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朝鮮前期)의 문신.성리학자(文臣. 性理學者)로서 자는 대유(大猶),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蓑翁). 관향은 서흥(瑞興). 단종(端宗)2년 한경 정릉 사제(漢京 貞陵洞 私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로서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소시에는 호방(豪放) 불기(不羈)하였으나 성장하면서 발분(發奮) 역학(力學)하였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문(金宗直門)에서 수업(受業)하면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자칭 소학동자(小學童子)라 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깨달았다고 한다. 평생토록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여 삼십을 넘어서 경학(經學)을 섭렵(涉獵)하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종 25년에 행의(行義)로써 천거(薦擧)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고, 연산군(燕山君) 2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다음해 형조좌랑(刑曺佐郞), 동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남에 전사관(前史官) 탁영(濯瓔) 김일손(金馹孫), 소유(小游) 권오복(權五福) 등은 사사(賜死)되고 이미 파계(他界)한 점필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때마침 정암(靜庵)이 부친의 임소(任所)를 따라 어천(魚川)에 오게 되어 한훤당(寒暄堂)에게 수학하게 되니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정맥인 한훤당(寒暄堂)의 학문이 정암(靜庵)에게 전해졌다. 2년 뒤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고,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유적사사(留謫賜死)되었다.
그후 신원(伸寃)되어 중종 12년(1517)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고, 선조 10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광해군 2년에 일두(一두)·정암(靜庵)·회재(晦齋)·퇴계 (退溪)와 함께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서는 경현록. 한훤당집. 가범(家範). 등이 있다.
( 逸山 李準圭 記錄
동방 오현 <東方五賢 >
일두 정여창 先生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자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一두). 관향은 하동(河東). 세종32년 함양 덕곡리 개평(咸陽 德谷里 介坪)에서 태어났다. 함길도(咸吉道) 병마우후(兵馬虞候) 증 한성 좌부윤(贈漢城左府尹) 육을( 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이고 학업에 전념하여 한훤당(寒暄堂)과 함께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했으며, 경전(經典)을 공부하여 성리학(性理學)의 깊은 이치(理致)를 깨우쳐 역행천이(力行踐履)하여 명경독행(明經篤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뒤에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옮겨져서 동궁(東宮)을 보도하였으나 질시(嫉視)를 받아 안음(安陰)현감으로 외임(外任)되자 향리(鄕里)의 자제(子弟)들을 훈도하여 많은 제자를 키웠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連坐)되어 경성으로 원찬(遠竄)되어 적소(謫所)에서 1504년 타계(他界)하였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중종 12년(1517) 정 포은(鄭圃隱)·김 한훤당(金寒暄堂)과 같이 동국(東國) 도학(道學)의 종(宗)으로 숭상(崇尙)되어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고, 뒤에 문헌(文獻)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문묘(文廟)에도 승무(陞무)되었다.
저서(著書)로 용학주소(庸學註疏)가 있었으나 사화(士禍) 때 불타 없어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찬(撰)한 문헌공 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한다.
동방 오현 <東方五賢 >
정암 조광조 先生
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朝鮮) 중기의 문신 거유(文臣 巨儒)로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관향은 한양(漢陽). 개국공신(開國功臣) 온(溫)의 5세손으로 성종13년 한성부(漢成府)에서 태어났다. 일직부터 학문에 뜻이 커서 과거(科擧)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18세때 부친 원강(元綱)이 어천(魚川)찰방(察訪)으로 부임되었을 때 마침 한훤당 (寒暄堂 )이 희천(熙川)에 유찬(流竄)되어 있었기에 정암(靜庵)은 한훤당(寒暄堂)에게 종학(從學)하여 위학(爲學)의대방(大方)을 들었다.
중종(中宗) 5년 진사과(進士科) 장원(壯元)에 들고 동 10년에 알성과(謁聖科)에 올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제수(除授)되였다.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고 다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차( 陞差)되었다.
중종은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여 문치(文治)에 뜻을 기울였으므로 (靜庵)을 의중(倚重)하게 되니 정암 또한 감격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군덕(君德)을 향상시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實現)만이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중종의 특지(特旨)로써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면서, 일시에 많은 현사(賢士)를 발탁(拔擢)하여, 적폐(積弊)를 개혁하고 선왕의 법도(法度)를 차츰 거행하려고 하였다.
