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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아톰이 [alswjdzi@hanmail.net]
* 제목 :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 편수 : 48편
* 팬카페 : 無
* 연재게시판 : [쑥쑥연재☆]
* 출처 : 인터넷소설넷쮸 [http://cafe.daum.net/spem]
※불펌(스크랩),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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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0. #꿈을 이루다.
"아씨… 하나도 안 보이잖아."
까치발을 들고 어떻게든 앞을 보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희. 사람들이 워낙 많은터라 키가 작은 자신은 앞의 합격
대학 명단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나참…. 무슨 사람이 이렇게 미어터진담.
결국 지금 보는 건 힘들다고 생각되어 근처 벤치로 터벅터벅 걸어와 앉는 가희였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사라지는 사람들. 가희는 그제서야 벌떡 일어나 명단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사람 수가 워낙 많은터라 자신의
이름을 찾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이가희' 자신의 이름이 보이고, 가희는 옆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어, 엄마…."
내가,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가희는 자신이 그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명단을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5번 정도 읽었을까. 가희는 천
천히 걸음을 옮겨 아까 앉았던 벤치로 다시 왔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가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꾹꾹
힘주어 버튼을 누르는 가희. 11개의 숫자가 모두 눌러지고, 가희는 신호음이 가는 핸드폰을 천천히 귀에 가져다 댔다.
달칵, 상대편이 전화를 받고 가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엄마…."
-"가희가?"
"응…. 엄마 딸 가희."
-"그래, 대학은 어떻게 됬노?"
"……."
-"떠, 떨어졌나?"
"합…격."
-"머라…꼬?"
"엄마 딸 가희가…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서울대에 들어갔대."
-"지…진짜가?! 아이구 장하다, 우리 딸. 아이구, 내는 니가 해낼 줄 알았다! 아이구, 경사났네!"
주절주절,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감격에 벅찬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희는 핸드폰 폴더를 천천히 닫았다. 폴더가
닫히고, 다시 멍하니 있던 가희는 벌떡 일어서 두 손을 활짝 벌리며 소리쳤다.
"나도 이제! 서울대 학생이다!"
※ temptation ※
"자, 그럼 이상 대학 입시 설명회를 마치겠습니다."
몇시간 동안 이어진 교수님의 대학 입시 설명회가 드디어 끝이 났다. 가희는 뻐근한 어깨를 풀기 위해 기지개를 쭉 피
며,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했다. 이제 막 책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가희 앞에 고운 손 하나가 불쑥 나
타났다. 깜짝 놀란 가희는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찾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긴 생머리에 고운 피부, 뚜렷한 이목구
비를 가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에?"
"내가 손을 내밀면, 그 쪽도 내밀어야지."
"어? 아, 응…."
여자의 말에 자신의 못난 손을 내밀어 여자의 손을 잡고 흔드는 가희. 상대편 여자는 가희를 보며 픽, 웃었다. 가희는
여자가 웃는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웃음을 꾹 참고, 가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하는 여자.
"안녕."
"응… 그래, 안녕."
"난 선향아야."
"아, 그래."
"……."
"아, 맞다. 나는 이가희."
"풉, 그래. 앞으로 잘 지내보자, 가희야."
"응, 그래!"
마침 친한 친구들이 모두 지방 대학으로 떨어져 대학생활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가희에게 뜻밖의 횡재가 생겼다.
헤, 이제 나도 친구 생겼다 이거야.
친구를 사귀었다는 뿌듯함에 환하게 미소짓는 가희. 향아 역시 그런 가희를 보며 밝게 미소지었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1. #가슴 떨리는 첫만남.
\1년후
"이가희, 빨랑 안 와?!"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요란하게 울렸다. 얇은 남방과 미니스커트, 그리고 롱부츠를 신은 가희가 허겁지
겁 향아 곁으로 달려왔다. 향아 앞으로 와서 숨을 헉헉거리는 가희. 향아는 그런 가희를 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작게 웅얼거렸다.
"정확히 28분 지각이십니다, 이가희씨."
"하하…."
"너 지각하는 버릇 안 고칠래?"
"내가 지각하고 싶어서 하나. 아침에 눈이 안 떠지는 걸 어떡해."
잔뜩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가희. 향아는 결국 가희의 앙증맞은 표정에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가희는 그런 향아를
보며 밝게 미소짓고는, 향아의 팔짱을 꼈다. 가희는 한참동안 향아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알겠어, 그렇게 안 쳐다봐도 기억하고 있네요."
"꺄, 오늘 너가 쏘는거 안 잊었지?!"
"당연하지. 잊을리가 있나. 맨날 누구 돈 떼먹는 이가희라는 사람하고는 다르죠."
"뭐? 너 진짜 죽는다, 선향아!"
"푸훕…."
"뭘 웃어, 이 기집애야!"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다보니 어느새 롯데리아 앞에 도착한 가희와 향아. 빙긋 웃는 향아에 비해 가희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갔다. 가희의 표정을 살핀 향아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고작."
"어?"
"쏜다는 게 고작 햄버거니?"
"아, 내가 비싼 거 쏜다고는 안 했잖아. 여튼 얼른 들어가자~"
새침스럽게 웃어보이고는 문을 밀고는 먼저 들어가버리는 향아. 가희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
식하고는 빠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네.
카운터 앞 줄은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향아는 조금이라도 빨리 받아야 한다며, 줄을 서러 카운터 앞으로 달려갔다.
가희는 마침 하나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아 향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 누군가가 가희의 어깨를 톡톡 쳤다.
가희가 고개를 들어보니 귀여운 외모를 소유한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에?"
"저기. 여기 제 자린데요."
"아, 앗!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죠?"
"아니에요! 미안하긴요."
"여기 앉으실래요?"
앗, 살인미소다….
상대편 남자가 민망한 듯 웃으며 묻자, 가희는 손사래까지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럼 전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얼른 향아가 줄 서 있는 곳으로 오는 가희. 가희가 갑자기 오자, 향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
아해했다.
뭐야, 자리 맡아 놓으랬더니 왜 여기 와.
이렇게 물으려고 하던 향아는 행동을 멈추어야 했다. 볼이 발그레 해져서는 두 손을 깍지끼고 헤벌레 웃고 있는 가희.
향아는 그런 가희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향아의 팔목을 딱 잡으며 말하는 가희.
"향아야."
"으, 응."
"미소로도 사람을 넋 나가게 할 수 있니?"
"그, 글쎄. 근데 그건 왜?"
"그 미소…. 잊지 못 할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두 눈 꼭 감으며, 다시 망상에 빠지는 가희. 향아는 그런 가희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한참동안 가희
를 보며 혀를 두르던 향아는 어느새 자기 차례가 오자 새우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 아직도 넋이 나가있던 가희를 끌고
빈 자리를 찾아 온 향아. 한참동안 넋 나간 가희를 보다가, 가희의 볼을 두어 번 건드리는 향아.
"……."
"이가희. 햄버거 내가 다 먹는다."
"아니야, 먹을거야!"
향아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햄버거를 품 속에 안는 가희. 꼭 자기 물건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았다. 향아는 그런 가희를 보며 픽, 웃더니 TV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TV에는 가요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한
참동안 TV를 보던 향아는 테이블을 쾅쾅, 치며 소리 질렀다. 향아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가희가 향
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야! 크로커스야, 크로커스!"
"뭐?!"
향아의 손 끝이 향하는 곳으로 서둘러 시선을 옮기는 가희. TV로 시선을 옮긴 가희 역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TV만을
응시했다. TV 속에는 요즘 한창 잘 나가는 가수, 크로커스가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다. 잠시 후, 크로커스의 노래가 끝
이 나고, 둘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아, 어쩜 좋아. 크로커스 오빠들 너무 멋져."
"그러게. 우리랑 나이 차이도 적당하잖아."
"응, 두살 차이인가?"
"오, 그럼 재네 스물 세살?"
"응. 야, 이가희! 재네가 뭐야! 오빠들이라고 해, 알았어?!"
"네네~"
향아의 말에 설렁설렁 대충 대답하는 가희. 향아는 대답만으로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동안 말없이 햄버거
만 먹던 가희는 갑자기 향아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
"아, 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돼?"
"응, 당근. 왜?"
"그 날, 크로커스 팬미팅 하잖아!"
"어머, 정말?"
"응, 근데 우리 언니가 연예계 쪽에서 놀잖아. 그래서 표 두장 구했는데 같이 갈래?"
"꺄, 정말?! 가희야, 난 널 너무너무 사랑한단다."
손으로 하트 모양까지 만들어가며 말하는 향아. 가희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가희의 대답에 박수까지
치며 좋아라하는 향아. 그런 향아의 모습에 가희도 밝게 미소지어 보였다. 다시 입을 쫙 벌려 햄버거를 입 속에 구겨넣
던 가희는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눈이 마주친터라 깜짝 놀라 사래가 걸린
가희.
"켁! 향아, 물물!"
"어! 여기여기!"
벌컥벌컥,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키는 가희. 한 숨 돌린 가희가 다시 그 남자에게로 시선을 두자, 아까처럼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희가 자신 때문에 사래가 걸린 줄 알고 미안해 하는 것 같았다. 가희는 그 남자
를 손 끝으로 가리키며 향아에게 말했다.
"저 남자가 아까 말한 그 남자."
"에?"
"아까 그 살인미소 죽이던 남자 말이야!"
가희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향아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저 남자 우리 학교야."
"엥? 진짜?"
"응, 쟤 우리 학교에서 엄청 유명해."
"유명하다니?"
"잘생겼잖아. 그래서 인기 죽여!"
"오오, 이름이 뭔데?"
"음, 이름은 유은설이고 나이는 우리랑 동갑일걸?"
