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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시모노세키 여행5 - 시모노세키시의 부관 페리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2023년 2월 25일 시모노세키 가라토 시장 (唐戶市場) 에서 스시에 마구로와 새우 튀김을 사서는
해변의 방파제에서 먹은후 예수회 소속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가 후쿠오카에서 여기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聖 フランシスコ サビエル 下関上陸記念碑” 를 구경합니다.
해변에서 복어 동상 에다가 돌고래 가 조각되어 있는 것을 구경하면서 걸어서 부관 페리
터미널 에 도착해 딸 부부를 만나 수속을 하고는 출국검사를 거쳐 배에 올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 넓은 선실에서는 식당이 있어 식사는 물론이고 맥주 까지 한잔 걸칩니다.
그러고는 배 갑판으로 나가 멀어져 가는 시모노세키 항구 를 마음으로 전송하고는
칠흙 같이 어두운 밤바다 를 바라보다가 다시 맥주를 한잔 한 후에 우리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해서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니 다시 갑판으로 나갑니다.
배는 밤새 달려서 대마도를 지나고 이제 대한민국 영토로 접어든 것 같은데.... 문득 BC 3세기
부터 한반도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주민들은 청동기에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대마도와
일기도를 징검다리 삼아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석기 시대 문명에 머물던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 들을 제압해 쫓아내고 일부는 동화시켜 규슈에 소국들을 세웠으니 왜국 인가 합니다.
그런데 BC 3세기부터 최초로 한반도에서 건너갔던 사람들은 누구냐 하는 의문이 드는데....
고구려나, 신라 및 백제인들은 아니고 해변이나 섬에 살던 왜인들의 조상들
이었으며 이후 김해 금관가야 가 건너가서 왜 소국들을 통합해 야마토 왜국 을 세운줄 압니다.
금관가야 거등왕 때인 서기 210년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 이 공모하여 가라(加羅)
를 침범 하자, 가라는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니.....
신라 나해왕(奈解王) 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利音) 을 보내어 가라를 구원합니다.
포상 팔국 은 신라의 방해에 대한 보복으로 서기 212년 8국중 골포(骨浦 마산)· 칠포(柒浦칠원)· 고사포
(古史浦 고성) 3국이 신라의 갈화성(竭火城, 울산) 을 공격 하였는데, 가야는 보답으로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냈으니, 저 포상 8국이 BC 3세기부터 최초로 일본으로 건너간 왜인 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왜인이 신라를 침략해온 기사가 스무차례 가 넘는데 그중 벌휴 이사금 때인
서기 193년 왜인 천여명이 흉작으로 기근이 들어 걸식 하러 왔다는 기사가 있으니
이는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기 보다는 경상도 남부에 거주하는 왜인 이 아닌가 합니다?
유례(295), 내물(393) 실성(408) 때의 대규모 침공 과 수도 서라벌이 포위 되어 고구려가 5만 원군을 내려보낸
기사를 보면 큐슈에서 건너온 왜군 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보여지지만..... 조분(232), 걸해(346), 눌지
(444) 때는 왜군이 불시에 나타났고 선박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경상도 남부 왜인들 이 아닌가 합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동아일보에 “골포국, 사물국...1900년 전 남해의 무역 강소국들” 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리아스식 해안 지형의 남해안은 경관이 수려하고 해산물이 풍부하다. 파도가 잔잔
해서 오랫동안 해상 교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조운선 이 그곳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그곳을 필사적으로 지켰기 때문에 조선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남해안 항로는 삼국시대에 각광받았는데, 소가야가 주름 잡았으며 여러 세력들은 저마다 포구
에 자리 잡고 국제 교역에 참여하며 성장했는데, 소가야는 알려져 있지만 언제쯤 무엇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가 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는지 는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간간이 발굴된 유적과 유물만이 그 옛날 소가야의 영화 를 보여줄 뿐이다.
국제 무역항으로 발달한 ‘늑도 ’: 남해안 항로에 국제 교역 중심지가 세워진 것은 소가야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이다. 1979년 부산대박물관 연구원들이 삼천포(현 사천) 앞
작은 섬, 늑도 를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일군의 토기 조각들이 그러한 사실 해명의 단서를 제공했다.
1980년 이래 금년까지 실시된 발굴에서 300여 동의 건물지, 200기에 가까운 무덤과 함께 제철 시설 이 확인
됐으며 수만점의 유물 이 출토됐다. 그 가운데는 현지에서 만든 토기가 주종을 이루지만 중국 한(漢)나라
양식 토기와 청동 유물, 일본 야요이(彌生) 시대 토기 가 다량 포함되어 있어 글로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학계에선 이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적이며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중심지 들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근래 늑도에서 발굴된
인골 가운데 일본 야요이인의 인골 이 포함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되는데....
