변기를 말끔하게 씻어 냈다. 신기한 건 잠깐이었고 계속 흐르는 물이 변기 위로 넘칠까봐 불안했던 나는 또 줄을 재빨리 잡아당겼다. 줄을 한 번 당겨 물이 쏟아졌으니 다시 한 번 당기면 그치겠거니 어림짐작했던 것이다. 기계의 사용법이 대개 그렇지 않은가. 줄을 잡아당겨도 물이 그치질 않자 약하게 당겨서 그런 거라고 이번엔 줄을 좀 더 세게 잡아당겼다. 그리하여 고요한 화장실에 물은 쉬지 않고 쏟아졌다. 돌돌돌 흐르던 물이 우레와 같은 소리로 변했으니 화장실이 물바다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혜련아…… 어떡하니.
나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화장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줄을 자꾸 잡아당기지 말고 가만히 놔둬. 그럼 돼.
성마른 혜련의 말이 화장실 문틈으로 들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말 꿈처럼 화장실이 조용해졌다. 조용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수세식 변기를 고장 낸 게 아니었다. 단지 사용법이 미숙했을 따름이었다. 혹시 어머니를 향한 친척들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처음 보는 구형 수세식 변기 같은 것.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한 심정이어서 줄을 자꾸 잡아당기지 않고 가만히 놔둔 게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는 사람이다. 대관절 그 무엇이 수면 중인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는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 무엇이라는 게 뱃구레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심화인지 아니면 애초에 생겨먹기를 허공에다 마음 부리고 살아갈 사람으로 생겨서 그런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눈이 워낙 커서 그런 거라고, 눈을 감다가 잠이 와서 반만 감고 나머지 눈은 감는 걸 깜박 잊은 거라고 생각했다. 삼분의 일 가량 눈을 뜨고 자는 어머니를 머리맡에서 일삼아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내 어머니인가 싶게 무서웠다. 할머니는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이 점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걷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보름달을 이불 삼아 풀숲에서 잠이 들어도 눈을 뜨고 자는 사람이니 겁간만은 당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못 미더워 어머니가 추풍령 고개를 넘는다는 기별이 오면 사람을 풀어 어머니의 뒤를 지켰다. 어머니가 가는 길 곳곳을 살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지만 집이 있는 곳에서 추풍령까지 만이라도 지켜주어야 할머니의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다. 경상남북도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의 집을 찾아가자면 어머니는 매번 추풍령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추풍령 엄마’라고 불렀다.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고 어쩌다 나를 볼 때도 꼭 남의 자식 보듯 해서 내 딴엔 아주 적합한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생모인 추풍령 엄마와 자지 않고 백모인 큰어머니와 잔 탓이기도 했다. 날 낳은 사람은 어머니지만 날 키운 사람은 한 점 혈육 없이 청상이 된 큰어머니였다.
옥자동아 금자동아. 내 등이 쇠죽솥의 뚜껑만큼 커졌을 때도 큰어머니의 자장가 부르기는 계속되었다. 초경을 시작한 날에는 큰어머니가 연두와 붉은색 실로 세발 뜨기를 해준 순면 기저귀를 차고서도 등을 내밀었다. 그러면 큰어머니는 당신의 조카딸이 막 여자가 되었다는 것도 잊고 솥뚜껑만한 등을 아이 등 두드리듯 투덕투덕 두드리며 ‘일기청산 보배동아’를 웅얼거리곤 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를테면 그 행위는 내가 할머니와 큰어머니, 어머니 등 집안 어른을 몽땅 젖히고 호주가 된 것 또는 되어준 것(난 정말이지 호주가 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으므로)이나 아직도 아이인 양 솥뚜껑만한 등을 대령하는 것은 내가 이 집에 태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진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 원죄가 내겐 당연하나 나와 성이 다른 여자들은 당연하지 않으므로 난 그걸 빚이라고 여겼다.
