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소원이 되리라. 나 같은 사람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시 쓰는 시인이 되는 것이 인생의 세 가지 소원 가운데 하나였다. 시인이 되리라. 일찌감치 인생의 지상 목표가 결정되었다. 남몰래 시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특별한 시적인 소질이나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누군가 주변에서 칭찬해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혼자서 시에 홀려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나이 15세 때.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럴까. 아니면 생리적인 것이었다 그럴까. 무엇인지 모르게 그리운 것들이 많고 많았다. 멀리 있는 것들이 그리웠고 헤어진 사람이 그리웠다. 사랑스런 것들이 또 너무나 많았다. 주변에 있는 것들 하나하나 사랑스러웠고 떠도는 길에서 만난 구름이며 산이며 꽃송이 하나까지 가슴에 메워 왔다. 점점 무언가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되어 갔다. 계절을 기다렸고 사람을 기다렸고 나에게 다가올 아름다운 일들을 기다렸다.
그리움은 나에게 없는 것, 이미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그 무엇,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그에 반하여 사랑은 현재 내 앞에 있는 그 무엇을 아끼고 간직하고 부추기는 마음이다. 그리움에 비하여 보다 현실적인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다림은 시간적인 문제로서 미래에 있을 그 어떤 것을 상상하고 그것이 내게 있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다. 그리움과 사랑보다도 더욱 먼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이 되어 주는 요소다.
무릇 시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 마음을 고르게 가졌으리라. 마땅히 그래야 하리라. 그리움과 사랑과 기다림은 시를 쓰게 하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힘이고 시를 기르는 좋은 토양이다. 거기에 더하여 가질 마음은 아무래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 마음이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고 사물을 아끼게 한다. 한 자루의 몽당연필을 보고서도 문득 눈물이 나는 것은 이 측은지심 때문이다. 아, 저것이 인간을 위해 제 몸 바쳐 애쓰다가 저런 꼴이 되었구나!
저 마음이 내 마음이 된다. 내 마음이 또 저것의 마음으로 옮겨 간다. 모름지기 시 쓰는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마음의 눈을 낮출 대로 낮춰야 한다. 그래야만 밖에 있는 것들이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온다. 시인이 혼자의 힘만으로 시를 쓰는 줄 알면 큰 오산이다. 시인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족의 도움, 직장 동료의 도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 특히 사랑하는 이성의 도움은 막대하다. 무시할 수 없는 소득이고 보너스다. 가히 횡재이고 축복이다. 내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얼굴 표정이다. 그것이 그대로 시로 바뀌는 것이다. 조심해서 들어야 할 일이다. 눈부신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시의 싹이며 줄기며 또한 꽃이고 열매다.
나의 많은 시들, 그 가운데서 좋은 시들은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하면서 그를 가슴속에 간직하며 살아갈 때 쓴 작품들이다. 그것은 번번이 사랑하는 마음 위에 떨어진 선물과 같은 것이다.
< 함께 읽는 시 >
개양귀비/ 나태주
생각은 언제나 빠르고
각성은 언제나 느려
그렇게 하루나 이틀
가슴에 핏물이 고여
흔들리는 마음 자주
너에게 들키고
너에게로 향하는 눈빛 자주
사람들한테도 들킨다.
< ‘꿈꾸는 시인, 나태주의 시 이야기(나태주, 푸른길,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12.03. 화룡이) >