현재의 늑도항은 물고기잡이 배들이 드나드는 평범한 어촌이지만 옛날에는 무역항이었다
늑도는 그 옛날엔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여러나라 선박들이 기항하던 곳이었고 동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함께 어울리며 자신들이 가져온 물품을 사고팔던 국제 무역항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늑도에서 기원후 유적과 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인접한 육지의 포구들이 번성하면서 교역 거점의 지위를 넘겨 주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남해의 8개 소국 ‘포상팔국’ 연맹 : 서기 1세기 무렵, 경남 남해안 여러 곳에서는 ‘○○국’
이라 불린 자그마한 나라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찬자는 그 나라들을 포상팔국(浦上八國), 즉 ‘포구에 자리한 여덟 나라’ 라고 통칭했다.
그 가운데 골포국(현 창원), 고자국(현 고성), 사물국(현 사천) 등이 포함된다. 그 나라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
하려 느슨한 연맹 을 이루었고 3세기 초에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였기 때문인지 맹주 격인 구야국(현
김해) 을 공격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의 실체를 해명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발굴된 바 없다.
다만 포상팔국의 고지에서 5세기 이후 축조된 가야 무덤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포상팔국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가 가야 후기에도 여전히 남해안 항로에서 맹활약하였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소가야가 그들이 만든 나라 였을 것이다. 소가야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 고성 송학동 고분군 이다.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의 첫 삽을 뜬 것은 1999년 가을이지만 이 고분군이 학계의 주목을 끈
것은 1983년 부터이다. 한 연구자가 송학동 1호분 이 일본 고훈(고분) 시대 특유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 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논쟁이 시작된 지 16년 만에
해당 무덤을 발굴한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고 여러 기의 무덤이 연접된 것임이 밝혀졌다.
가장 큰 석곽은 길이가 8.25m 로 소가야의 왕묘 로 보이는데 도굴됐지만 무덤에는 유물이 수백점
쏟아졌다. 소가야 토기 외에 대가야 토기, 백제 청동 그릇, 신라 말갖춤에 왜에서 들여온
토기 도 섞여 있었다. 여타 무덤 발굴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확인됐다. 소가야 왕족 무덤 속에는
다양한 계보 유물이 함께 묻힌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 보다 작았기에 소가야 라고 불린 나라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무덤 속 유물이 보여주듯 국제 교역을 주도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허무하게 신라에 복속된 소가야의 등장 시점은 분명치 않다. 다만 소가야 양식 토기가 만들어져 널리
유통되고 거대한 무덤이 축조되는 5세기 이후일 공산이 크다. 학계에선 소가야의 경역을 고성과 사천,
진주, 산청 으로 보면 같은 시기 신라나 백제와 달리 크고 작은 세력이 느슨한 연맹을 이뤘을 것으로 추정한다.
소가야의 성장에는 5세기 전반 이래 한세기 이상 지속된 국제적 평화 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433년 숙적 백제와 신라가 동맹 을 맺자 백제의 오랜 우방 가야에도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에 따라 백제, 가야, 신라, 왜를 잇는 남해안 항로의 활용도 가 높아졌다.
그런데, 6세기 중엽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을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가 갈등 을
벌이게 되면서 남해안 항로가 불안정 해진 것이다. 가야는 554년 벌어진 관산성 전투 에서 백제를
지원하였지만 그 전투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함에 따라 가야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가야를 향한
신라의 서진 은 다욱 가속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가야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신라에 복속됐다.
전방후원묘 前方後圓墓 는 본래 일본에서 발견되는 무덤 양식 으로 3세기 부터 7세기
까지 조성되었는데, 하니와로 대표되는 많은 부장품들이 묻혀 있는 수백미터 단위
크기의 거대 무덤으로 앞부분이 네모 혹은 사다리꼴 로 생겼고(前方), 뒷부분은
원형(後圓) 인데 뒷부분에 사람을 매장하고 앞부분에서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주 신촌리와 광주 등 영산강 장고묘(전방후원분) 와 고흥과 해남 등지에서 발굴된 고분들은 5 ~ 6세기
경 분묘로 임나일본부설의 시기와 일치해 큰 논란이 되었으니... 일본인들은 무덤이 주구묘 →
전방후원분 → 남한 전파설 을 주장했는데 주인이 왜인 인지 논란이니...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왜군
용병으로, 최교수는 마한세력으로 보지만 왜국으로 이주하기전 왜인들의 무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겨레신문 노형석씨의 시사문화재란에 실린 “해남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가 술렁이고 있으니.... 일본 고분 전방후원분과 닮은 얼개 · 일본식 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예정이라 말하며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를 받은 왜인?, 일본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기사 입니다.