큰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줄 때면 아무리 몸을 씻고 털고 옷을 깨끗이 빨아 입어도 청상의 체취가 물씬 풍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초가을 새벽 공기처럼 알싸하면서도 젖은 감나무 밑동에서 나는 쾨쾨하고 후텁지근한 냄새였다. 집안을 한 손아귀에 쥐고 주무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집 대주를 하인 다루듯 했던 할머니에게도 그 냄새가 났고 할머니의 눈치만 살피던 고모들에게서도 났다. 하지만 추풍령 엄마에게선 그 냄새가 나질 않았다. 나는 추풍령 엄마의 가슴에서 부는 바람 즉 벌떡증 때문이려니 그것이 그 냄새를 가져갔거니 했다.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한 호적을 파 옮겼을 뿐인데, 정을 주기도 전에 남편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집안인데, 이를 갈아붙여도 시원찮을 시집에 왜 권씨 집안 여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아득바득 살아내는 것일까. 도대체 그 힘의 원천은 어디일까. 모듬살이 형태로 여자들만 모여 사는 이 집안의 규율이야 무시하면 그만 아닌가 싶다가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럴 마음이 싹 가셨다. 원죄고 뭐고가 없었다. 이 빠진 사기 종발 내돌리듯 어머니를 밖으로 내돌리는 집안 여자들이 죄다 못마땅하고 해를 넘겨 상거지 꼴로 들어서는 어머니를 보면 저러고도 사람이라고 살고 싶을까, 막돼먹은 심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막힌 속이 뚫린 것처럼 시원할 수도 있지만 하고많은 사람 중에 그게 하필이면 내 어머니여서 용서가 되질 않았다. 그 미운 어머니가 집에 올 때마다 무쇠 솥을 바깥에 내어 걸고 끓이는 것이 있었는데, 감자탕이었다.
감자탕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 혼자 끓였다. 살점을 발라낸 돼지 등뼈를 뭉툭한 식칼로 내리칠 때, 허공에 건성 떠 있던 어머니의 눈동자도 그때만은 제자리에 박혀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이른 아침 추풍령 산비탈에서 캔 투실투실한 감자의 껍질을 벗겨 넣고 핏물을 뺀 돼지 뼈와 파랗게 데친 무시래기를 넣어 시남시남 한나절을 고았다. 이윽고 국물이 잘박하게 졸면 새빨간 고추와 금방 간 들깨 같은 향이 짙은 양념을 넣어 당면과 함께 한소끔 끓인 것을 뚝배기에 담아 집집마다 돌렸다. 우리 집 여자들은 물론이고 동네의 과부란 과부는 모두 뚝배기에 든 감자탕을 바닥까지 알뜰히 긁어 먹고는 이튿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땀을 비지처럼 흘리며 몸을 지졌다. 그러곤 힘 좋은 남자와 한바탕 정사라도 치른 양 노골노골해진 얼굴을 하고 나와 다들 살 풀었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감자탕이 끓는 냄새가 나면 동네 과부들은 느이 엄마 왔는갑네, 활짝 반기곤 땀띠가 쏟아 붓는 염천에도 안방에 군불을 넣고 기다렸다. 집집마다 뚝배기를 돌리는 것이 내 일이었는데 감자탕은 다른 음식처럼 정갈하지 않고 보기에 흉물스러웠다. 국물에 둥둥 뜬 고추기름은 금방 흘린 사람의 피처럼 보였으며 물크러져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거무죽죽한 시래기며, 울툭불툭 튀어나온 돼지 뼈다귀의 흉측함이라니. 되는 대로 풀린 당면은 인간의 창자를 연상시켰다. 그런데도 다들 입맛을 쩝 다시며 뚝배기를 반겼고 내가 어머니를 추풍령 엄마라고 부르듯이 사람들은 어머니가 끓인 감자탕을 추풍령 감자탕이라고 불렀다.
고백건대 추풍령 엄마가 감자탕 끓이는 걸 몰래 숨어서 훔쳐본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별안간 저고리 섶을 헤치고 뭉툭한 식칼로 자신의 가슴 한쪽을 쓰윽 도려내는 것은 아닐까, 핏물이 뚝뚝 듣는 가슴살을 감자탕 속에 집어넣고 같이 끓이는 건 아닐까, 아니면 마지막 남은 해가 하혈을 하듯 서산이 온통 핏빛으로 낭자하게 물들 때쯤 갑자기 어머니가 가랑이를 벌리고 솥 안에 아기를 낳는 건 아닐까, 아기 낳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어머니는 집에 오자마자 감자탕부터 끓이는 게 아닐까, 혼자서 온갖 억측을 다 했으니까. 물론 내가 상상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자탕은 그냥 순수한 감자탕일 뿐이었다.