선생은 현량과(賢良科)를 주청(奏請) 시행하여 학행겸비(學行兼備)의 현사(賢士)를 대거 등용(登用)케 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의 정국공싱(靖國功臣)에 잘못 책록(策錄)된 인사들을 삭훈(削勳)하였다. 이에 격탁(激濁) 양청(揚淸)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와 훈구재상(勳舊 宰相)들이 감정이 대립(對立)하게 되었다.
이때 삭훈(削勳)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모함(謀陷)하여 사사(賜死)케하고 많은 사류(士類)가 함께 화(禍)를 당하였으니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그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에 시임 좌의정(左議政) 이명(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모두 신원(伸寃) 복권(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과 문정(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리고 문묘(文廟)에 종향되니 세칭(世稱)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했고 . 한훤당(寒暄堂).일두(一두).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를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 逸山 記錄 )
동방 오현<東方五賢 >
회재 이언적 先生
1491(성종 2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관향은 여강(驪江). 성종 22년 경주 양좌촌(慶州 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생원(生員)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연산(燕山) 8년에 구사재(舅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就學)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늘 산사( 山寺)에 거처하면서 독서(讀書)에 열중(熱中)하였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한 인동현감(仁同 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밀양부사( 密陽府使) 등을 거쳐 동 25년(1530)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擧用)에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謀略)으로 물러났다. 동 32년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쫓겨난 뒤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였다.
수천언(數千言)의 상소(上疏)를 올려 국가 대본(國家大本)과 정치 강령(政治綱領)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가(特加)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과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1년(1545)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되었다.
이듬 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모함(謀陷)하여 강계(江界)에 천적(遷謫)되었다. 적소(謫所)에서 그의 절필(絶筆)인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29권을 집필중(執筆中) 완성하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써 타계(他界)하였는데,
1568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 시임(時任) 좌의정 이명(左議政 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신원 복권(伸寃 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다음 해 문원(文元)이라 증시(贈諡)되었다.
선조 6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고, 광해군(光海君) 2년(1610)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그의 주리(主理) 학설은 퇴계(退溪)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28세 때에 선배학자(先輩學者)인 손숙동(孫叔暾)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수삼차(數三次)에 걸친 무극(無極)·태극(太極)에 관하여 벌린 논쟁(論爭)에 뛰어 든 것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大論爭)이라 한다.
후에 율곡(栗谷)은 선생을 한훤당(寒暄堂)· 일두(一두)· 정암(靜庵)과 함께 동방 사현(東方 四賢)으로 추모(追慕)하였다.
저서로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 대학혹문(續 大學或問) 등이 있다.
( 逸山 記錄 )
동방오현 <東方五賢 >
퇴계 이황 先生
연산군 7년(1501)∼선조 3년(1571)
조선(朝鮮)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자(字)는 경호(景浩). 호(號)는 퇴계(退溪) 또는 퇴도만은(退陶晩隱). 시호(諡號)는문순공(文純公)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연산 7년 진사(進士) 식(埴)의 7자 1녀 중 끝으로 경상도 안동예안(安東 禮安) 온혜(溫惠)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생후 7월에 부친을 여이고 숙부 우(호 松齋 ;生員·文科·戶曹參判; 靑海君)에게 수학(修學)하였으며 중종(中宗)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교리(校理) 전한(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선생도 파직(罷職) 되었다가 다시 복직(復職)되었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곧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沒頭)하였다.
학문(學問)의 명성(名聲)이 높아지자 사방에서 학자(學者)들이 찾아와서 그의 학문을 배워 많은 석학(碩學)이 배출(輩出)되였다.
명종(明宗) 초에 단양과 풍기군수 등 지방관직을 거치고 이어 대사성(大司成), 부제학 (副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제학(大提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좌찬성(左贊成) 등 중요 관직을 차례로 제수(除授) 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대부분(전후 70여 차례) 사양(辭讓)하였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던 때(1550년) 순흥(順興)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主享; 文正公 安珦 )에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하사(下賜) 받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까지 받아 첫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게 한 바 있다.
선생의 학문은 공맹학(孔孟學)을 바탕으로 하고 성리학(性理學) 특히 정주학(程朱學)을 계승(繼承)하여 심화(深化)시킴으로서 조선유학(朝鮮儒學)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
선생은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主張)하였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왕에게 올렸다.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이 내려지는 한편 대신(大臣)의 예우에 따른 장례가 치뤄졌다.
