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쿠르 상의 파격적인 결심!
21세기 프랑스 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피에르 르메트르
피에르 르메트르는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977년 커뮤니케이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2000년대 중반까지 지역 공무원과 도서관 사서들을 대상으로 문학 세미나 강좌를 열다가 55세의 나이로 뒤늦게 소설을 썼다. 22군데 출판사에 보낸 원고는 22군데에서 전부 거절됐고, 8일 후에 생각을 바꿨다며 한 출판사가 전화를 걸어 왔다. 이렇게 출간된 첫 작품 『이렌』(르마스크, 2006)은 코냑 추리 문학 페스티벌 소설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발표한 『웨딩드레스』, 『실업자』, 『알렉스』, 『카미유』로 2009년 상당크르 추리 문학상, 2010년 르 푸앵 유럽 추리 문학상, 2010년 유럽 추리 소설 대상, 2013년과 2015년 영미권 최고의 장르 문학상인 CWA 인터내셔널 대거상 등을 받으면서 등단 후 발표한 작품들이 모두 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며 추리 소설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르메트르는 문학을 가르치던 20여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며 이 시기에 《교양을 공고히 했고, 지식을 체계화했으며, 부족한 점들을 메워 갔다》고 회상한다.
전 유럽 문학상을 휩쓴 르메트르는 2013년 『오르부아르』로 공쿠르상까지 거머쥐었다. 문학성과 예술성을 중심으로 수상작을 선발하는 최고 문학상에 대중 문학 작가가 뽑힌 것은 프랑스에서도 엄청난 이변으로 평가받았다. 심사 위원 피에르 아술린에게서 《이 시대에 출간된 가장 강력한 소설》이라는 평을 받으며 프랑스에서만 1백만 부가 판매되었다.
소설은 종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총격 사건으로 시작한다. 프랑스군 정찰병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파문을 일으키고 프랑스군은 독일군 진지를 급습하기에 이른다. 전투 중에 총격 사건의 가공할 진상을 우연히 알게 된 병사 알베르는 포탄 구덩이에 파묻히고, 그를 구하려던 에두아르는 포탄 파편에 맞아 얼굴 반쪽을 잃는다.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두 친구는 사회에 복귀하지만, 다시 살아남기 위해 분투를 벌여야 한다. 전사자들은 추모하는 반면 골치 아픈 생존자들은 떨쳐 버리려 하는 국가의 위선 속에서 사회의 언저리로 내몰린 두 전우는 전후의 혼란상을 틈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사기극을 꾸미기로 마음먹는데…….
1922년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착복 스캔들에서 모티프를 가져 온 이 소설은 사기꾼들이 승리하고 자본가들은 폐허 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프랑스를 거장의 솜씨로 그리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면서도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심오한 철학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스펜스와 유머, 그리고 비극이 완벽하게 결합된 2010년 이후 최고의 프랑스 소설이라고 평가받는다.
책 속으로
알베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관자놀이가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고동친다. 몸속 혈관들이 죄다 터져 버릴 기세다. 그는 세실을 부른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고 싶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꽉 조여지고 싶다. 하지만 세실의 모습은 그에게까지 와 닿지 못한다. 마치 너무 멀리 있어서 올 수 없는 것 같고, 이것이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다. 지금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옆에 있지 않다는 것이. 이제는 그녀의 이름만이 남아 있다. 왜냐면 지금 그가 빠져드는 세계에는 몸이 없고, 다만 말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애원하고 싶다. 죽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그녀 없이 홀로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녕, 천국에서 다시 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안녕, 나의 세실.
-본문 37~38면
인근 도시의 사람들이 와서 병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량한 얼굴들이었다. 여자들은 아들을, 남편을 찾는다며 팔을 쭉 뻗어 사진들을 내밀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따로 없었다. 아비들은 뒤에 머물러 있었다. 몸부림을 치고, 질문하고, 조용한 투쟁을 계속해 가고, 또 아침마다 아직 남아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이었다. 사내들은 희망의 끈을 놓은 지 이미 오래였다. 질문을 받은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진들은 모두가 비슷비슷했다.
-본문 146면
에두아르는 가족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마들렌을 많이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선 꽤 많은 추억들이 있었다. 터지려는 폭소를 꾹 참던 것, 문가에서 보내던 미소, 그의 머리통을 긁어 주던 구부린 손가락들, 그리고 그들의 공모 의식.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웠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누군가를 잃은 여자들이 다 그렇듯 그녀도 상심했으리라.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시간, 그 위대한 의사가 온다…….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법이다.
-본문 284면
그는 아침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이 나무로 된 광고판을 받아서 메고 다니다가, 간단히 요기만 하는 점심시간에 다른 걸로 바꿨다. 아직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제대 군인들이 대부분인 직원들은 한 구(區)에 열 명 정도 됐으며, 여기에 감독관이 하나 있었는데, 항상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는, 어깨나 좀 주무르려고 잠시 멈춰 설라 치면 번개같이 튀어나와서는, 당장에 다시 움직이지 않으면 해고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 주머니 속의 모자를 꺼내기 위해 잠시 서는 것도 금지된 일이었다.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게 바로 자네들 일이야.」 감독관은 말하곤 했다. 「자넨 군대에서 《땅개》였지 않았어? 이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문 391~39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