황급히 무덤을 되묻고 발표조차 않는건 일본 주장에 대해 반박 논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함?
2021년 1월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무덤인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에 전방 후원분인
장고봉 고분 을 발굴하니.... 현문을 지나 납작한 판석 여러개를 놓은 바닥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 가 나타나는데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 전방후원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 에 놀라워
했고, 갑자기 발굴을 중단하고 황급히 다시 묻어버리니 허탈해했는 데.... 더욱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
이게 했으며, 우리 정부가 쉬쉬 하는 가운데 한겨례 신문에 의해 뒤늦게 보도됐습니다.
해남 장고봉 고분은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2020년
10월 부터 2021년 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 를 통해 1500여년만에
드러났으니, 돌방은 일본 규슈 해안과 아리아케해 에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 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습니다.
돌문짝(문비석) 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 를 넘고
천장까지 높이는 2m 에 달하는 큰 공간으로 “일본 고분 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 가 주목된다” 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는데....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 이 똑같았다” 고 말했습니다.
쓰레기에서 나온 유물 - 고분 : 동아일보 이한상 비밀의 열쇠 칼럼에 쓰인 “쓰레기 쌓인 고분 에서 나온 ‘안라
의 금동관’ 인데, 가야는 한 나라로 통일되지 못하고 느슨한 연맹을 이뤘다.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가야 연맹을 구성한 나라가
몇인지, 그 나라들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가야사에 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금관가야와 대가야 의 경우 건국 신화와 왕계의 일부, 그리고 멸망 과정 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역사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영남 각
분지의 산등성이에 군집하는 거대한 고총 만이 그 옛날 가야의 영화를 웅변할 뿐이다.
(가야사 기록이 없는건 고대에 우리나라가 문자를 만들지 못해 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계는 4세기까지 김해의 금관가야, 5세기 이후 고령의 대가야 가 연맹의 리더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한 번도 맹주가 되지는 못했지만 늘 그에 준하는 독자성과 영향력을 행사하던
‘넘버 투’ 가 있었으니..... 바로 경남 함안에 웅거한 아라가야로, 당시에는 안라(安羅) 로 불리던 나라다.
일제는 임나일본부 존재를 밝히기 위해 김해와 함안에 임나일본부 가 있었을 것으로 상정
하면서 먼저 김해를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을 찾지 못하자 거대한 고총이 군집을
이룬 함안 말이산 고분군 으로 눈길을 돌렸다 . 1917년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 조선
고적조사 위원이 사전조사를 통해 말이산에서 가장 큰 34호분 (현 4호분) 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덤은 지름이39.4m, 높이가 9.7m 에 달했다. 인부 수십명을 동원해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5일 만에 석곽의 한쪽 벽을 확인했는데, 그는 그곳을 ‘석실 입구’ 로
오인하고 벽을 뜯어낸 다음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유물이 어떤 모습으로 출토
됐는지를 보여주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고..... 하루 만에 유물 160여 점을 반출 했다.
당초 예상과 달리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중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왜에서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녹각제 칼집 장식 이 나왔을 뿐이다. 출토 유물 가운데 다수는
토기였다. 그 가운데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이 달린 토기 는 삼국시대 토기 가운데
유례가 드문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철제 무기류와 함께 치아 1개, 여러 조각의 인골이 수습됐다.
이마니시 류는 보고서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안라의 왕 이라 특정했고 왜의 무덤과 비교할 때 지방 호족급
에 불과하므로 곧 안라의 국제적 위상이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또한 이 고분군 어딘가에
왜의 관리들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조선 총독부는 그 이듬해에도 말이산 고분군에서
무덤 발굴을 이어갔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말이산 고분군은 차츰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됐다.
신문배달 학생이 발견한 마갑총 : 1992년 신문 배달 고교생이 처음 발견한 마갑총에서 출토된 5세기초 말갑옷
일부. 1992년 함안에서 다시금 안라 를 일깨운 중요 발굴이 있었다. 말이산고분군의 북쪽 자락에 해당
하는 도항리에서 아파트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수관 설치를 위한 터를 파던 중 가야 무덤을 훼손했다.
6월 6일 이른 아침, 신문을 배달하던 고교생이 그곳을 지나다 유물 조각 을 발견하곤 그 사실을 신문지국장
에게 알렸다. 평소 문화재에 관심이 많던 지국장이 현지를 확인한 다음 당국에 신고하면서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유적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창원문화재연구소(현 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이 긴급히
투입돼 조사를 벌인 결과 훼손된 유적은 무덤구덩이의 길이가 9m, 너비가 2.8m에 달하는 대형 목곽묘 였다.