광해(光海) 2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40여 서원(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신라(新羅)때의 거유 석학(巨儒 碩學). 자는 총지(聰智), 작호(爵號)는 홍유후(弘儒侯), 하상주인(下湘州人)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로, 어머니는 요석고주(瑤石公主)이다. 신라 삼문장(新羅 三文章: 强首. 薛聰. 崔致遠)중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聰明)하여 경사(經史)에 통달(通達)했으며 이두(吏讀)를 집대성(集大成)하였고 경덕왕 5년에는 박사(博士)로서 강수(强首)와 함께 구경(九經)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서 강론(講論)하여 후학(後學)을 훈도(訓導)하여 국학(國學)을 흥기(興起)하였다.
고려 현종(高麗顯宗) 임술(壬戌)에 홍유후(弘儒侯)를 봉(封)하고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화왕계(花王戒.誡)를 저술(著述)하여 전하고 있다.
◎ 崔致遠<文昌候>先生 (857∼?)
신라 말기(新羅末期)의 거유(巨儒),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작호(爵號)는 문창후(文昌候), 경주 사량부인(慶州 沙梁部人)으로 사실 선계(史失先系)되었다. 12세에 당(唐)에 유학(留學)하여 심사역학(尋師力學)하고, 17세 때 재당 등과(在唐 登科)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이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의 하사(下賜)를 받았다.
당(唐) 나라 고변(高변=馬+弁)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을 때 황소(黃巢)의 난(亂)에 격문(檄文)을 시작(詩作)하여 명진천하(名振天下)하였으며 28세에 환국(還國)하여 한림학사 겸 병부시랑(翰林學士 兼 兵部侍郞)과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등 많은 벼슬을 역임(歷任)하였다.
재직시(在職時)에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내어서 아찬(阿찬)이 되었으며 고려현종(高麗 顯宗)때 묘(聖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候)로 봉작(封爵)하였다. 소저(所著)에는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으며 선생(先生)이 찬(撰)한 봉암사시문(鳳巖寺碑文)과 숭복사시문(崇福寺碑文) 또 석순응전(釋順應傳)이 유명하다.
◎ 安裕<晦軒>先生 (1243∼1306)
고려(高麗)때의 명신 거유(名臣 巨儒). 초휘(初諱)는 향(珦). 자는 사온(士온). 호는 회헌(晦軒).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순흥인(順興人)이다. 초휘(初諱)가 향(珦)이었으나 조선조(朝鮮朝) 문종(文宗)의 어휘(御諱)가 향(珦)이라서 유(裕)로 개칭(改稱)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부(孚)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學問)을 밝히고 유풍(儒風)을 떨쳐 동방 도학지조(東方 道學之祖)라 했다.
좌승지(左承旨) 밀직사사(密直司使)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등을 역임(歷任)하였고,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기뻐하여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이라 하여 손수 필사(筆寫)하고 공맹(孔孟)의 초상(肖像)과 함께 주자학(朱子學)을 수입하여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회암(晦庵)의 호(號)를 따라 회헌(晦軒)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문교(文敎)를 진흥(振興)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落成)하였으며 백관(百官)에게 은포(銀布)를 청(請)하여 양현고(養賢庫)에 주어 교양기금(敎養基金)으로 하게 하여 육영(育英)에 힘쓰고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육경재자사(六經諸子史)와 주자신서(朱子新書)를 갖추어서 학문을 널리 가르쳤다. 회헌실기(晦軒實記)가 전하며 충숙왕(忠肅王)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조선 중종때 순흥백운동(順興白雲洞)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의 사묘(社廟)를 세우고 서원(書院)을 만드니 이가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 鄭夢周<圃隱>先生 (1337∼1392)
고려 말기(高麗末期)의 충신 학자(忠臣 學者), 초휘(初諱)은 몽난.몽룡(夢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영일인(迎日人)이다. 영천군(永川郡) 동우항리(東愚巷里)에서 명유(名儒)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使) 습명(襲明)의 후손 성균관학생(成均館學生) 관(瓘)의 아들로 태어나 삼장(三場)에 연달아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벼슬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성절사(聖節使)로 명(明)과의 국교회복(國交回復)에 공헌(貢獻)하였고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 이학지조(東方 理學之祖)로 추앙(推仰)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조 창업(朝鮮朝 創業)에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반대하다가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被殺)되었다.
태종(太宗)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감 예문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監 藝文春秋館事)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중종(中宗)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포은집(圃隱集)이 전 한다.
