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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배운 찬양
시편 63:1-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사순절의 특징은 침묵, 절제, 금식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에게 경건의 훈련을 일깨워 주셨다.
사순절의 배경은 광야이다. 광야는 무엇인가? 광야는 사람이 정착하여 살지 못하는 땅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끝없이 이동하며 가나안을 향하였다.
사순절의 40은 출애굽 당시 광야 40년, 예수님의 광야 시험 40일과 통한다. 광야없이 가나안은 없다. 광야는 구약성경에서 무려 267회나 등장한다.
사람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가리켜 광야라고 부른다. 자신의 삶에 광야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로움, 두려움, 불안함, 불신, 부정, 막막함,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막장같은 공간이다.
나는 내가 처한 광야를 어떻게 극복하고, 뒤집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광야에서 기쁨의 찬양을 부르고, 광야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오늘 본문인 시편 63편의 배경은 광야이다. 여기에서 광야는 지리적 배경만이 아니라, 신앙의 배경이기도 하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의 고달픔과 막막함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광야는 은혜의 장소였다. 광야에 대한 선입견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그런 광야라는 절망적 환경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순절에 자주 읽는 말씀이다. 광야의 교훈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는 홀로 존재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광야는 하나님 없이 살지 못한다. 시편 63편에서 광야의 외침을 들어보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
광야가 살기 어려운 곳이기에 백성은 그곳에서 예배를 배웠다. 너무 힘들어서, 간절한 나머지, 그들은 갈망하였고, 그것이 진실한 예배가 되었다. 그들은 고난의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였다.
기도자는 광야에서 물을 찾듯, 하나님을 갈망한다. 몸으로, 영혼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다시 한 번 더 읽어보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
기도자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찬양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또한 말씀이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6).
기도자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참 해갈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3).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7).
신앙인은 “주의 권능과 영광”(2)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그의 영혼은 주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
여기에서 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과 만날 두 가지 방법을 권면한다. 하나는 기도이고, 하나는 묵상이다.
그는 광야에서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주를 앙모한다. 그런 목마름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 그것이 기도이다. 우리는 시편에서 기도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시편 전체의 요약이라고 부른다.
기도자가 권하는 하나님과 만날 또 하나의 방법은 말씀묵상이다. 그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님의 길을 따른다. 그런 기쁨으로 고백하는 영혼의 설레임이 바로 말씀묵상이다.
백성은 고난의 광야시대를 지나고, 가나안에 정착하였다. 왕권이 안정되고, 점점 안정을 찾아가자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였다. 차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보이는 이방의 우상, 풍요로운 물질의 우상에 눈을 돌렸다.
그들을 비판한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외친 것은 바로 ‘광야 시절로 돌아가라’였다. 광야로 돌아가,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말할 때 첫손가락으로 꼽는 것이 광야 시절이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제 애굽에서 탈출하던 그 광야의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외친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2)
광야에서는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 가난한 마음이 된다. 하나님 없이 생존할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길목이기도 하였다. 누구나 인생의 광야를 경험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광야는 얼마나 힘들고, 괴롭고, 두려운가? 그래서 인생을 광야같다고 비유한다.
지난 주일설교 창세기 15장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도 종종 시험을 겪었음을 보았다. 그 시험은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다음 16장에도 이어진다. 인생의 광야는 틈만 나면 찾아온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방법인 아닌 인간의 수단으로 상속자를 얻으려고 하였다. 결국 사라의 몸종인 하갈은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계획한 자구책은 목적을 이룰 온전한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르면서 자식을 얻으려는 아브람 부부의 시도는 오히려 상황을 엉뚱하게 몰아갔다. 주인의 상속자를 임신한 우쭐한 마음에 하갈은 교만해졌고, 결국 여주인의 미움을 샀다. 학대받은 하갈의 탈출구는 장막이 머물던 오아시스를 떠나 외딴 광야밖에 없었다.
하갈에게 광야는 마지막 도피처였지만, 그곳은 생존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주인의 낯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아예 생명의 기회가 차단된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비참한 처지의 하갈을 만나주신다. 인생의 막장과도 같은 광야에서였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치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처럼 수태고지 하였다.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창 16:11). 이스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고통과 절망에 빠진 하갈을 보셨고, 들으셨고, 만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만난 하갈이 볼 때 광야는 절망의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하갈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비극의 주인공이 된 하갈을 만나시고, 그를 위로하셨다. 마침내 하갈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 고백 속에 감격과 참회가 담겨있다. 브엘라해로이!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창 16:13).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예배를 배웠다. 그들은 고난의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였다. 바로 몸으로, 삶으로, 역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그러니 광야는 불평 속에서, 부족함 속에서 감사를 배운 곳이었다.
