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극진한 마음과 더없는 겸손, 주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
오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어머니에게 드러내신 행동이나 표현들은 우리가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보다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통상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데 있어, 이유나 목적이나 우선적인 순위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특히 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더 중증이고 절박한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절박한 이교도 부인의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거절도 하시고, 잔뜩 뜸도 들이기도 하십니다. 더구나 아주 모진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고통당하는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예수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로 여겨집니다. 이방인 부인 입장에서는 엄청 큰 모욕이고 수치였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의구심을 품을 상황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지만, 유다인 가운데 태어나셨고 유다 문화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사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일련의 절차랄까 우선 순위가 있었습니다.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이방인들은 그다음 차례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 말씀이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는 다른 때와는 달리 가련한 이방인 어머니의 간절한 청을 즉각적으로 들어주시지 않고 무척이나 뜸을 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일종의 밀당을 계속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고 더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지니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엄청난 수모를 당하면서도 단 할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여인의 태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지극한 겸손,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 그리고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그 극진한 마음이 마침에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아들 딸들이, 이 시대 또 다른 악령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무너져가고 죽어가는 자녀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이방인 여인의 그 지극한 겸손, 주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 그리고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극진한 마음이 합쳐져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자녀들도 말끔히 치유될 수 있는 기적과 희망을 청합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7,24-30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하는 것 하나는 있어야 하는 이유
영화 ‘백조의 노래’(2020)는 깊은 감정적,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생각을 자극하는 공상 과학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카메론 터너에 초점을 맞춥니다.
임박한 죽음과 씨름하는 동안 카메론은 스콧 박사로부터 혁신적인 과학적 해결책을 소개받습니다.
그 해결책은 자신의 클론, 즉 모든 면에서 같지만, 불치병이 없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은 스콧이 죽어도 그것을 모르고 제2의 스콧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카메론은 자기 대신 자기의 복제인간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이 이미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더 주는 자기 이기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콧 박사에게 청합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왠지 다른 인간에게 자기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몰래 집안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아내나 아들이 두 카메론을 동시에 보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복제 카메론은 자기만큼 카메론을 아는 인간이 없기에 자기가 숨어줍니다.
카메론은 그런 자신의 복제 인간에게 가족을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콧 박사도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카메론이 편하게 죽게 해주는 좋은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카메론이 스콧 박사에게 무언가 청할 때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 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것은 믿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로 페니키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악령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청에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무언가 이 여인처럼 목숨을 걸고 청할 수 있는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청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 청할 때 우선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강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도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무엇이든 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상대에게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과 자비가 없다고 여긴다면 나는 청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자비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결국 내가 이용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도 주님을 좋은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분을 모진 분으로 여겨 불만을 품는다면 스스로 주님께 청하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아이가 칼과 총을 사달라고 청한다면 부모가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알아서 그런 것을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뜻에 어긋남을 알기 때문에 계속 청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자기 딸이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끊임없이 청하라는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지치지 않고 청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면 내 청함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도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자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헛갈릴 때는 주님의 기도나 십계명, 혹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지만 살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는 것이라면 죽기까지 청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먹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는 이의 청을 주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거나 뿌리치실 수 없으십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다. 여기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끈질긴 간청으로 주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인가? 마치 유다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딸을 치유해 주신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 28)
부스러가
있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주님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입니다.
부스러기들의
역사가 모여
신앙의 역사가
됩니다.
부스러기들이
모여
우리의 기도를
건져올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부스러기처럼
작아지지 못해
은총을 놓치는
우리들 삶입니다.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면
고요해지고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면
삐걱거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처방전은
언제나 우리가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부스러기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부스러기가
가야 할 길은
겸손한 믿음의
길입니다.
부스러가가
쌓이고 쌓여서
큰 뜻을 이룹니다.
우리에겐
부스러기
은총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긁어모아야 할
충실한 생활입니다.
부스러기에게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은
부스러기들을
놓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사라지기 위해
부스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하기 위해
부스러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스러기
사랑에
감사하는
오늘 되십시오.
무디어가는
일상의 날을
바로 세우는 것은
부스러기의
힘입니다.
부스러기의
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세기 초, 덴마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마다 순회공연을 하는 유랑 극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마단에 불이 난 것입니다. 곡마단의 광대는 분장을 지우지 못한 채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불이 났다고 소리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광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광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제는 별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광대는 진짜 불이 났다면서 계속해서 호소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광대가 정말로 연기를 그럴싸하게 잘하는데?”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곡마단은 모두 불타버렸고, 그 불이 번져서 마을까지도 모두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세상입니다. 워낙 거짓이 많아서인지 먼저 의심부터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에서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믿음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며 불신했습니다.
이런 불신은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정확한 답을 위한다는 이유를 말하지만, 우리 인간이 정확한 진리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것도 습관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욱더 주님 뜻에 집중하면서 그분 안에서 진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만든 힘든 삶에서 벗어나 기쁨과 행복의 만족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단한 믿음의 여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딸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에 심한 모욕과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사랑의 딸에게서 마귀가 쫓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믿지 못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방인이라면서 비판을 받던 이방인 여성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굳은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때문이라면 모욕적인 수치심도 기쁘게 견디게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마음의 가난!'
오늘 복음(마르7,24-30)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에 가셨을 때,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
와, 아무리 비유적인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한 여자를 개 취급 하셨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모욕적인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거나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다면 당장 발끈할텐데, 청하는 것도 포기하고, 성당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여자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큰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7,29)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는 '마음이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구원자이신 분께로 향한 마음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성당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려고 성당엘 다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이런 은총이 주어집니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5,22-23)라는 '성령의 열매'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마음의 가난을 위하여~
7)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자신의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1열왕 11,8)
한때는
영적인 사랑으로 불타올라
하느님의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이었지만
육적인 사랑에 빠져
수많은 외국인 아내들을 맞아들이며
그들의 이방신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네.
솔로몬의 지혜는
욕망이라는 그물에 걸려
분별력을 잃고 사라졌지만
페니키아 여인의 지혜는
주님의 신뢰를 얻어
마귀들을 쫓아냈다네.
복음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마르 7,2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