향아의 말에 오오, 라는 말을 계속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희. 은설은 가희에게 관심이 있는지 계속해서 눈빛을
던졌다. 그 눈빛이 쑥쓰러운 가희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 가희는 향아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자꾸 유은설이란 애가 쳐다봐."
"너가 좋은가보지. 가서 물어봐. 너 나 좋니? 라고."
"야, 미쳤냐!"
"왜. 나라면 그렇게 하겠다. 만약에 개가 응, 이라고 하면 너는 봉 잡은거야, 기집애야."
"그런가?"
"그래! 얼른 가봐."
향아가 가희 등을 계속해서 떠밀자, 힘내서 일어나려던 가희는 다시 털썩 앉아야했다. 어느새 자기 앞에 와서 서 버린
은설 때문에. 은설은 가희를 보며 싱긋 웃었고, 은설의 미소를 본 향아는 황홀한 표정을 지어냈다. 하지만 은설은 향아
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가희에게만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가희는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시선을 이리저리 계속해서 옮겼다. 잠시 후, 조용히 들려오는 은설의 목소리.
"저기."
"네?"
"우리학교 맞죠?"
"아, 네."
"나이가?"
"스물 한 살이요."
"와, 나랑 동갑이네! 우리 말 놓자."
세상에, 우리래, 우리.
입모양으로 가희에게 말하는 향아. 가희는 그런 향아를 보며 썩소를 지어내고는 다시 은설에게 시선을 두었다.
"응, 그래."
가희의 대답에 싱긋 웃던 은설은 무심코 가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경악하며 말했다.
"아, 어떡해. 완전 늦었네."
"……."
"저기."
"응."
"나 가 봐야 될 것 같다. 나중에 또 보자!"
"아, 그래. 잘 가."
"응!"
헐레벌떡 가게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은설. 향아는 그런 은설이 조그마한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뒷모
습을 쳐다보았다. 은설이 보이지 않자, 가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향아. 가희는 그런 향아의 눈빛
에 우쭐해져서는 말했다.
"야, 부럽냐?"
"세상에. 유은설 쟤 생각보다 눈 낮구나."
"뭐?! 너 샘나서 그러지?!"
"세상에. 유은설 쟤 정말 실망이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쟁반을 들고 햄버거 봉지, 콜라컵을 분리수거하더니 손을 탈탈 털고 나가는 향아. 가희는 곧
향아의 뒤를 쫓아나갔다.
"야, 선향아! 같이 가!"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2. #원치 않았던….
"향아야! 여기야, 여기!"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향아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가희. 한참동안 건물 안을 두리번거리던 향아는 뒤늦게야 가희
를 발견하고는 싱긋 웃으며 가희 쪽으로 달려갔다. 향아가 오자 난리법석을 떨며 말하는 가희.
"글쎄, 이 표 구하기 엄청 힘든거래."
"그래?"
"응! 선향아, 너 나중에 나한테 크게 한 턱 쏴라."
"당연하지!"
"20분 정도 남았는데, 화장실 들렸다 들어가자."
"그래!"
둘은 화장실로 가, 화장도 고치고, 옷도 단정히 입은 후 서로를 보며 밝게 미소 지었다. 평소 좋아하던 가수의 팬미팅을
가게 된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눈만 꿈뻑거리는 향아. 그런 향아를 보며 가희는 베시시 웃어보인다.
얼빠진 사람같다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가희였다. 가희와 향아는 사람들이 점점 몰려드는 걸 보고는 화들짝 놀라 서
둘러 팬미팅이 진행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둘은 표의 좌석을 확인하고는 좌석을 찾아 앉았다.
"이야, 너네 언니 너무 멋지시다."
"엥? 뜬금없이 뭔 소리?"
"여기 완전 좋은 자리잖아. 세상에, 손 뻗으면 무대에 닿겠다, 야!"
"헤헤."
무대 쪽으로 손을 뻗고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향아. 그런 향아를 보고는 가희도 거울을 꺼내 자신의
용모를 한 번 확인했다. 잠시 후, 불이 꺼지며 크로커스가 무대에 올라왔다.
"꺄!"
"오빠!"
여기저기서 함성 소리가 들려오고, 크로커스의 노래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팬들은 '크로커스'라고 적힌 팻말을
들며,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향아 역시 준비해온 팻말을 들며 있는 힘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평소에 크로
커스에 대해 많은 관심은 없던 가희는 차마 팻말을 준비해오지 못해, 대신 손만 들며 소리를 질렀다.
"아직 그대만 기다리고 있어요. 곧 돌아올 거라 믿죠. 사랑하는 것만 알아줘요, 부디…."
신나는 댄스곡이 점점 흐리게 옅어지며 끝이 남을 알렸다. 팬들은 노래가 끝이 나자, 팻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아, 정말 귀 따가워 죽겠네.
괜시리 귀를 후벼파며 주위를 둘러보는 가희였다. 무심코 향아를 본 가희는, 입이 떡 벌어졌다. 금세 땀에 절어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대는 향아.
"향아야, 더우면 그 팻말로 부채질해."
"안돼! 그 행동은 크로커스 오빠들을 더럽히는 짓이야!"
"아… 그러세요."
손으로 하면 하나마나 전혀 시원하지 않을텐데 그래도 괜찮다며 부채질을 하는 향아.
나참, 댁같은 유별난 팬이 내 주변에 있는 건 또 처음이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무대를 다시 응시하는 가희. 무대에는 숨이 찬 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크로커스가 보였다.
그들은 마이크를 들어 동시에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크로커스입니다!"
크로커스의 말 한 마디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째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 고막 터지겠네.
성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는 가희.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크로커스의 목소리에 다시 앞을 주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크로커스의 멤버, 정한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크로커스의 멤버인 유한규입니다."
두 명의 인사가 끝나고, 다시 여기저기서 팬들의 소리침이 들려왔다. 그 모습에 한규는 싱긋 웃으며 워워, 를 연신 말했
다. 향아는 발이라도 만져보겠다며 무대로 손을 뻗었지만, 곧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울상을 지
으며 가희 곁으로 다시 돌아오는 향아. 가희는 그런 향아를 보며 픽, 웃고는 다시 크로커스를 보았다. 그 순간, 한결
과 눈이 딱 마주친 가희. 가희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계속해서 한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되려 의아해
하는 한결. 자신의 팬이라면 눈이 마주치면 소리를 지르고 난리법석을 떨어야 정상인데, 자신을 표정없이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건 또 어떤 경우인가. 한동안 계속해서 서로를 쳐다보던 그들은, 결국 한결이 먼저 시선을 돌려 끝이 났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들은 노래를 계속했다. 중간중간, 다른 가수들이 게스트로 초대되어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곤 했다.
어느덧, 마지막 순서가 다가왔다.
"네, 팬 여러분들이 가장 기대하시는 순서죠."
"네, 이번 순서엔 저희가 이 통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게 됩니다. 그 종이엔 여러 좌석들이 적혀 있는데요, 저희가 호
명하는 좌석에 앉으신 분은 무대 위로 올라오셔서 저희와 특별한 시간을 가지시면 됩니다. 총 열 명의 분들이 저희와
함께 하시게 됩니다."
"네, 그럼 제가 먼저 뽑아보겠습니다."
좌석이 적힌 종이가 들어있다는 통 속에 손을 넣는 한규. 한규는 아이같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네, K열 24번 나와주세요!"
한규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여자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무대까지 달리기 시작했
다. 그 팬은 한규에게 포옹해달라고 부탁했고, 한규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9명의 팬들이 크로커스와 함께 하고,
어느덧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여기저기선 양 손을 깍지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향아 역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고, 가희는 지루함에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한결의 목소리가 적막함을 뚫고 들려왔다.
"A열 20번 나와주세요."
한결의 목소리에도 아무도 움직임이 없었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가희는 향아의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서야 했다.
"가희야, 너야…."
주변 사람들의 부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무대에 떠밀려나온 가희. 가희는 자신을 보며 픽, 웃는 한결을 살짝 째려보고는
한규의 말에 귀 기울였다.
"와,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마지막으로 선택되신 분입니다!"
"자, 저희에게 바라는 거 말씀해주세요."
바라는거라….
한결의 말에 고민에 빠지는 가희. 가희는 크로커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향아처럼 광팬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
는 건 딱히 없는데. 그 때 어떤 한 팬이 큰 소리로 외쳤다.
"키스해요, 키스!"
가희와 한결, 그리고 한규가 놀라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 그 팬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참,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난리들이야.
가희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생각에 빠졌다.
뭘 해달라고 한담….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생각이 나지않아 그냥 내려가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결이 회심의 미소를 지
으며 슬며시 말했다.
"방금 한 팬분 말씀대로 키스로 할까요?"
한결의 말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가희. 그리고 놀란 표정의 팬들과 한규. 그들에 비해 여유로운 표정의 한결. 한결은
가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까처럼 둘은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피하지 않았다. 결국 이번엔 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한숨을 내쉬는 가희를 보며 한결은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번 분은 제가 뽑았으니, 제가 해도 되겠죠?"
"에? 이, 이봐… 읍…!"
한결은 가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여기저기선 팬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
고, 한규는 어떻게든 해볼려고 한결을 가희에게서 떼놓으려 했지만, 한결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결국
한참 후에, 가희가 한결의 중요한 부분을 발로 참으로써 둘의 입은 민망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가희에게 맞은
곳을 가리며 작은 신음소리를 내는 한결.
"아…!"
"이 빌어먹을 똥같은 새끼야!"
"아, 씹…."
"야, 무슨 키스야, 키스는! 내가 너보고 키스해달래?! 그냥 내려갈려고 했더니 이게 감히 누구 입술을 덮쳐?!"
"쿡, 왜. 처음이냐?"