떼제 공동체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고통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러 나가는 문이다.”
성지순례를 가면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오아시스가 아닌, 유다 광야이다. 유다 광야는 예루살렘 남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황량한 돌과 관목으로 이루어진 구릉이다. 예루살렘의 아파트에서 보면 성 밖 남쪽으로 멀리 유다 광야를 볼 수 있다. 너무 가까이 펼쳐져 있다.
중앙산악 고지대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남쪽은 사방이 돌과 바위, 드믄 드믄 관목으로 이루어진 광야다. 지금은 광야에 물을 공급하여 채소, 과일, 꽃을 생산하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사람 살 만한 곳이 못된다.
이곳을 네겝이라고 부르는데 ‘남쪽’이란 뜻이다. 네겝은 지금 이스라엘 국토의 60%를 차지한다. 예로부터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대였다. 이스라엘에서 만난 가이드는 처음에는 유다 광야가 낯설고 황량하게만 느껴졌는데 2, 3년 지나니 그렇게 정들고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고 하였다.
네겝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1948년 독립한 지금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과 분쟁을 벌인다. 처음에 키브츠는 광야를 개척하고 개발하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분쟁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버림받은 땅이 아니었다. 그들은 첫사랑 광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약속의 땅의 대부분은 광야의 연장이었지만, 적어도 유일하게 허락된 내 땅이었다.
유다 광야의 특징은 바위투성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시편을 보면 다윗은 가장 큰 장애물인 바위를 가장 귀한 보호자로 비유한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신앙은 절망조차 희망으로 풀어낼 줄 안다. 시편에는 “하나님은 나의 바위”라는 말이 13회 등장한다. 바로 바위는 하나님이 안전하게 나를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기도자의 발을 견고하게 지켜주시고, 어느 때나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된다는 뜻이다. 바로 구원의 보장이다.
얼마나 큰 역설인가? 바위투성이의 불편과 불모지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상징하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광야에서 배운 찬양이다.
이러한 광야를 배경으로 하는 본문은 내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광야 찬양은 바로 내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도우심을 얻을 기회임을 고백한다.
3)
현존하는 3대 유일신교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출발점이 모두 광야이다. 참 신비롭지 않은가? 광야는 불모지가 아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해 드러내신 인류 구원의 터전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우심이 함께 하였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8).
처음 모세는 광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가져왔다. 광야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인이 되기 위한 훈련장이었다.
지금 내가 인생의 광야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좌절하지 말라. 나의 광야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다. 내 광야에서 찬양을 배우고, 예배를 배운다. 그러니 내 광야를 통해 내 인생을 뒤집을 수 있다.
행여 내 인생의 광야에서 걸림돌과 같은 바위를 보거든 찬양하고, 감사하라. 그것이 내 삶의 걸림돌이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장애 때문에 내 영혼의 목마름을 느낀다면 다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만족을 얻을 것이다.
내 앞에 놓인 광야는 불가능한 불모지가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광야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라.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은 구약성경 이야기를 수많은 그림으로 남겼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구약성경은 인간적이다.” 여기에서 인간적이란 말은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개입하시고, 인간의 삶에 간섭하시더라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삶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분이다. 나를 소외시키는, 내 삶과 무관한 그런 하나님의 사건은 없다. 그런 하나님의 눈길이 나를 향하심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기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7).
교회 전통 가운데 전승해온 ‘예수기도’는 바로 이집트의 사막 교부들이 시작한 기도문이다. 바로 이 기도문의 고향은 광야인 셈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이 기도문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이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광야와 사막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에 의지하던 신앙의 전통에서 전수된 기도문이다.
이 기도를 쉼 없이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 안에 참여하려고 한다. 내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열게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기도로 소통하게 한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주님,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또 내 속 깊이 묵상하게 하소서.’ ‘내가 인생의 광야에서 홀로 머물 때에 주님 내 손을 잡아주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셔서 내가 만나는 광야에서 찬양을 배우고, 내 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