◎ 金宏弼<寒暄堂>先生
東方五賢錄 參照
◎ 鄭汝昌<一두>先生
東方五賢錄 參照
◎ 趙光祖<靜庵>先生
東方五賢錄 參照
◎ 李彦迪<晦齋>先生
東方五賢錄 參照
◎ 李滉<退溪>先生
東方五賢錄 參照
◎ 金麟厚<河西>先生 (1510∼1560)
조선(朝鮮) 인종(仁宗)때의 명신 거유(名臣 巨儒),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 울산인(蔚山人)이다. 중종(中宗)때 장성현 대맥동(長城縣 大麥洞)에서 참봉(參奉) 영(齡)의 아들로 태어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에게 수학(修學)하고 문과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고향 장성(長城)으로 내려가 성리학(性理學)에 몰두(沒頭)하였다.
중종 계사(中宗 癸巳)에 종유(從遊) 반궁강학(泮宮講學)하였으며 명종조(明宗朝)에서 누증(累徵)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이기혼합설(理氣混合說)을 주장(主張)하여 기고봉(奇高峰)과 더불어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강론(講論)하였으며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의약률역(醫藥律曆) 등에도 조해(造諧)가 깊었다. 정조 병진(正祖 丙辰)에 증 영의정(贈 領議政)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저서(著書)로 하서집(河西集)과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이 있다.
◎ 李珥<栗谷>先生 (1536∼1584)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학자(學者),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덕수인(德水人)이다. 강릉부 북평(江陵府北坪)에서 감찰(監察) 원수(元秀)의 이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16세때 어머니를 잃고 세상의 허무(虛無)를 한탄(恨歎)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불교(佛敎)에 입문(入門)하였다가 1년만에 돌아와 성리학연구(性理學硏究)에 열중(熱中)하고 명종(明宗) 13년 당시 명성(名聲)이 높은 퇴계(退溪)를 찾아가 학문(學問)을 논의(論議)하니 퇴계(退溪)는 그의 재능(才能)에 크게 감탄(感歎)하였다.
그해 별시(別試)에 장원(壯元)하고 전후 과거(前後 科擧)때 마다 장원(壯元)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시작으로 청주목사(淸州牧使), 황해감사(黃海監使),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호조판서(戶曺判書), 이조판서(吏曺判書), 대제학(大提學)과 우찬성(右贊成)을 역임(歷任)하였다.
퇴계(退溪)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形成)하였다. 인조(仁祖)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하고 숭종(肅宗)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著書)로는 율곡전서(栗谷全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요집(聖學輯要),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격몽요결(擊蒙要訣), 사서언해(四書諺解), 소학집주(小學集註), 진복창전(陳復昌傳) 등이 전한다.
◎ 成渾<牛溪>先生 (1535∼1598)
조선 선조(朝鮮 宣祖)때의 문신 유학자(文臣 儒學者),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文簡), 창녕인(昌寧人)이다. 중종(中宗)때 한양 순화방제(漢陽 順化坊第)에서 현감(縣監) 수침(守琛 號 聽松)의 아들로 태어나서 청송(聽松)이 파평 우계(坡坪 牛溪)에 복거(卜居)함에 가정에서 시학(侍學)하고 휴암 백인걸문(休庵 白仁傑門)에서 경학(經學)을 연구하여 학문(學問)과 덕망(德望)이 뛰어났다.
일직부터 과거(科擧)를 포기(抛棄)하고 누증 천제(累徵 薦除)된 벼슬을 사양 불취(辭讓 不就)하고 임난(壬亂)때는 광해세자(光海世子)를 도와 임금의 몽진(蒙塵)에 동참(同參)하여 상소(上疏)로서 용병 군량(傭兵 軍糧)등의 삼책(三策)을 논(論)하였다. 그후 특배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特拜 資憲大夫 議政府右參贊)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예궐 사양(詣闕 辭讓)하고 우계(牛溪)로 내려와서 많은 제자(弟子)를 길렀다.
퇴계(退溪)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서 도의지교우(道義之交友)인 율곡(栗谷)과의 이기 토론(理氣 討論)에서 퇴계(退溪)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설(理氣說)을 지지(支持)하여 사칠속편(四七續篇)을 완성(完成)하였다.
인조(仁祖) 7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숙종(肅宗) 8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우계집(牛溪集)이 전한다.