"뭐… 뭐?! 너 말 다 했어?! 야, 이 미친놈아!"
결국 아까 향아를 제지했던 검은 양복의 무리들이 와서 가희를 끌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러자 바락바락 악을 쓰며
아둥바둥거리는 가희.
"야! 너네 이거 안 놔?! 저 새끼가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야, 이것 좀 놔 보라고! 아, 진짜 미치겠네!"
가희가 검은 양복 무리들에 의해 팬미팅장을 빠져 나가고, 한동안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가희가 나간 문 쪽
과, 크로커스를 번갈아보던 향아는 곧 가희가 나간 쪽으로 뒤쫓아나갔다. 가희가 사라진 곳을 보며, 자신의 입술을 매
만지는 한결. 한결은 자신의 입술을 한참동안 매만지다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한결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한규였다.
※ temptation ※
"아오, 뭐 저딴 것들이 다 있어?! 에라이, 엿이나 먹어라!"
건물을 향해 셋째 손가락을 치켜드는 가희. 가희가 그깟 키스에 이렇게나 흥분하는 이유는… 그 키스가 첫 키스였던 것.
아까 한결에게서 들은 그 한 마디와, 한결의 썩소가 잊혀지지 않는 가희였다. 혼자 열을 삭히며 벤치에 앉아있는데 누군
가가 가희의 어깨를 톡톡 쳤다. 가희가 성난 표정으로 뒤돌아보니, 혀를 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는 향아의 모습
이 보였다. 가희는 향아의 손에 들려있던 팻말을 뺏어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기겁을 하며 팻말을 뺏어가는 향아.
"어머, 얘가 미쳤나!"
"아씨, 그깟 팻말 갖고 대게 뭐라 하네!"
"야, 너같은 애가 크로커스의 정한결하고 키스 한 건, 행운 중의 행운이야, 알어?"
"행운은 개뿔."
"난 정말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한결오빠 괜찮을라나?"
"너 지금 내 앞에서 그 새끼 걱정하냐?"
"그 새끼라니! 아까 한결오빠가 너한테 급소 맞은 거 아플 것 같더라! 너 어떡할거야!"
"참나."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구 걱정을 하는거야?
향아가 한결을 걱정하자, 입을 쭉 내밀며 향아에게서 뒤돌아서는 가희. 향아는 그런 가희를 달래주지 않고는 벌떡 일어
나며 말했다.
"가자."
"어딜?"
"집에! 여기서 살 거니?"
"쳇, 근데 그러고보니까 너 왜 나한테 승질이야, 이 기집애야!"
"부러워서 그런다, 됐냐?! 아오, 나나 뽑히지, 왜 너가 뽑혀가지구."
가희를 살짝 째려본 후, 앞장서 걷는 향아. 가희는 그런 향아를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향아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이 기집애, 내가 집에 가는 길 모르는 거 아니까 이렇게 잘난 척 하는 걸꺼야.
향아를 있는 힘껏 가재미눈으로 째려본 후, 툴툴거리며 따라가는 가희였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3. #얽히고 얽힌 인연.
"…미치겠다."
신문을 살펴보던 가희는, 한숨을 토해내듯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크로커스, 정한결. 팬미팅장에서 팬과의 키스를 하다!]
기사 제목을 보던 가희는, 좌절하듯 힘없이 침대에 누웠다. 가희의 무게에 의해 침대가 출렁이더니 다시 원상태로 돌아
왔다. 기사 내용은 정말 놀라웠다. 인기 그룹, 크로커스의 정한결이 처음 보는 팬과의 키스를 시도했다는 내용인데, 그 내
용엔 한치의 거짓도, 오차도 없이 그 날의 일이 그대로 적혀 있어, 가희에겐 안 좋은 기억을 되살리는 좋지 않은 기삿거
리였다. 그나마 다행인게, 가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참. 그 새낀 왜 처음 보는 여자한테 키스질이야."
퉁명스레 혼잣말을 내뱉는 가희. 혼자 이런저런 말을 내뱉으며 툴툴거리던 가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입술을 만지자, 더욱 생생히 되살아나는 그 날의 기억.
"달콤하긴 했는데…."
혼잣말을 내뱉던 가희는, 이내 자신의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정말. 달콤하긴 개뿔. 더럽기만 했지.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세뇌시키는 가희. 애써 한결을 머릿 속에서 지워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귀여울 따름이다.
※ temptation ※
"야, 기사 났다."
"……."
"지금 완전 난리났어. 니 팬들이 그 여자 찾는다고 완전 난리들이라니까."
"……."
"야, 꿀 먹었냐. 말 좀 해봐."
"뭐."
"어떡할거냐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귀찮은 듯, 손사래까지 치며 말하는 한결. 그런 한결의 모습에 신문을 차 한 구석에 던져놓는 한규. 몇 번씩 생각해도
이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여자에게 관심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자식이 처음 보는 여자한테 키스라니. 달리는 차 속
에서 한참동안 고민하던 한규는 조심스레 한결을 불렀다.
"결아."
"야, 내가 결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아, 맞다. 습관돼서."
"근데 왜."
"너… 뭐냐?"
"뭔 소리야. 올드보이 패러디 하냐?"
"난 진지해, 이 새끼야."
장난치는 한결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치며 말하는 한규. 제대로 맞았는지, 자신의 머리를 잡으며 난리를 치는 한결. 한
규는 그런 한결을 보며, 흡족한 듯 팔짱을 끼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냈다. 한참동안 좁은 차 속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난
리를 치던 한결이 한규를 원망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인간이지 뭐냐, 이 나쁜놈아."
"그 여자한테 왜 그랬냐고."
"…내 팬이 아니더라고."
"어?"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더라. 내 팬은 대부분, 눈만 마주쳐도 막 난리를 치던데 개는 아니더라고."
"…흠."
"그리고 어떤 팬이 좋아하는 가수 팬미팅회 와서 책을 읽냐."
"진짜? 진짜 거기서 책을 읽었어?"
"그렇다니까."
아, 긍정의 대답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규. 그렇게 넘어가는 듯 싶었던 한규는 다시 한결을 붙잡고 물었다.
"아, 근데 그게 그 여자랑 키스했던 거랑 뭔 상관이야."
"야. 이 둔치야."
"씨, 뭐가."
"내 팬이 아니니까 약 좀 올려주려고 그랬다고. 그것도 이해 못 하냐."
"……."
"…야, 왜 말을 안 해."
"너, 진짜 못됐다. 너무 못됐어."
"내가 뭐!"
한결의 물음은 무시한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못됐어, 를 연발하는 한규. 한결은 그런 한규를 계속해서 보챘고,
한규는 한결의 손을 툭 쳐냈다. 한규의 뿌리침에 울상을 짓는 한결. 평소답지 않은 한결의 귀여운 모습에 풋, 하고 웃
어버리는 한규. 한결은 그런 한규의 웃음을 보고 한규가 화가 풀렸다는 걸 알고 바로 외면해버린다.
"야!"
"왜."
"너 왜 나 외면해!"
"화 풀렸잖아."
"…뭐… 뭐?"
"아씨, 나 잘거야. 말 시키지마."
한규의 손을 탁, 쳐내며 한규에게서 뒤돌아 잠을 청하는 한결. 그런 한결의 태도에 허, 하며 넋나가 있던 한규는 곧
정신을 차리고 한결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손가락을 마구 흔들었다. 한결은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한규의
행동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한결을 보며 마음껏 손가락을 흔드는 한규였다.
※ temptation ※
"아빠! 엄마! 가희야!"
현관문을 벌컥 열며, 신발도 대충 벗어 던져 놓고는 급하게 들어오는 가은. 그런 가은의 모습에 과일을 깎던 엄마는
깜짝 놀라 잘못하여 손을 베고 말았다. 엄마가 있는힘껏 가은을 째려보고, 가은은 흠칫하며 죄인마냥 고개를 살짝 숙
였다. 가은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오는 아빠와 가희. 아빠는 나와서 가은과 엄마를 번갈아보더니 엄마
의 손을 보고는, 약상자를 가져와 엄마의 손을 치료했다. 한참동안 잠자코 있는 가은을 보며 묻는 가희.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시끄럽게 들어와?"
"어머, 가희야!"
"왜."
"글쎄, 언니가 크로커스 매니저 하게 된 거 있지!"
"…그게 뭔 개소리?"
"언니! 아니, 이가은이! 오늘부로 크로커스 매니저가 됬다고요!"
"…에?"
가희가 믿기지 않아 되묻자,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하는 가은. 가은의 말의 습관적으로 되묻던 가희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 싸가지 없는 크로커스 매니저가… 언니라고?!
"거…짓말."
"거짓말이긴! 아, 꿈만 같애! 내가 그 인기가수 크로커스의 매니저가 되다니!"
"…아무리 언니가 연예계 쪽에서 논다곤 하지만, 그건 뻥이 좀 심하다."
"뻥이 아니라니깐?! 와, 나 미치겠네."
"얼른 잠이나 자."
"어떻게 해야 믿을래, 어?! 내가 내일 개네한테 너 소개시켜줄까?"
"아, 아니야! 됬어, 사양할게. 믿어, 믿는다구."
"아니야! 언니가 확인시켜줄게. 내일 언니가 점심 먹고 너 데리러 온다!"
가희가 거부의사를 밝힐 시간도 없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가은. 그런 가은의 모습에
가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그 새끼 얼굴을 어떻게 봐….
가은과 가희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시던 엄마와 아빠. 아빠는 엄마의 눈초리에 용기내어 가희에게 물었다.
"가희야, 가은이가 뭐라는거냐?"
"아, 몰라!"