혜련이도 몇 번인가 어머니가 끓인 추풍령 감자탕을 얻어먹었는데 자기가 먹어본 음식 중 최고라고 했다. 나는 혜련이네 부엌을 떠올리곤 지금 네 입에 무엇인들 맛있지 않겠냐, 싶었다. 감자탕을 두 그릇이나 게 눈 감추듯 먹고 나서 덧붙이는 혜련의 평이 인상적이었다. 혀가 얼얼하도록 지독히 맵고 뜨거운데 먹고 나면 어쩐지 비릿한 슬픔이 느껴지는, 뒷맛이 미끌한 음식이라고 했다. 너 시 쓰냐? 구박하면서도 나도 내심 혜련의 말에 동의했다. 진저리를 치며 안 먹는다고 해놓곤 식구들 몰래 훔쳐 낸 감자탕을 뒤란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퍼먹곤 했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솟구치는 사춘기의 신열을 감자탕으로 가라앉히곤 했으니까. 감자탕을 먹는 동안은 호주라는 무거운 짐도 내려놓을 수가 있었고, 슬픔과 분노, 원인을 알 수 없는 노여움, 삿된 기운일 수도 있는 몸 안에 떠도는 대책 없는 열기들을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잠재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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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탐방>을 연재하는 신문사에서 얼굴이 뚝배기처럼 생긴 시인을 만났다. 그도 그 경제지에 매주 시를 한 편씩 소개하는 코너를 맡고 있었다. 억양이 낯설지가 않아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추풍령이라고 했다. 충북과 경북 사이에 있는 추풍령? 내가 놀란 얼굴로 되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이제 추풍령에서 시인이 나기도 하나 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그가 날 쳐다보며 어어… 아니, 어… 그게… 그런 게…… 아니구요, 했다. 그는 초면인 내가 시인인 자신과 자신의 고향에 대해 모욕하거나 비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내 얼굴이 말과는 다르게 심란한 걸 보곤 괜히 자기가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표 나게 시뻘게졌다가 본래의 거무스름한 낯빛으로 돌아오는 걸 보곤 나 역시 당황해서 인사도 없이 돌아서 버렸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추풍령은 내게 사라진 지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몰된 마을이나 바람에 날아간 헛간의 재처럼. 전에는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곳이었다. 시골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고 할머니와 큰어머니에 이어 추풍령 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터에 추풍령을 무슨 업처럼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이 나이에도 추풍령이라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다니. 돌이켜보면 요리에 관련된 글을 써서 여태 먹고살았으니 추풍령이 내게 상처만 준 것은 아니었다. 권씨 집안 여자들의 솜씨를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 직업으로까지 연결시켰으니 말이다.
시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후르륵후르륵 흩날렸다. 인도에는 미처 쓸어내지 못한 나뭇잎들이 발밑으로 감겨들며 거치적거렸다. 성가신 나뭇잎들을 발끝으로 툭툭 걷어차며 나는 이번 주 <맛집 탐방>을 추풍령 감자탕으로 결정해 버렸다. 24시 편의점에서 산 삼각 김밥을 데워 벽을 보고 먹은 뒤 신문지를 펴놓고 발톱을 깎는데 호주제가 곧 폐지된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통하던 호주제라는 높은 장벽을 허물고 마침내 양성 평등의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며 한 여성계 인사의 흥분한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되었을 때도 나는 발톱을 깎고 있었다. 뒤이어 갓을 쓴 유림 대표의 못마땅한 얼굴이 화면을 스치고 지나갈 적에도 발톱 깎던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전에 먹은 삼각 김밥이 목으로 치받고 올라올까봐 마른침만 자꾸 삼켰다.