◎ 金長生<沙溪>先生 (1548∼1631)
조선 중기(朝鮮 中期)의 학자(學者).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헌(文憲), 광산인(光山人)이다. 명종(明宗) 3년 한경 황화방 정동제(漢京皇華坊 貞洞第)에서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봉 송익필문(龜峰 宋翼弼門)에서 예학(禮學)을 수학(修學)하고 율곡문(栗谷門)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전수(專修)하여 성학지오(聖學之奧)를 비문(備聞)하여 당대 예학(當代 禮學)과 유학(儒學)의 거두(巨頭)가 되었다.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천제(薦除)하고 정산현감(定山縣監),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안성(安城) 및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율곡(栗谷)의 학통(學統)을 이어 문인(門人)과 더불어 강론(講論)하여 많은 석학(碩學)을 배출(輩出)하였으며 그 학통(學統)이 다시 신독재(愼獨齋). 우암(尤庵). 동춘(同春)으로 전수(傳授)되었다.
효종(孝宗) 8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숙종(肅宗) 43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著書)로 사계집(沙溪集), 의례문해(疑禮問解), 가례집남(家禮輯覽), 근사록석의(近思錄釋義), 경서변의(經書辨疑). 상례비요(喪禮備要), 서소잡록(書疏雜錄)등이 전한다.
◎ 趙憲<重峰>先生 (1544∼1592)
조선 선조(朝鮮 宣祖)때의 학자(學者), 충신의병장(忠臣義兵將).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 시호는 문열(文烈), 백천인(白川人)이다. 중종(中宗) 39년 김포현 서감정리제(金浦縣 西坎井里第)에서 응지(應祉)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직 우계문(牛溪門)에서 사사(師事)하고 성학(聖學)을 배웠는데 특출하여 우계(牛溪)도 사제간(師弟間)의 예(禮) 이상으로 대(對)했다고 한다.
명종(明宗) 22년에 문과 급제(文科 及第)하여 정주교수(定州敎授)를 거쳐 호(戶).예(禮).이조좌랑(吏曹佐郞)과 시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歷任)하다가 난리(亂離)의 조짐이 보이자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피우청주(避于淸州)하였다. 임난(壬亂)이 일어남에 의병(義兵)을 소모(召募)하여 보은차령(報恩車嶺)에서 적(敵)을 격퇴(擊退)하여 청주성(淸州城)을 탈환(奪還)하고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호남의병장(湖南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독전(督戰)하여 적(敵)에게 많은 피해(被害)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7백명 의병(義兵)이 모두 전사(戰死)하였다.
선조(宣祖) 37년에 선무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策錄)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曺判書)로 추증(追贈)하였으며 인조(仁祖)때 열성(列聖)에 포충(褒忠)하고 영조(英祖)때 다시 여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여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선생(先生)과 함께 고경명(高敬命), 곽재우(郭再祐), 김천일(金千鎰)을 임진사충신(壬辰四忠臣)이라 한다. 중봉집(重峰集)이 전한다.
◎ 金集<愼獨齋>先生 (1574∼1656)
조선 효종(朝鮮 孝宗) 때의 학자(學者).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 광산인(光山人) 사계(沙溪)의 아들로 한성 황화방 정동제(漢城 皇華坊 貞洞第)에서 태어났다. 선조(宣祖) 14년에 천곡 송상현문(泉谷 宋象賢門)에 취학(就學)타가 다시 귀봉 송익필문(龜峰 宋翼弼門)과 율곡 이이문(栗谷 李珥門)에 수학(修學)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18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여 재랑(齋郞)에 이르렀으나 광해조(光海朝)에 부 사계(父 沙溪)를 모시고 연산 향리(連山 鄕里)로 돌아가 은거(隱居)하였다.
인조 반정후(仁祖 反正後)에 출사(出仕) 부여현감(扶餘縣監)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부승지 대사헌(副承旨 大司憲) 그리고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역임(歷任)하였다. 사계(沙溪)의 학문(學問)을 이어 예학(禮學)의 체계(體系)를 세우고 현종(顯宗) 때 숙종묘(孝宗廟)에 종향(從享)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신독재집( 愼獨齋集)이 전(傳)한다.
◎ 宋時烈<尤庵>先生 (1607∼1689)
조선 중기(朝鮮 中期)의 명신 학자(名臣 學者).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경헌공(景獻公) 은진인(恩津人)이다. 수옹 갑조(睡翁 甲祚)의 셋째 아들로 옥천군 구룡촌(沃川郡 九龍村)에서 태어났다.
