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선비 신경준(1712~1781)은 "사람의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지는데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라고 설했다. 그렇다. 길에 주인이 어디 있나? 너와 나, 우리가 가면 곧 길일 터. 시인 김춘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한 것처럼 길도 그 주인을 찾을 때 진면목이 드러난다.
90여㎞의 금정산 둘레길을 걷기로 한 우리는 이 길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길을 걷는 동안 그저 단순하고 평범한 길, '날것' 그대로의 순박하고 담박한 면을 사람들과 나누려고 한다. 다만 그 길의 주인을 찾아주는 노력은 마다하지 않겠다. var fileId = "878"; var contentWebPath = "/content";
평일 오전에도 걷는 주부들 많아 '까치 손바닥' 닮은 작장마을 눈앞 산허리 감싸는 'S라인' 길 이어져
산행은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1차 구간의 들머리로 범어사 주차장에서 계명봉 기슭길로 정했다. 너무 평범한 들머리였다. '금정산 둘레길' 리본을 나무에 매달았다.
10분 정도 걸으니 비석골에 이르렀다. 비석이 많아서 붙은 이름인데, '부사 정공현 덕영세불망비'(1872년) 등 5기의 비석이 도열했다. 비석은 조선시대 동래부사 등이 피폐한 백성과 사찰에 베푼 은덕과 공을 기려 범어사가 세웠다.
비석골을 지나 차나무가 듬성듬성 땅에 박힌 오솔길을 가다 지장암 뒤편에 다다랐다.
길가에서 이상한 돌무덤을 만났다. 어림잡아 200개는 넘는 돌에 절 이름이 빼곡했다. 지나가는 산객에게 물어도 연유를 몰랐다. 구청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장암의 한 신도가 신심에서 발원해 만든 탑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봤다.
평평하고 싱거운 길이 계속됐다. 잠시 뒤 너비 3m, 높이 2m 정도 큰 바위를 발견했다. '金魚洞天(금어동천)' 바위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동천이라 하는데, 신선이 산다. 하여 '금어동천'은 신선과 금정산의 금어가 함께 노니는 신성한 장소였다. 주변에 약수터가 있다.
주민체육시설과 산림욕장을 통과해 대밭을 지나간다. 사유지라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된다. 119 안내 이정표에서 사송리 방향으로 향했다. 잇따라 '까치의 손바닥'을 닮은 작장마을, '큰 용의 형상을 띤' 대룡마을, '사슴 노루가 많았다'는 녹동마을 갈림길을 만났다. 갈림길에서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면 언제든지 둘레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평일 오전인데도 둘레길에 사람들이 제법 있다. 한 달에 한 번 이 길을 걷는다는 주부 서선옥(52) 씨와 정옥순(50) 씨.
평생지기인 두 사람은 "등산이 아니라 걷는다는 생각으로 둘레길을 찾는다. 둘레길은 부담이 없어 여성들에게 딱"이라고 말했다.
순탄한 길이 이어졌다. 희락원 갈림길에서 또다시 경고 간판과 맞닥뜨렸다. '이곳은 녹동마을과 희락원(고아원)의 유일한 식수이다. 여기가 아니면 먹을 물이 없다. 절대로 취사하거나 손, 발 등을 씻지 말라.' 등산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읽었다.
여기서부터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래도 산허리를 질러가는 길은 유순했다. 길은 'S라인' 꼴로 자주 다가왔다.
이 라인 끝과 계명천 골짜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봉분이 능선을 따라 일렬로 누워있다. 어느 풍수가가 장군봉의 기운을 묘에 담으려고 배치한 듯싶다. 묘지 옆에 목 잘린 문인석이 서 있었다.
성림농장과 거북이 약수터를 돌아 녹원 수목원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2시간 40분.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부산지역ROTC(학군단) 5기들의 모임인 '기우회'의 쉼터다.
이날 권혁동 회원(부산시인협회 회장)은 '새해'라는 시를 읊었다. 시는 '삶은 생각이 머무는 곳에 있고/생각은/눈길 머무는 곳에 있으니/더불어 새해를 볼 일이다'라고 끝났다.
조금 더 가서 녹원수목원을 만났다.
한때 유명한 유원지였는데, 지금은 폐쇄됐다. 주변 민가들도 정부의 개발정책에 따라 마을을 떠났다. 버려진 집마다 잡초가 피었고, 쓰레기가 빈터에 가득했다.
사송리 사배마을 못 둑에서 외송마을 회관까지의 2㎞ 구간은 개활지였다. 길은 평탄하고 미끈했다. 왼편에 장군봉이 보였다. 포도밭과 파밭을 지나갔다.
외송마을 회관에서 예닐곱 명의 주민들이 곁불을 쬐고 있었다. 이 일대는 지난 2000년 개발계획이 나오면서 주민들이 떠나 지금은 30여 가구만 산다.
갈 데가 없고 자란 터전을 떠나기 싫어 남은 사람들이다. 정작 개발이 몇 년째 지연되면서 마을은 방치됐다. 60대 한 노인이 "개발하든지 아니면 포기하든지 빨리 나서 달라.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어두운 배웅을 뒤로한 채 일행은 첫 둘레길 산행의 종점인 양산시 외송리 동면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첫날 거리는 8.7㎞. 쉬고 밥 먹는 시간을 빼면 4시간 정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