아빠를 있는 힘껏 째려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버리는 가희. 쾅, 문이 닫히고 가희는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출렁, 한 번 크게 일렁이고는 다시 잠잠해지는 침대. 가희는 그런 침대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너도 나 무시하는거냐! 어? 내가 좀 무겁다고 지금 무시하는거냐고!"
침대가 대답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묻는 가희. 가희는 한참 후에야 주먹질을 거두었다.
내가 참… 뭐하는건지….
만약, 정말 만약 가은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희의 입장은 곤란해진다. 가은이 크로커스의 매니저이니, 자연히 크로커
스를 만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럼 앞으로 한결을 어떻게 대해야 한단 말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크게
소리 지르는 가희.
"악! 악! 왜 개네 매니저야, 왜! 왜 하필 개네냐고!"
※ temptation ※
"동생?"
"응, 누나가 동생이 하나 있거든."
"아…."
"동생이 너네 팬이라고 보고 싶다는데. 오늘 점심 시간에 시간 되는데, 어떡할까?"
"…만나지, 뭐. 누나 동생이라는데."
"헤, 고맙다, 한규야."
"나는."
"푸, 그래, 한결이도!"
그제서야 가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편하게 취하는 한결.
가은누나의 동생이라….
가은의 동생이 가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가은의 동생의 얼굴을 상상하며 눈을 감는 한결. 한규도 내심 궁
금한 듯, 손을 깍지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한결은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
귀찮은 표정으로 눈을 살짝 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은비.
"왜."
"한결, 오랜만!"
"어."
"한결아."
"왜."
"오늘 점심 때 시간 돼?"
"안돼."
은비는 보지도 않은 채, 말을 하는 한결. 한결의 단답형 대답에 울상이 되어 말하는 은비.
"왜? 스케줄 있어?"
"약속."
"칫, 여자야?"
"여자던 남자던 너가 뭔 상관이야."
"…여자구나?"
"어, 안돼냐?"
"…아니야. …나중에 보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는 은비. 한결은 그런 은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탑에, 핫팬츠. 그리고 섹시미를 강조하는 짙은 화장이 한결은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라니까.
은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한결이었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4. #위기에 처한….
"가희야! 아직 멀었어?"
"거의 다 됐어! 좀 기다려라, 좀!"
"늦었단 말이야! 늦으면 한결이가 뭐라 한다구!"
"언니한테 뭐라하면 내가 혼내줄게!"
문 밖에서 들려오는 가은의 외침에 큰 소리로 대답하는 가희. 한결, 한규와의 약속시간의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준비는 벌써 다 했지만,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나면 뭐라고 인사해야하지?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이가희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너무 가식적이잖아.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가희. 한결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어? 또 뵙네요."
아니야, 이건 너무 친한 척 하는 것 같잖아.
또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가희. 혼자 방 안을 돌아다니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가은의 외침.
"아씨! 내가 열쇠 따고 들어간다? 얼른 안 나와!"
"씨… 나간다, 나가!"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들고, 잠궜던 방문을 열어제끼는 가희. 문 밖에는 성난 표정의 가은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뭐야, 왠 똥폼이래.
저렇게 겁주려는 태도를 여러 번 보았는지, 신경도 안 쓰는 가희. 가희는 가은에게 얼른 오라고 말하고는 먼저 집을 나
섰다. 그런 가희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나가는 가은.
"엄마, 나 갔다올게!"
"가희 잘 데리고 다녀라!"
"걱정 마세요~"
엄마의 대답에 문을 쾅, 닫고 가희의 뒤를 쫓아오는 가은. 가희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리자,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가희를 따라 가은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고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둘은 서로 각자 다른 생
각을 하고 있었다. 한결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할지 고민하는 가희와, 가희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왜 저러
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가은. 가희는 결국 한결과 마주치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기로 했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1층
에 도착하고, 둘은 차례로 내렸다.
"언니가 차 갖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응, 빨리 갔다와."
가은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는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가고, 가희는 혼자 남게 되었다.
날씨가 꽤 춥네.
가희의 생각대로 서늘한 바람이 가희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결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추운 날엔 절대 안 입는
미니스커트와 얇은 코트를 걸친 가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훗, 이 정도면 개도 껌뻑 죽겠지?
자신을 보며 넋이 나갈 한결을 상상하며 웃음 짓는 가희. 생각에 잠긴 가희를 깨우는 클랙션 소리. 빵빵, 자동차 클랙션
소리에 고개를 든 가희는, 눈 앞에 보이는 가은의 차에 올라탔다.
"너 안 춥겠어?"
"견딜만 해."
"내가 오늘 춥다고 했잖니."
"비꼬지 말고 출발이나 해."
가희의 말에 입을 쭉 내밀고는 운전대를 잡는 가은이었다.
※ temptation ※
"어? 먼저 와 있었네. 우리가 좀 늦었지."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어."
"아, 그럼 다행이고."
"근데… 누나 동생은?"
"아, 화장실 좀 들렸다가 온대."
가은의 말에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한규. 잠시 후, 웨이터가 오고 무슨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던 도중, 가은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더니 한규와 한결에게 말했다.
"저기 오네, 내 동생."
가은의 말에 동시에 가은이 시선을 두었던 곳으로 시선을 두는 한결과 한규. 가은의 동생을 확인한 한규와 한규는 놀라
고 말았다.
저 여자….
부끄러워서인지, 수줍어서인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들의 곁으로 다가오는 가희. 한결은 그런 가희를 보며 픽, 웃어
버렸고 한규는 한결과 가희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안녕하세요…."
"야, 왜 말을 더듬어. 너답지 않게."
"하… 하하, 그러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가희를 보며, 의아해하는 가은. 가희는 가은의 옆에 앉았다. 가방을 의자에 걸쳐 놓고 고개를 든
가희는 자신의 앞에 앉은 한결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
한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돌려버리는 가희. 팬미팅날과는 다른 가희의 모습에 재미있어하는 한결이었다.
"얘가 내 동생이야."
"와~ 누나 닮아서 이쁘다."
"역시, 한규는 뭘 안다니까~"
"헤헤, 근데 소개 좀 해줘야지."
"아, 그래. 가희야, 자기소개를 해야지!"
가은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라는 가희. 가은의 말에 가희는 무거운 돌이 머리를 내려찍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아무렇지 않게 소개하는거야.
주먹을 꽉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가희.
"저는 이가희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 한살이구요. 학교는 서울대에요."
"와~ 공부 잘하나보다!"
"하하, 뭐 그렇죠…."
간단한 가희의 소개가 끝나고, 박수를 치며 말하는 한규. 한규의 말에 억지웃음을 지어내며 대답하는 가희였다. 한편, 한
결은 가희의 소개를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아, 내 동생한테 할 말 없어?"
"…없어."
"에이, 간단한 인사치레라도 해야지."
"정한결, 스물 세살."
가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짧게 인사를 하는 한결. 가희는 속으로 한결을 마구 씹어댔다.
고상한 척은 지 혼자 다 하네.
그들은 각자 스테이크를 하나씩 주문하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은과 한규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하하호호, 웃
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결과 가희는 꿀이라도 먹은 듯 잠자코 앉아 있었다. 평소에 연예인을 만나면 싸인 해 달라고
하고 난리를 쳤을 가희가 왠일인지 가만히 있자 의문점이 생긴 가은.
"야, 너 아까부터 왜 그래."
"어?"
"왜 그렇게 조용해?"
"아,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진짜?"
가희가 머리를 손으로 살짝 받치며 말하자,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가은. 가은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가희에게 계속
해서 질문을 해댔다. 언제부터 아팠냐, 왜 말 안 했냐, 집에 데려다줄까. 가은의 질문 공세에 가뜩이나 아팠던 머리가 더
아파옴을 느끼는 가희였다. 가희는 결국 한규와 한결, 그리고 가은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기, 제가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러는데…. 나중에 식사해요."
"아, 그럼 뭐 할 수 없죠. 나중에 봐요."
"네, 그럼."
한규의 대답에 고개를 꾸벅, 하고는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가희. 가희는 일어서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며 살짝 비틀,
했다. 가희의 비틀거림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 가희를 부축하는 가은.
"야, 너 많이 아픈거야? 병원 가자."
"아니야, 집에서 좀 쉬면 돼. 언니는 밥 먹고 와."
"정말 괜찮겠어?"
"걱정 말래도."
손으로 괜찮다는 표시로 대충 흔들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서는 가희. 가은이 걱정이 되는 듯, 가희가 문 밖을
나설 때까지 지켜봐주었다. 가게문을 잡고 나가려던 가희는 결국, 정신이 아득해져옴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가희야!"
가은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리며 들려왔다. 가희는 희미하게 잡아두었던 정신을 결국 놓고 말았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5. #알지 못할 속마음.
"어떡해!"
"내 등에 업혀!"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등에 개 업히라고!"
"너 저번 무대에서 허리 다쳤다며!"
"지금 그게 문제야? 동생 죽일래?"
한결의 말에 그제서야 쓰러져 축 쳐진 가희를 한결의 등에 업히는 가은. 한규는 놀라 안절부절하지 못 했고, 가은은 갑
작스러운 가희의 쓰러짐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축 쳐진 가희의 손이, 천천히 일어난 한결의 가슴 앞에서 흔들흔들 거렸
다. 한결은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벤에 올라탔다. 그 뒤를 따라 한규도 들어섰고, 가은은 서둘러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어야돼, 가희야….
가희 걱정에 운전을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가은이었다.
※ temptation ※
"어떤가요?"
"최근에, 환자분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적이 있나요?"
"잘… 모르겠는데요."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잠시 쓰러진 것 뿐입니다. 링겔 다 맞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고개를 꾸벅, 하고는 가희의 침대 곁으로 다가와 보조의자에 앉는 가은. 남의 땀은 쏙 빼놓고 새근새
근 잘만 자는 가희의 모습이 얄밉기까지 한 가은이었다.