흙을 걷어내자 철판을 엮어 만든 말갑옷 이 드러났다. 말의 머리, 목, 몸통을 덮었던 갑옷을 2등분해서 무덤
주인공의 좌우측에 가지런히 묻어준 것이었다. 아쉬운 것은 왼쪽 말갑옷의 상당 부분이 훼손된 점이다.
주인공의 허리춤에는 금과 은실로 무늬를 새겨 넣은 장식대도 1점 이 원상을 유지한 채 남아 있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서만 볼수 있었던 말갑옷 실물이 확인 됐으니 "마갑총" 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금동관에 담긴 맹주의 꿈 : 2019년 경남 함안 말이산 45호분에서 발굴된 5세기 초 안라의 금동관 은
주변국 왕관 과는 판이하게 다른 디자인은 당시 안라의 수장이 독자적인 왕의 지위 를
꿈꿨음을 보여준다. 1992년 도항리 10호 목곽묘에서 발굴된 5세기 초 고배(굽다리 접시).
다리에 뚫린 불꽃무늬는 안라 고유의 스타일 로 통한다. 두류문화연구원 제공·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2019년 경남 함안 말이산 45호분에서 발굴된 5세기 초 안라의 금동관 조각. 주변국 왕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디자인 은 당시 안라의 수장이 독자적인 왕의 지위를 꿈꿨음을 보여준다. 1992년 도항리
10호 목곽묘에서 발굴된 5세기초 고배(굽다리 접시). 다리에 뚫린 불꽃무늬는 안라 고유의 스타일로 통한다.
2019년 두류문화연구원이 발굴한 도항리 45호분에서는 ‘역대급’ 유물이 쏟아졌다. 이 무덤은 드라마틱하게
발굴됐다. 오랜세월 봉분 위에 주민들의 생활쓰레기 가 쌓여 있었기에 무덤인지 알기 어려웠고 1986년의
시굴조사에서 무덤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방치되다시피 했다.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돼 재조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왔는데, 발굴을 벌인 결과 5세기 초에 축조된 안라의 왕릉 임이 밝혀졌다.
무덤은 구조가 특이하다. 암반층을 깎아내 둥근 봉분의 형태를 만들고 다시 그 중앙을 파낸 다음 목곽
을 시설했다. 내부에서는 안라 스타일의 토기가 다수 출토됐는데, 몇 점의 토기는 배 모양, 집 모양,
사슴 모양 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갑옷과 투구, 말갑옷, 각종 철제 무기, 말갖춤 이 출토됐다.
가장 주목받은 유물은 금동관 조각 이다. 파손된 채 발견돼 아쉬웠지만 주변국 왕관과는 판이한
디자인이었다. 관테 위에 두 마리의 봉황 이 서로 마주 보는 도상을 갖춘 것으로, 안라의 공방
제작품 이다. 이 관이 발굴됨에 따라 5세기 초 이후론 안라의 왕 역시 신라, 백제, 대가야
의 왕과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장식된 관 을 쓰고 자신의 높은 지위를 과시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비록 전기 가야연맹에서도 후기 가야연맹에서도 늘 2인자 로 취급받았지만 이 금동관 은
안라 왕이 스스로 맹주 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만든 장식품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근래 말이산고분군에서 무덤 천장에 새겨진 별자리 가 확인됐고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청자 가 발굴되기도 했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자료가 공개될지 궁금하다.
추가적인 발굴과 연구를 통해 안라를 감싼 두꺼운 베일이 모두 걷힐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고는 배에서 내리는데, 그간 코로나 사태로 인해 배편이 끊겼다가 다시 교통로가 열린
때문인지 선원들도 익숙하지 않아 고심하는데, 문제는 트렁크 등을 내릴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는지라..... 짐을 한군데 모아서 내리니 우리도 트렁크를
맡기고는 배에서 내리니 부두인데, 무슨 안내를 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냥 밖으로 나옵니다.
우리 트렁크는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나올 것이라 입국 수속을 하고는 터미널로 나왔는데.... 20여분을
기다리니 다른 승객들이 자기 트렁크를 끌고 나오기에 놀라서 물어 봅니다? 배에서 내린 곳에서
기다리다가 갖고 왔다기에 놀라서 들어 가려고 하니 입국한 다음에는 나가는게 불가능 하다기에
배 회사에서 법무부와 교섭해 선원이 들고 나오는 것을 받습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