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 아내의 일기에 이어
향수를 달래준 화가 박수근
자유와 욕망에대한 정신의 방황을 많은 예술가들이 했던것과는 달리 그는 지극히 평범한 가장 이었습니다.
박수근의 내면에 그런부분이 내재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그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남편 박수근이 었으며 박수근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인이 아내 였습니다.
박수근이 아내를 만날 무렵 그래도 괜찮게 살았던 그의 집안의 몰락은 아버지가 사방 팔방으로 광산을 하느라 돌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에다 볼품없이 가난했지요, 그런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기 께름칙했던 처가집은 딸을선뜻 내놓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을 했었고 남들이 보지 않을때는 아내를 업어주는 것이 박수근의 행복 이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
<나무와 두 여인> 1962
130×89cm, 캔버스에 유채
<여인과 소녀들>
<여인과 소녀들> 1962
22×25.5cm, 하드보드에 유채
<춘일>
<춘일> 1950년대
24×33.5cm, 하드보드에 유채
미망인의 회고에 의하면 가난한 살림에 미 8군에서 초상화 일감을 얻어 툇마루에 앉아
러닝셔츠에 땀이 홍건히 배이도록 열심히 그리는 남편의 모습이 안스러웠다고 회고합니다.
다른 예술가들 처럼 방황과 자유와 욕망이 박수근에게는 왜 없었겠습니까?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랬던 순하디순한 박수근의 성품은 결국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박수근 사후 작품관리도 장욱진이나 김환기 같은 당대를 함께 했던 다른화가들에 비해 허술했던것도 시대를 대비할수 없었었던 미망인과 가족의 생활고 였습니다. 아무른 생활대책이 없었던 미망인은 어린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을 감당할길 없었습니다. 화가 아버지의 재능이 아들딸들에게 이어져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던 자식들에게 기어히 미망인은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합니다.
박수근 미망인이 살았던 가난은 뼈에 사무치도록 사무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뒤 박수근의 그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라가도 박수근의 유가족들이 이미 유작을 생활고로 거의 다 팔고 난 다음 이었습니다.
박수근 그림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한국의 산업화에 힘입은 고도성장후 그의 그림에서 그들이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이 고스란히 작품속에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70년대 중반 가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박수근 그림을 바라보며 가슴속 추억을 그의 그림 한점으로 향수를 달랠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인들>
<여인들> 1960년대, 16.5×33cm,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 출생으로 12세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룩한 화가의 길은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으며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화단에 등장하였습니다. 8·15광복 후 월남하여 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으며. 58년 이후 미국 월드하우스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59년 제8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 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을 했습니다.
아픈역사의 산물이요. 시대를 그런운명속에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던 한국 근대 화가들의 모습입니다
그림출처 : Gallery HYUND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