이 나쁜 계집애….
힘든 일을 털어놓지 않고 혼자 쌓아둔 가희가 바보같다고 생각하는 가은이었다. 달칵, 병실 문이 열리며 한결과 한규가
들어섰다. 가은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결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래? 심각하대?"
"아니야, 그냥 삐끗한거래."
"하, 얼마나 걱정했는데…. 가뜩이나 허리도 다친 애가 가희를 업어서 잘못됐을까봐."
"좀 무겁긴 하더라."
"푸훗, 내 동생 요새 무지 먹거든."
가희가 들을 일도 없는데, 한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는 가은. 가은의 목소리가 워낙 큰 터라, 작게 속삭인다고 해도
한규까지는 들릴 정도였다. 그 말을 들은 한결과 한규는 픽, 하고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가희가 누워있는 침대로 시선을
돌리던 한결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진땀은 쏙 빼놓고, 잘도 자네.
가은과 같은 생각을 하는 한결. 한결은 속으로 가희를 험담하며, 병실 안 쇼파에 털썩 앉았다. 한규도 한결을 따라 한결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가은은 음료수 좀 뽑아오겠다며 병실을 나가고, 병실 안엔 한규와 한결, 그리고 가희만이 남게 되었
다.
"왜 그랬어?"
"뭐가."
"내가 업어도 되는데 왜 굳이 니가 업었냐고."
"유한규."
"왜."
"좋은 일은 너가 다 하게?"
"참나. 여태껏 그런 일은 신경도 안 쓰던 애가 왜 갑자기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나도 좋은 일 좀 해 보려고 그랬다. 나는 그러면 안돼냐?"
"누가 안 된대? 이상하다는 거지."
한결을 힐끗, 째려보고는 쇼파에서 일어나는 한규. 한규는 가희의 침대 맡으로 다가가 가희를 보며 말했다.
"관심 있냐."
"누구한테."
"이 여자한테."
"미쳤냐."
"아니."
"근데 그 질문은 뭐냐?"
한결의 말에 뒤돌아서며 싱긋, 웃는 한규.
"그냥. 딱 보면, 너가 이 여자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거든."
"실 없긴."
"그러게. 나이가 드니까 별 생각이 다 드네."
한규는 픽,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후, 가은이 검은 봉지를 하나 들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지 않에서 음료수 하나씩을 꺼내, 한규에게 하나, 한결에게 하나 나눠주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봉지에 넣
어둔 상태로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힘없이 보조의자에 털썩 앉았다.
"누나는 안 먹어?"
"내 동생꺼."
"와, 동생 대게 챙긴다."
"내 동생인데 내가 챙겨줘야지."
가은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한규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가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뒤척였다.
가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가희의 손을 붙잡었다.
"가희야!"
"으…음…."
"가희야, 괜찮아?"
눈이 부신 듯,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뜨는 가희. 가은은 가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허공에서 맴돌던 가희의 시선
과 가은의 시선이 곧 맞닥뜨렸다. 가은의 물음에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희. 가희의 대답에 가은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가희를 확, 일으켜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켁, 언니 이것 좀."
"정말 너 죽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런 걸로 누가 죽어. 여튼 이것 좀 놔달라니까! 숨 막혀."
가희가 결국 손으로 가은의 등짝을 때림으로써, 가은은 가희를 놔 주었다. 가은이 놔 준 후에 호흡을 가다듬는 가희.
가은이 어지간히 세게 안았나보다. 호흡을 가다듬던 가희는 그제서야, 가은의 뒤에 서 있는 한규와 한결을 발견했다.
"어?"
"안녕, 괜찮아?"
"아, 네…."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로 걱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한규. 가희는 그런 한규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싱긋 웃어주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가희를 쳐다보기만 하던 한결도 입을 떼고는 딱 한 마디 내뱉었다.
"몸 조심해라."
"…아, 네."
"가희야, 있잖아! 한결이가 너 여기까지 업고 왔어! 뭐, 비록 차를 타기는 했지만."
가은이 호들갑을 떨며 말하자, 놀란 표정으로 한결에게로 시선을 다시 옮기는 가희. 한결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말한
가은을 살짝 째려보고는, 괜히 딴 짓을 하며 가희의 시선을 피했다. 가희는 한참동안 한결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고… 마워요."
"뭐가."
"여기까지 업어 주신거요."
"무겁긴 하더라."
"네…?"
"아니야."
가희가 못 들은 듯, 되묻자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한결이었다.
저 꼬맹이가 들으면, 또 뭐라 꿍시렁댈 게 뻔하니 자제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귀에서 가희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인상을 쓰며, 자신의 귀를 손으로 막는 한결. 가희는 그런
한결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 temptation ※
"푸하하!"
"씨, 너 웃지 말랬지!"
"야, 솔직히 말이 돼냐?! 그 팔팔한 이가희가 고작 스트레스 따위로 쓰러진다는 게 말이 돼?"
"…말 돼!"
"뜸은 왜 들이는데!"
향아의 말에 씨, 라는 말만 내뱉으며 고개를 휙 돌리는 가희. 향아는 한참동안 배를 잡고 웃다가, 손으로 새어나온 눈물
을 닦으며 부러운 눈빛을 가희에게 쏘아보냈다. 그 시선을 느낀 가희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뭐."
"부럽다."
"에?"
"어찌됐든 정한결의 등에 업힌 걸 축복으로 알아, 기집애야."
"하이고마, 축복이랜다."
"이 기집애. 아주 굴러들어온 복을 떵떵 차는구나?"
"기집애, 기집애 하지마! 나 이가희라는 이쁜 이름까지 있거든?!"
가희가 고개를 쳐들며, 바락바락 소리치자 그게 더 웃긴 듯 더 크게 웃는 향아. 가희는 기분이 퍽 상했는지, 향아보다 앞
서 걷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가희가 삐졌다는 걸 알아챈 향아가 가희 옆으로 달려와 조잘댔다.
"그래, 가희야. 이가희! 됐지?"
"몰라."
"여튼, 나는 부러워서 그랬던거야. 크로커스의 정한결 등에 업힌거면 정말 행운이야."
"몰라."
"내가 업혔어야 했는데. 나 요새 다이어트까지 한단 말이야…."
"몰라."
"너 자꾸 몰라만 할래?"
"몰라몰라몰라! 저리 안 갈래?!"
가희가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치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향아. 가희는 자신보다 한결을 우대하는 듯한
향아의 태도에 화가 났다.
내가 그 자식보다 못 한 게 뭔데? 가수? 그딴거 나도 한다!
차마 이 말만은 내뱉지 못한 채, 화를 삭히는 가희였다. 한참동안 향아를 좋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던 가희는 길거리
깡패처럼 침을 찍, 뱉고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다. 가희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는 향아.
"침 뱉으면 쎄 보이는 줄 아나."
비웃음을 마음껏 날리며, 가희를 빠르게 쫓아가는 향아였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6. #더욱 가까워진….
탁. 2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강의에 지루해진 가희가 손으로 갖고 놀던 펜을 책상에 떨어트렸다. 가뜩이나 오늘은 향아가
아파서 못 나오는 바람에 수업을 혼자 듣게 되었다.
아씨, 오늘따라 수업 왜 이렇게 길어.
가희는 펜을 들어 연습장에 아무렇게나 끄적였다. 의식없이 연습장에 끄적이던 가희는 정신을 차리고 본 연습장을
찢어 버렸다. 가희의 종이 찢는 소리에, 선생님은 물론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가희에게 쏠렸다.
"문제 있나요, 가희학생?"
"아… 괜찮습니다."
"흠, 그래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고는 다시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 가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이러냐…. 연습장에 왜 그 새끼 이름을 적어.
가희에 의해 찢겨 바닥에 널부러진 종이 한 장. 종이에는 '정한결 개싸가지' 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 temptation ※
탁. 커피자판기에서 따끈한 커피를 빼내는 가희의 표정이 피곤해 보인다.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창가에 걸터앉는 가
희.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가희의 긴 머리가 흩날렸다. 가희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하…. 선향아 없으니까 대게 심심하네."
"또 보네?"
가희가 혼잣말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희에게 말을 거는 누군가. 가희는 창밖에 고정해두었던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그 누군가를 확인한 가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유…은설?"
"어?! 내 이름 기억하네?!"
"…아, 뭐. 하하…."
가희가 멋쩍게 대답하자, 싱긋 웃으며 가희의 커피를 가로채는 은설. 은설은 가희가 마셨던 커피를 꺼리낌없이 마셨다.
가희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은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희 앞에 마주 앉았다. 또 한 번 불어오는 바람에 가희의
머리가 흩날렸고, 향기로운 냄새가 은설의 코 끝을 자극했다. 향수 냄새인지, 샴푸 냄새인지 모르겠지만, 가희에게서 나는
향기가 은설은 너무나도 좋아 잠시 눈을 감고 감상했다. 가희는 이참에 잘됬다 싶어, 눈을 감은 은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오똑한 콧날, 짙은 눈썹,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턱선까지….
외모로는 그 자식한테 꿇리지 않네.
또 한 번, 한결을 생각하던 가희는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왜 자꾸 그 녀석 생각하는거야! 정신 차리자, 이가희!
"내 얼굴 다 감상했어?"
"…어, 어?"
"뭘 그렇게 당황해. 내 얼굴 감상 다 했냐구."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뜨며, 싱긋 미소짓는 은설. 가희는 두 번째로 보는 은설의 미소에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햇빛을
받아 더욱더 멋있어 보이는 은설의 미소.
"뭐야, 이젠 대놓고 감상하네?"
"엇, 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창피해 할 거 없다니까."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이구, 그래그래, 아가야."
"뭐?! 너 자꾸 나 놀릴래?!"