광해(光海) 6년 송동춘(宋同春)과 함께 동춘선생(同春先生)의 부 청좌공(父 淸坐公)에게 취학(就學)하고 그후 사계문(沙溪門)에 수학(修學)하였다. 인조(仁祖) 11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어 축일 강마(逐日 講磨)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후에는 회덕 송촌(懷德 宋村)으로 이거(移居)하여 동춘(同春)과 더불어 학문(學問)에 열중(熱中)하여 사계(沙溪)의 학통(學統)을 계승(繼承)하여 후배양성(後輩養成)에 전력(專力)하고 많은 석학(碩學)을 배출(輩出)하였다.
효종 즉위(孝宗卽位)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으로 부르니 비로소 조정(朝廷)에 나아가 효종(孝宗)의 신임(信任)을 얻어 이조판서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吏曺判書 左贊成 右議政 左議政)을 두루 역임(歷任)하였으나 숙종(肅宗)때 당쟁(黨爭)으로 유적사사(留謫賜死)되었는데 영종(英宗) 때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소저(所著)로 송자대전(宋子大典), 논맹문의통고(論孟問議通攷), 주서차의(朱書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어류소분(語類小分), 심경석의(心經釋義) 등이 전한다.
◎ 宋浚吉<同春>先生 (1606∼1672)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명신(名臣).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同春). 시호는 문정(文正). 은진인(恩津人)이다. 선조(宣祖) 39년 한성 정릉동 우사(漢城 貞陵洞寓舍)에서 군수(郡守) 청좌 이창(淸坐 爾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암(尤庵)과 더불어 청좌공(淸坐公)에게 취학(就學)하여 후에 사계문(沙溪門)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인조(仁祖) 14년 우암(尤庵)의 뒤를 이어 대군 사부(大君師傅)를 제수(除授)받고 또 세자 찬선(世子 贊善)으로 수시(隨時)로 입시주강(入侍晝講)하였다. 효종(孝宗)이 즉위(卽位)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로 기용(起用)되어 우암(尤庵)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을 규탄(糾彈)하여 물리쳤다. 성균관좨주( 成均館祭酒)를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大司憲. 吏曺判書)를 지나 현종(顯宗)때 우.좌참찬(右.左參贊)을 역임(歷任)했다.
우암(尤庵)과 더불어 노론(老論)의 쌍견(雙肩)을 이루다가 숙종(肅宗)때 남인(南人)이 득세(得勢)하자 우암(尤庵)은 귀양가고 선생(先生)은 회덕(懷德)으로 물러났다.
현종(顯宗) 14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영조(英祖)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동춘집(同春集)과 어록해(語錄解)가 전한다.
◎ 朴世采<玄石>先生 (1631∼1695)
조선 숙종(朝鮮 肅宗) 때의 문신(文臣).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또는 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 반남인(潘南人)이다. 인조(仁祖) 9년 한성 창동 우제(漢城 倉洞 寓第)에서 고려의 직제학 상충(尙衷)의 후손,교리(校理) 중봉(中峰) 의 (의=水+倚)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 중봉공(父 中峰公)에게 수학(受學)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울 때 이미 위학하는 방향(爲學之方)을 알았고 시사전기(詩史傳記)를 무불통람(無不通覽)하였다. 효종(孝宗) 10년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하고 숙종(肅宗) 때는 수시(隨時)로 입대시강(入對侍講)하여 강 심경(講 心經)하였다. 공조참판겸성균관좨주(工曹參判兼成均館祭酒)와 대사헌 이조판서(大司憲. 吏曺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역임(歷任)하고 당쟁(黨爭)의 중재에 힘썼으며 많은 상소(上疏)로서 수제치평(修齊治平)의길을 건의하였다 몰후(歿後) 숙종이 진도(震悼)하여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조상하였으며, 문인 시복( 門人 持服)이 2백이 넘었다.
영조(英祖) 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저서(著書)로 남계집(南溪集). 제의정본(祭儀正本) 거가요의(居家要儀) 범학전편(範學全編). 심학지결(心學至訣). 육례의집(六禮疑輯). 율곡속외별집(栗谷續外別集). 우계속집(牛溪續集) 등이 전한다.
첫댓글 상기 退溪 (諱 滉)선조님 호가 토계로 오타 ~
잘 읽었어요.
네~~~고맙습니다 원문을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