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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승활동기 1600~1700 | 노사생존기 1798~1879 | |
정유 | 1657년 | 1837년 |
무술 | 1658년 | 1838년 |
기해 | 1659년 | 1839년 |
경자 | 1600년 1660년 | 1840년 |
신축 | 1601년 1661년 | 1841년 |
임인 | 1602년 1662년 | 1842년 |
노사의 생존년도는 1798~1879이므로 위의 심혈시기는 선생이 39~44세때이다. 노사선생님은 34세에 소과 장원급제하고 40세부터 사옹원부 평안도도사등 40여차례 벼슬을 받지만 모두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성리학 6대가 중 한 사람으로 여러 문집을 남겼고 재주가 많아서 천문지리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노사선생의 행적으로 보아 지리에 밝았다 하더라도 한창 분주하던 40세 전후에 6개년에 걸쳐 전남일원을 유랑하며 80개 산도를 작성하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근세라 할 수 있는 1840년 무렵의 행적이 숨겨져 있을 리 없고 산도원본이 그 집에서 나오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일이승이 전남지역 산도를 한장도 만들지 않았을 리 없다. 결국, 노정이라 표시한 산도는 일이승의 작품이거나 또는 일지승과 일이승 사제의 합작품정도로 이해되고 일지승 사제의 활동년도가 1660년경(두사충 1627년 死)임을 알 수 있다.
고창 금반옥호, 임피술산 복구형의 산도작성자는 노정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다. 금반옥호에서 지적한 변씨묘는 인천 변성진(1549~1623) 묘이므로 일이승 활동시에 이미 쓰여 있었으나 만약 그 아래 변씨묘가 일이승 사후에(입묘시기를 확인하지 못했다) 쓰여졌으면 노정은 기정진이거나 제3자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노사 기정진은 두암초당에 風山高而水長이란 현판을 헌납할 정도로 인천 형제를 존경하였는데 예의없이 인천묘 앞에 진혈이 있다는 산도를 남겼겠는가? (2019.12.30)
첫댓글 일이승 ,일지승 , 노정 명확하지 않아 헷갈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