자신을 놀리는 은설의 모습에 울컥한 가희가 벌떡 일어나, 오른쪽 다리를 들어, 은설의 정강이를 차려던 순간.
"꺄!"
바닥이 미끄러워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은 가희는, 한참이 지나도 통증이 오지 않자, 한쪽 눈을
살짝 떠 보았다. 근데 이게 왠일인가. 자신이 은설의 품에 안겨 있는게 아닌가. 더군다나 은설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은설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는 가희. 남자에게 안기는 건 거의 처음인 터라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가희였
다. 그에 비해, 풋풋 자꾸만 실없이 웃는 은설. 가희는 은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너… 너 나 비웃지?!"
"풋…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만 보면 웃는구만!"
"풋… 니 얼굴이 웃겨서 그래."
"뭐, 뭐?! 야, 유은설! 너 일로 안 와?!"
가희에게 손을 들어 두어번 흔든 후, 힘차게 걸어가는 은설. 가희는 그런 은설의 뒤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은설
은 가희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계단을 타고 가희에게서 멀어져갔다.
씨, 저게….
손을 탁탁 털고 주위를 살펴보던 가희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눈에 띄는 행동을 했는데 주목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일 것이다.
"뭘… 뭘 봐! 갈 길들 가!"
괜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며 소리치는 가희였다.
※ temptation ※
"다녀왔습니다."
"어야, 가희 왔나?"
"응. 언니는?"
"니 언니는 그 크로키스인가, 크로케스인가 개네 매니저랍시고 집에 늦게 온다 안 했나."
"아… 그렇구나."
"후딱 씻고 저녁 먹으래이."
"응."
방문을 열고 들어온 가희가 힘없이 침대에 누웠다. 아까 넘어질 때 삐끗했는지, 발목이 시큰거려왔다. 걸을 때마다 시큰
거리는 바람에 집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이를 갈며, 읊조리는 가희. 가희는 이내, 목욕을 해서 발목을 풀어주자고 생각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그 때, 가희의 핸드폰이 침대 위에서 요란하게 진동 소리를 냈다.
누구지?
가희는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가희야,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 뭐야, 이 자식 이거 유은설이구만."
가희는 답장 버튼을 눌러,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야, 이 놈아. 재밌던? 나는 발목도 다쳐서 아파 죽겠구만."
소리내 읽으며 문자를 치던 가희는 전송을 눌렀다. 전송을 누르고 채 얼마 되지 않아 은설에게서 답장이 날라왔다.
가희는 빠르게 폴더를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헐! 너발목다쳤어?!]
은설의 답장을 확인한 가희는 코웃음을 치고는 답장을 끄적끄적 적어 보냈다.
[그래 다쳤다! 아파죽겠는데ㅠㅠ]
아픈 척하며, 문자를 보낸 가희는 옷을 마저 다 벗고,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욕실로 직행했다.
"엄마, 나 목욕하니까 한 시간 정도 걸려! 먼저 밥 먹어!"
"이 망할 놈의 가시나! 진작에 말하지, 다 차렸는데 지랄이노!"
"아, 미안미안!"
욕실 문을 잠구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와 물을 받는 가희. 물이 다 받아질 때쯤, 은설에게서 답장이 왔다.
[야! 너네집 어디야! 내가 약 사 갈게!]
은설의 답장을 확인한 가희는 답장버튼을 누르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아니, 이 자식이 내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나 알려준 적 없는데….
가희는 꾹꾹 버튼을 눌러 답장하고는 물을 잠궜다. 요란하던 물 소리가 멈추자, 온 세상이 조용해진 듯 했다. 지이잉, 또
다시 문자가 옴을 알리는 진동이 느껴지고, 가희는 문자를 확인했다.
[니 핸드폰 번호 다 아는 법이 있지~ㅋㅋ]
"이게 누구 약올리나."
[제대로 말 안 할래?ㅡㅡ]
답장을 보내고는 눈을 감아 잠을 청하는 가희.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다시 눈을 뜨고 문자를 확인했다.
[애들한테 수소문해서 알아냈어ㅋㅋ 여튼 발목 많이 아파?]
[별로 안 아파. 지금 목욕하고 있으니까 이따 문자하자]
[그래 알써~ 다 씻고 문자해!!]
은설의 답장에 핸드폰 폴더를 닫고는 다시 눈을 감아 잠을 취하는 가희.
"알다가도 모르겠어, 이 녀석은…."
은설을 생각하며 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가희였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7. #갑작스럽고 놀랍기만한….
"하, 시원하다~"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말하는 가희. 가희의 긴 생머리가 드라이기에 의해 흩날렸다. 한동안 시끄럽게 들
리던 드라이기의 소리가 멈춰지고, 가희는 엄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린 가희는 문을 살짝만 열어
고개를 빼꼼히 방 안으로 들이밀었다.
"뭐꼬?"
"밥!"
"니가 차려 먹으래이! 다 있는데 그것도 못 해 먹나?!"
"치."
엄마의 잔소리만 얻어 듣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는 가희. 막 문을 닫으려는 순간, 엄마가 가희를 불렀다.
"아, 맞대이. 가희야."
"어?"
"아까 니 우편물 왔던데."
"우편물? 편지?"
"편지인 것 같드만. 텔레비전 위에 올려놨응까 확인하래이."
"응, 알았어."
엄마의 방을 나서며, 고개를 갸웃하는 가희.
나한테 편지를 보낼만한 사람이 있나?
요즘은 모두 문자나 전화로 연락을 하기 때문에, 가희는 편지라는 걸 생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가희는 거실로 가, TV 위에 있는 편지를 꺼내들었다. 편지봉투에는 받는 사람, 즉 가희의 이름과
주소만 적혀있었을 뿐, 보내는 사람에 대한 건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구지? 애들이 장난쳤나?
가희는 편지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내용물을 꺼내드는 순간, 가희는 편지와 편지봉투를 놓치고 말았다.
"아!"
작은 비명을 내지르는 가희. 가희의 손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편지봉투를 뒤집어 쏟으면서, 안에 있던 칼심이
가희의 손을 스쳤던 것이다. 가희는 피를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편지와 편지봉투, 그리고 칼심만 응시할
뿐이었다. 가희의 비명소리를 들은 건지, 가희의 엄마가 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가희야, 무슨 일…. 흐메! 이 뭐꼬?!"
가희의 피를 보며 기겁하는 가희의 엄마. 엄마는 허겁지겁 가희의 손을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가희는 한동안
치료를 받다가, 엄마의 손을 탁 쳐버리고는 편지지를 집어들었다. 편지의 내용을 읽은 가희는 하,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희의 손을 치료하던 엄마는 가희의 뒤에서 몰래 편지 내용을 읽었다.
"너까짓게 뭔데 한결오빠랑 키스를 해. 죽고 싶어? 모자이크 처리만 되면 다 될 줄 알았어?"
"……."
"어메…. 이… 무슨 말이고? 키스? 모자이크 처리? 이게 뭐꼬?"
"……."
"가희야! 말 좀 해보래이."
"그냥… 엄마는 신경쓰지 말아줘. 머리 아프니까."
그렇게 말한 가희는 밴드가 붙여진 자신의 손가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사실 잊고 있었다. 요 몇일 새 그 일
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헌데 잊고 있던 일이 이렇게 떠오르게 되다니…. 가희는 피가 옅게 묻은 칼심과 편
지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뒤에서 엄마가 자신을 불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떠오
르지 않았다. 다만, 이 일을 어떡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하…."
한숨을 내뱉고는 편지 내용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가희. 주소가 적혀있지 않았을 때부터 알아챘어
야 했다. 뒤늦게 후회하는 가희.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어차피 맞닥뜨리게 될 일이었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눈을 꼭 감으며, 손에 든 편지를 구겨버리는 가희. 가희의 힘에 의해 편지는 힘없이 구겨져 버렸다. 가희는 다른
손에 든 칼심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의 피가 살짝 묻어, 약간의 공포감까지 조성하는 칼심. 이런 일은 TV에
서만 봤던 일이었다. 그 때는 정말 거짓말같았다. '세상에 저런 일이 어디있어.' 라고 생각했던 가희였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니, 막막하고 힘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기를 채 20분이 흘렀을까, 핸드폰
이 진동소리를 내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가희는 천천히 핸드폰을 집어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뭐해~? 설마... 아직도 씻는중?!]
"후…."
문자를 보낸 사람은 은설이었다. 그런 문자에 답장을 할 만큼 여유있지 않았던 가희는, 그대로 폴더를 닫아 버
렸다. 그래도 이내, 핸드폰을 붙들고 자신의 답장만을 기다리고 있을 은설이 떠올라 다시 폴더를 열어 꾹꾹 답
장을 썼다.
[다 씻었어. 나 지금 문자 못 하니까 나중에 하자]
전송버튼을 누르고는 침대로 가 힘없이 누워버리는 가희. 가희는 천천히 눈을 감아 잠을 취하려 했다. 꿈일 것
같아서, 이 모든 일이 꿈일 것 같아서….
자고 일어나면 내 손을 멀쩡할거고, 저 편지와 칼심은 없어지겠지?
자신을 스스로 타이르며 잠을 취하는 가희. 그 때, 방문이 쾅 열리며 가은이 들어섰다. 방금 집에 도착했는지,
가은의 양 볼이 추위에 의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야!"
"…뭐야?"
"엄마한테 다 들었어! 누구야! 누가 그런 짓 한거야!"
"……."
"편지 어딨어, 편지!"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편지를 찾던 가은은, 가희의 손에 꼭 붙들려 있는 편지를 낚아챘다. 가희는 힘없이 편지
를 가은에게 빼앗겼다. 가은은 구겨진 편지를 펴,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편지를 다 읽은 가은이 하,
한숨을 내쉬며 가희에게 물었다.