니들이 알아? 이미 여자가 호주였던 집안도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당신이 호주냐고 차마 묻지는 못하고 꺼림칙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싫어서, 호적등본을 제출하기 싫어서 취직조차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는 걸.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죽기 살기로 좋아한 사람이 있었는데 보내버리고 말았다고 외쳐 본들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만 전쟁이 아니었다. 끝없는 총성과 포탄을 온몸으로 받으며 시뻘건 불길과 연기 속을 헤쳐 온 집안이, 그렇게 해서라도 뿌리를 내리려고 발버둥을 친 한 집안의 호적이 사라지는 게, 그 집 피붙이가 엄연히 살아 숨을 쉬고 있는데도 그 집안의 호적은 먼지 쌓인 창고에 죽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아 결혼마저 포기했다면 그 누가 믿어주겠나. 자신의 삶 깊은 결을 타인이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쨌든, 그건 너무도 오래 전의 얘기였다. 여전히 호주이긴 하지만 난 호주제가 폐지되든 말든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옛날 모듬살이 형태로 사는 것도 아니고 단독 세대주이자 원룸의 주인인 내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호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나 홀로 세대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그게 왜 새삼 필요한가. 탈 사람이 떠난 뒤에 오는 빈 배가 무슨 소용인가. 이미 앞 배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떠났는데 바다 한가운데 회도석(回導石)을 세워 뱃머리를 돌리려 한들……. 회도석에 적힌 내용이 제 아무리 절절하고 문장이 유려하다 해도 그간 헤쳐 온 상어의 이빨보다 무서운 먼 바다의 풍랑을 잊을 수 있겠는가. 상처 입은 뱃전은 또 어찌하고.
내일은 추풍령 감자탕을 먹으러 가야겠다. 원고를 위해서건 바쁘다는 핑계로 즉석식품만 먹고 산 내 몸을 위해서건. 가끔 만나는 혜련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관두었다. 허리에 두두룩하게 중년 살이 올라 다이어트에 돌입한 혜련에게 감자탕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날 원수 보듯 할 것이다. 그게 추풍령 감자탕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혜련은 추풍령 엄마가 끓여 주던 감자탕 따윈 까맣게 잊었을 수도 있다. 얘, 요즘 화장지는 어떤 게 좋으니. 향이 천박하지 않고 은은하게 나는 걸로 바꿔 주고 싶은데. 말끝마다 화장지 타령인 혜련은, 그때의 우리 나이가 된 아들이 수음 끝에 사용할 화장지를 사러 다니느라 바쁜 혜련은 기억조차 못할 수도 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이 많이 가는 고추 잡채밥도 척척 만들어내는 사람이니 옛날에 먹었던 감자탕쯤이야 잊었을 수도 있다. 나는 ㄱ시의 모든 것이, 혜련이와 같이한 사춘기의 한때가 이토록 생생한데.
전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은 물이 끓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새로 나온 전기 주전자에 물을 붓고 돌아서면 금방 끓어오른다. 끓는 물속에 즉석식품이 담긴 봉지를 넣고 3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난 현재의 삶에 대체로 만족한다. 약간 쓸쓸할 때도 있긴 하지만 내겐 일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자유가 있다. 무엇보다 나는 추풍령 엄마처럼 눈을 뜨고 자지도 않는다. 많은 것이 변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앉은 자리를 서로 바꾸게도 했다. 지금 내가 아무리 침을 튀겨 가며 오래전의 기억을 일깨워 준들 혜련은 그 모두가 흘러간 한때였다고, 그래서 잊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너와 나의 시간이 다른 것처럼.
호주의 시간이 다르고 세대주의 시간이 다르고 동거인의 시간이 다른 것처럼.
흘러간 시간은 시간의 눈금으로는 재단되지 않는 거니까.
그나저나 추풍령 감자탕 집엘 가면 그 집 점주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추풍령 감자탕의 원조가 있는데 혹시 아냐고. 감자탕이 지금처럼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 아니라 예전에는 욕망이나 욕정을 잠재우는 음식이었다고 하면 점주는 내 말을 믿어주기나 할까. 상처를 치유하던 약이었다고 하면 믿어나 줄까. 그런데 전국에 마흔여덟 개나 되는 체인점을 가진 추풍령 감자탕의 그 많은 감자탕들은 도대체 누가 다 먹는 것일까. 전국에 마흔여덟 개나 되는 체인점을 가진 추풍령 감자탕이 왜 유독 추풍령에는 없는 것일까. 그들은 전설처럼 떠도는 추풍령 감자탕의 이야기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tanb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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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아침 귀한 선물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70년대에 학교를 다닌사람들의 특히 여자들의 치마 깔고 앉기는 여기서도 나오는군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요 ....얼마전 고수라는 나물을 절에서 먹어 봤는데 향이 특이 했었어요 꼭 미나리 같이 생긴것이 향은 어찌 그리 다른지도 특이했구요 ....처음 보는 나물이었는데 그런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반가웠습니다 재미있게 웃으며 잘 보았습니다
필사를 하고픈 좋은 작품이네.. 맛깔나고 정겹고 무게를 가진 소설.. 배울 게 많은 단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