"이 편지에서 나오는 한결이가… 크로커스 멤버 정한결이야? 그래?"
"…응."
"…그럼 키스했다는 건 무슨 말이야…?"
가은이 차분하게 물었다. 가은의 물음에 가희는 힘없이 대답했다.
"다 사실이야. 그 편지내용 다 사실이야…."
"뭐야…. 저번에 한결이랑 같이 밥 먹을때…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잖아…."
"……."
"하…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키스라니? 이건 무슨 말이야?"
가은이 왼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가희는 천천히,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말했다. 가희의 말이
모두 끝나고, 가은은 넋나간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가은은 큰 소리로 웃었다. 화내는 것도, 그렇다고 우
는 것도 아닌 웃음.
"푸하하!"
가은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가은의 웃음 덕에 진지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가희는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고, 가은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풋, 아… 웃으면 안돼는데. 흠흠, 여튼 그 날, 팬미팅회에서 어떤 팬이 이상한 얘기를 해서 한결이가 너한
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둘의 키스하는 사진이 신문에 올랐는데, 니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됐고? 그랬
는데 팬들은 니 주소를 알아내서 이 편지랑 칼심을 보냈다 이거지?"
"…응."
"후, 어떡하겠어."
"……."
가은의 말에 가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
"…뭐?"
"그럴 수밖에 없어. 여기서 또 한결이가 너를 감싸고 돌면 일 더 커진다구."
"……."
"그냥 잠잠해질 때까지 견뎌야지, 어쩌겠어. 당분간은 저런 편지도 많고, 전화도 많이 오고, 심각하면… 집
까지 찾아올 수도 있어. 팬들이 워낙 독해야지 말이야. 여튼 잘 견뎌야돼."
"휴…."
"살다살다 별 일 다 겪네, 라고 생각했지?"
"풉…, 응."
가희가 웃으며 대답하자 가은은 가희를 품에 꼭 안았다.
"얼마나 놀랬냐, 진짜. 에휴…."
가희의 품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편하게 눈을 감는 가희였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8. #관심 갖게 되는….
따르릉.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가희는 전화기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보나마나 한
결의 팬들이 전화하는 것일거다. 1시간 전, 자다가 무의식적으로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를 받아든 가희는 깜
짝 놀랐었다. 상대편이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을 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젓는 가
희. 엄마는 어제 일을 다시 묻지 않았고, 가은 역시 평소처럼 대해주었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친 가희는 아직도
신나게 울리고 있는 전화기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고는 집을 나섰다. 문을 잠그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
로 내려온 가희는 밝게 미소지었다.
"와, 눈이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저번에는 눈이 오는 듯, 안 오는 듯 와서 쌓이진 않았는데, 이번엔 꽤
쌓일 듯 싶었다. 눈이 온다면, 뭐든 마다하고 밖으로 나가놀 정도로 눈을 좋아하는 가희로써는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일이었다. 잠시동안 하늘을 보며 눈을 맞고 있던 가희는, 시계를 한 번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에이, 눈 온다고 좋아했다가 강의 늦었네.
빠르게 걷던 걸음이, 이제는 달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강의실에 도착한 가희는 맨 앞의 줄에 앉아있는 향
아의 옆으로 가 털썩 앉았다. 책을 읽고 있던 향아는 옆에 앉은 가희를 보고 밝게 미소지었다.
"가희야! 어제 너 못 봐서 죽는 줄 알았다."
"풉, 나도 너 보고 싶었어!"
"보고싶었다고? 거짓말은…."
"에? 진짜거든?"
가방에서 책과 필기도구를 꺼내들며 말하는 가희. 향아는 그런 가희를 샐쭉한 표정으로 보고는 말을 이었다.
"애들이 그러던데? 너랑 유은설이랑 어제 아주 난리 부르스를 췄다며?"
"뭔 소리야?"
"어제 아주 둘이 신나게 놀았다매. 다 알거든?"
"신나게는 개뿔…."
"엇! 끝까지 발뺌을 할 셈이냐! 내가 증인까지 모셔놨는데도!"
"증인?"
향아는 가희의 뒤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가희는 의아해하며 뒤돌아보았다. 자신의 뒤에는 해맑게 웃고있
는 은설이 있었다.
어째 어제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네.
속으로 은설을 대견해하며, 미소짓는 가희. 은설은 그런 가희를 보며 마냥 웃었다.
"가희 안녕!"
"응, 안녕."
"오면서 눈 봤어?!"
"응, 많이 오더라."
"이따가 눈 많이많이 쌓이면, 눈사람 만들고 놀자!"
"풉…. 그래 알았어."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지어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은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향아는 연신 와
와, 를 연발해댔다. 은설과 가희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말이 안 나오는 향아였다. 자신이 하루 빠진 날에 저렇
게 친해지다니….
"야… 나 앞으로 학교 빠지지 말아야겠다."
"응? 왜?"
"하루 더 빠졌다가는 너네 둘이 아주 사귀겠어, 아주."
"에이, 사귀기는~"
"어머, 너 얼굴 빨개졌거든? 귀신을 속여라."
향아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하자, 양 손으로 볼을 가리며 헤헤, 웃는 가희였다.
※ temptations ※
"뭐? 진짜야?"
"응, 내가 거짓말 치겠어."
"……."
"뭐야, 그 동정의 눈빛은."
"난 너가 아무렇지도 않길래, 그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제는 진짜 막막하고 두려웠는데, 지금은 괜찮아, 뭐. 이러다 곧 말겠지."
가희가 음료수를 들이키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향아. 평소와 다름없는 가희의 모습에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향아였다. 가희가 어제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생각해보는 향아였다.
이럴 때만 어른같다니까.
가희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픽,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는 향아였다.
"왜 혼자 웃고 그래."
"그냥 웃긴 게 생각나서."
"나도 좀 웃게 말해줘 봐."
"가까이 와 봐."
향아가 손을 까딱까딱하자, 향아의 입 근처로 자신의 귀를 가져다대는 가희. 향아는 가희의 귀에다 대고 크
게 소리를 질렀다.
"아악!"
"꺄! 죽을래?! 고막 터질 뻔했잖아!"
"히히, 재미있다~"
"유은설이랑 하는 짓이 똑같애!"
"개가 어떤데?"
"맨날 장난치구. 나 놀리고."
"오오~ 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셨어요?"
"네!"
향아의 존칭에, 어린아이같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가희. 향아 역시, 그런 가희의 웃음을 보고서는
밝게 미소지었다.
※ temptations ※
"야, 니네 팬들 무섭더라."
운전을 하다가 쌩뚱맞게 말하는 가은. 가은의 말에 한규와 한결의 시선이 동시에 가은에게 꽂혔다. 한규
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운전하는 가은을 흔들어댔다.
"아, 알았어. 말해줄게. 이것 좀 놔봐."
가은의 말에 그제서야 가은을 놓아주는 한규. 가은은 픽픽,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냥 니네 팬들이 너무 무섭다고. 너네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완전?"
"…아니야."
"뭐야."
"특히 한결이."
"내가 뭐."
"아니야."
실컷 띄워놓고 얘기하지 않는 가은의 대답에 한규는 삐져버린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한결 역
시 읽고 있던 잡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한결은 읽고 있던 잡지
로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누나."
"어?"
"누나 동생 말이야."
"……."
한결의 말에 굳어가는 가은의 표정. 물론, 뒤에 있는 한결은 가은의 표정을 살피지 못 했다. 가은이 대답
하지 않아도 말을 이어가는 한결.
"잘 지내는지 궁금하네. 저번에 입원했었잖아. 이젠 괜찮대?"
"…왜."
"어?"
"그걸 왜 니가 궁금해 하냐고."
"…그냥."
"내 동생한테서 신경 꺼. 가희가 싫어할거야."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잠이나 자. 오늘 스케줄 빡빡하니까."
가은의 차가운 대답에 어리둥절해하는 한결. 하지만 이내, 별 일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가은의 말대로 잠을
취하는 한결이었다. 가은은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차를 멈추고는, 백미러로 한결을 응시했다. 두 눈을
꼭 감고 팔짱을 껴 잠을 자고 있는 한결이 너무나도 얄밉게 느껴지는 가은이었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09. #오랜만의 만남, 하지만 원치는 않았던….
한결의 팬이 보낸 협박편지 사건 후, 많은 팬들이 협박편지와 전화, 심한 경우엔 집까지 찾아와 가희에게 협
박을 해 왔다. 하지만, 가희는 이 악물고 참아냈다. 여기서 저 팬들을 상대하면 자신만 골치 아파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2주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런 일이 반복됬지만, 팬들도 지친 듯 이젠 몇몇 소수의 팬들 빼고는
가희에게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가희는 그 힘든 일을 견뎌낸 자신을 대견해하며, 일상생
활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컴퓨터로 영화를 보던 가희. 이제 영화가 절정에 치닫
을 때 즈음, 가희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아씨, 누구야."
가희는 동영상 일시정지를 해 놓고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가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사람
은 다름아닌 가은이었다.
언니가 왠일이지?
가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가희야!"
"어, 언니가 어쩐 일이야?"
-"언니가 부탁 하나만 하자!"
"에이, 귀찮게시리…. 뭔데?"
-"언니 방에 가서 책상 보면, 언니가 무슨 서류 올려놨거든? 그거 중요한 서류인데 지금 갖고 와 줄 수 있어?"
※ temptations ※
"여기가 맞나…?"
가은이 부탁한 서류를 들고, 큰 건물 앞에 멀뚱히 서 있는 가희. 많은 사람들이 건물 문을 드나들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여기 맞는 것 같은데….
가은이 알려준 데로 찾아오긴 했지만, 워낙 길치인 가희인 터라 멀뚱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들어
갈까 말까, 고민하던 가희는 결국 건물 문을 살짝 밀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
었다.
흠, 잘 찾아온 것 같네.
잘 찾아온 자신을 대견해하던 가희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로
가려던 가희는 이상한 기계 앞에서 막히고 말았다.
"아! 이거 뭐야?"
기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판막 비슷한 게 가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희는 깜짝 놀라 판막을 밀어냈지
만, 쉽게 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희가 판막을 밀어대자, 기계는 결국 이상한 기계음을 내고 말았다.
"에? 이거 뭐야! 왜 이래?"
혼자 기계 앞에서 난리를 치던 가희는, 누군가에 의해 행동을 멈춰야했다. 누군가가 가희의 팔목을 잡았고,
가희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보았다. 옆에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경비원이 있었다.
"…누구 찾으러 오셨습니까?"
"아, 저희 언니 찾으러 왔는데요. 이거 좀 치워주세요. 이거 왜 이래요?"
가희의 물음에 경비원은 어느 한 곳을 턱으로 가리켰다. 가희는 경비원의 턱 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가
희의 시선 끝에는 명찰을 기계에 찍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희는 넋나간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핸
드폰을 꺼내 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가은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가희는 핸드폰을 과격하게 주머
니에 쑤셔넣고는 경비원을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저씨~ 저 들어가야 돼는데, 한번만 봐주세요."
"나중에 오십시오."
"아, 아저씨~"
"이러지 마십시오. 연락을 취하시던가, 나중에 오시던가 하십시오."
그렇게 가희가 한참동안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가희의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얘 제가 아는 애에요. 들여보내주세요."
경비원은 자연스레 가희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가희 역시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려 했
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가희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이 새낀 여기 또 왜 있는거야…?
가희는 싱긋, 웃고 있는 한결을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경비원은 한결과 대화를 나누더니, 가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가희는 경비원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가희의 뒤를 따라오는 한결. 한결은 가희의 옆에 착 붙어섰다.
"헤이."
"…왜요."
"고맙다는 말도 안 하나?"
"왜 해야 되는데요. 도와달라고 안 했거든요?"
"아, 그래? 근데 여긴 어쩐 일이지? 가은누나 보러 왔나?"
가희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에 들린 서류를 한결 앞에서 흔들어댔다. 한결은 서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척은….
한결의 태도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은 가희에게는, 끄덕임조차도 짜증나는 행동이었다. 잠시 후, 엘리
베이터가 도착하고, 가희와 한결이 나란히 올라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가희는 당황해 할 수밖
에 없었다. 가은이 몇 층으로 오라고는 말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에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했던 가은
의 말이 뒤늦게 떠오른 가희는 버튼 앞에서 당황해했다. 한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5층 버튼을 눌렀고, 가희
는 멀뚱히 서서 눈만 껌뻑였다.
"설마… 몇 층인지 모르나?"
"……."
"가은누나 찾으러 온 거 맞으면, 아마 6층일거야."
한결의 말에 입을 삐죽 내밀고는 6층 버튼을 꾹 누르는 가희.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올라갔고, 둘 사이에는 정
적이 흘렀다. 어느덧, 5층에 도착하고 한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가희에게 말했다.
"다음부턴 모르면 멀리까지 나오지 마라, 꼬맹아. 그러다 길 잃어버리면 큰일나."
한결은 그 말을 남기고는 싱긋, 한 번 웃고는 멀어져갔고, 가희는 서서히 닫혀가는 문 사이로 보이는 한결
을 허탈한 표정으로 볼 뿐이었다.
저 새끼… 나중에 보기만 해봐. 죽었어….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며, 한결을 마구 씹어대는 가희였다.
◎꼬맹이의 달콤한 유혹
10. #그녀 하나로….
탁. 가희가 가은의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던졌다. 갑작스러운 가희의 태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
고 가희를 쳐다보는 가은.
"뭐야, 내가 심부름 시켜서 그래?"
"언닌 어떻게 그러냐?"
"어? 내가 뭐 잘못했어?"
"도착하면 전화하라며! 전화 왜 꺼놓는데?"
"회의중이었어."
"네네, 어련하시겠어."
가은에게 툭 던지듯 말하고는, 가은의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는 가희. 가은은 그런 가
희를 보며 허탈한 듯 웃으며 가희가 가져온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를 꺼내 살펴보던 가은이 갑자기 생각난
듯 가희에게 물었다.
"근데 나 6층인 건 어떻게 알았어?"
"어?"
"내가 몇 층이라고 말 안 해 줬잖아. 그리고 1층에서 걸릴텐데? 안 걸렸어?"
"아… 그… 어, 맞다! 1층에 경비 아저씨한테 한 번 걸려서 경비 아저씨 화장실 갔을 때 후딱 왔지!"
"어떻게?"
"그거 기계 그냥 뛰어넘었지."
"풋… 너답다. 근데 6층은 어떻게 알고 왔어?"
"…아… 음, 그래! 지나가던 사람한테 물어봤어! 이가은 아냐구. 안다길래 몇 층에 있냐구 물어봤지!"
가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자,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은.
하여튼 이럴 때만 예리한 척 한다니까….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컴퓨터를 하는 가은을 있는 힘껏 째려보는 가희. 물을 다 마신 가희는 컵을 가은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없어?"
"뭐가?"
"일을 했으면 일당을 줘야죠, 아줌마."
"뭔 일당이래. 그냥 가!"
"허허, 이 아줌마 보시게. 내가 나가서 언니 이름 퍼트리면서 시끄럽게 다니면 참 좋겠슈?"
"…너 나 협박하는거야? 절로 안 가?!"
좁은 사무실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가은과 가희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모든 행동을 멈춰야했다. 달
칵. 문이 천천히 열리며 들어선 한결과 한규, 그리고 은비. 가은과 가희는 뛰어다니던 포즈 그대로 정지되어
멀뚱한 표정의 세 명을 멍하니 응시했다. 늦게서야 정신을 차린 가희가 서둘러 용모를 단정히 하고, 가은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섰다. 가은과 가희를 보며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던 한결은 픽, 재수없게 웃고는
자연스레 사무실 안 쇼파에 앉았고, 은비 역시 가희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한결의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
다. 한규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가희에게 다가와 가희를 자신의 품에 쏙 안았다. 한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한결과 가은. 은비는 흥미 없다는 듯 다른 곳만 응시할 뿐이었다.
"오랜만이야!"
"…아, …네…."
"하하, 더 이뻐진 것 같네?"
"아… 저기, 이것 좀…."
"어? 뭐라구?"
"이거… 숨 막히는데…."
가희의 힘겨운 대답에 서둘러 가희를 품 속에서 빼는 한규. 한규는 미안했던 듯,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이
내 다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와, 좋다!"
"…네?"
"품에 쏙 안기고도 자리가 남아! 대게 좋다! 난 그런 여자가 좋던데!"
"아… 하하…."
가희는 어색하게 웃었고, 한규는 헤헤, 어린아이같이 웃었다. 둘의 대화가 잠시 끊기자, 썰렁해져버린 사
무실. 한규와 가희는 그제서야 가은과 한결의 시선을 느꼈고, 서둘러 서로의 몸에서 떨어졌다. 한결은 한
규를 차갑게 쳐다보았고, 가은은 놀라서 커진 눈을 껌뻑거렸다. 가희는 멋쩍게 웃으며, 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아, 어…언니."
"어… 어?"
"나 가 볼게."
"왜 벌써 가? 좀 있다 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
가희가 불편한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한결을 떠올리는 가은.
"아, 그래! 피곤하댔지! 얼른 가 봐. 서류 땡큐~"
"응, 이따 집에서 보자."
가은에게 살짝 웃어보이고는 한결과 한규, 은비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가희. 은비는 한결의 옆에 착 달라
붙어서 가희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았다. 가희는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그대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시선
을 피하자마자 눈이 마주쳐버린 한결. 한결은 가희를 차갑게 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본대….
가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들 쪽으로 인사를 했다.
"저… 안녕히 계세요."
"응, 그래! 다음에 또 봐, 한품아!"
"네? 한…품이요?"
"아, 응! 한 품에 쏙 들어오는 한품이!"
"아… 풉, 네. 나중에 또 뵈요."
한규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오는 가희.
에휴, 여튼 언니 때문에 되는 일이 없네.
괜한 가은 탓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터벅터벅 걷는 가희였다.
※ temptations ※
"유한규."
"어, 왜?"
"…내가 무슨 말 할지… 알 것 같지 않냐?"
"모르겠는데?"
"…장난치냐?"
"뭔 말이 하고 싶은거야. 돌려서 말하지 마."
한결의 차가운 모습에 덩달아 딱딱해져버린 한규의 말투. 가은은 둘의 모습을 보기 싫다는 듯, 의자에 앉아
컴퓨터에만 몰두했다. 여전히 한결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은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규와 한결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결은 픽, 기분 나쁜 웃음을 보였다.
"…미친놈. 넌 어릴 때부터 내 것만 갖고 싶어하더라?"
"…어릴 때 얘기가 왜 나오는데?"
"나보다 성적도 안 좋았고, 우리 집보다 잘 살 지도 못 했고…. 그래서 넌 맨날 내것만 갖고 싶어했지?"
"……."
"근데 어른이 되서도 그럴 줄은 몰랐네?"
"…돌려서 말하지 말랬지."
"다른 것 다 줘도, 그것만은 못 주겠다."
은비의 팔을 툭, 쳐내고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하는 한결. 한규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결을 응
시했고, 은비는 힘없이 떨어져버린 팔을 들어 괜히 머리를 만지작댔다. 한결은 한규를 보며 비웃음 섞
인 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한규의 귀에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꼬맹이는…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